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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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미와 나는 서로 알게된지가 거진 12년이 다 되어간다. 인생의 결정적인 인연은 아주 사소한데서 시작되듯이 콰미와 내가 알게된 과정도 일련의 코메디에 가깝지만 - 위험천만한 인터넷 만남 - 지나온 12년의 세월동안 나는 콰미에게, 콰미는 나에게 서로를 성장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되는 생필품 같은 존재가 되어왔다. 그런 위험한(?) 조짐을 느꼈지만 콰미는 결국 목회자가 되었고, 이 사람 속에서 번득이는 영감은 나에게는 항상 삶의 활력소가 되어준다.
역시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진짜 주인공이 나와야 될 차례인데... 마이산 이야기가 나와야해서 또 이야기가 길어질 듯...
휴가가 시작되는 주말에 콰미에게 어디 1박 2일이나 2박 3일 정도 어디 같이 다녀올까 제안을 했더니, 자기도 흔쾌히 좋다고 했다. 목포를 갈까, 여수를 갈까 생각했지만 짧은 시간동안 다녀오기엔 전혀 현실성이 없었고, 마침 콰미가 웃겨 누님과 연락이 되면서 찾아가 뵈어도 될까 여쭈었더니 흔쾌히 승낙을 하시더라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아... 여기였구나!' 원래 갈 곳이 이 곳이었는데 모르고 있었던 느낌? 더구나 웃겨 누님은 꼭 한 번 뵙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진안 갈 마음을 먹고 휴가 전 한 주는 하루 하루 도 닦는 느낌으로 보냈더니 또 후딱 지나갔다. (요새는 일을 도 닦듯이 하는 노하우를 알게 되었다. 그 순간에만 집중해서 삼매의 경지에 이르면 시간성에서 벗어나는 건지 시간은 정말 후딱 지나간다 ㅋ 괴로움도 즐거움도 모두 여의고 순간에만 집중하기... 또 말이 길다 ㅋ. 근데 이런 이야기들이 또 내가 하고싶은 엑기스인 경우도 많다. ㅋ)
결국 토요일은 왔고, 휴가 전 주말이라 일이 끝나고 나니 혼이 빠진 느낌이었지만, 진안으로 향하는 마음은 너무 가벼웠다. 차도 하나도 안 막혔고, 2시간도 안되어 마이산 도립공원 북부 정류장에 도착했다. 콰미는 특유의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강아지처럼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나도 후줄근한 강아지 같기는 마찬가지)
암마이산을 향해 조금 걷다보니 산 봉우리 오르기 전 턱밑까지 전기차가 다니길래, 전기차에 올랐다. 확성기로 흘러 나오는, 세월의 무게에 진이 다 빠진듯한 "전자 안내양" 누님의 설명을 들으며 오르는 산길은 정말 상쾌했다. 전기차 아저씨가 6시 전까지는 내려오라고 해서 시간을 계산해보니 넉넉했다. 산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중간에는 길이 위험해서 다 올라야 하나 어쩌나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은 끝까지 다 올랐고, 마침내 암마이봉에 도착했다. 오르고 얼마 있지 않아서 엄청난 비가 내렸다. 온 몸은 흠뻑 젖었지만, 깨끗한 공기와 맑은 비에 영혼까지 깨끗해지는 기분이었다. 떼이야르 샤르뎅의 말을 빌리면 콰미와 나는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다. 너무 좋았다. 그렇게 비를 맞으며 산을 내려왔고 다시 전기차를 탔다. (전기차 아저씨는 좋은 추억이 되라면서 왕복 요금을 편도 요금으로만 받아주셨다. 재수~ 아저씨 너무 좋아)
서로 사인이 맞지 않아서 둘 다 각자 장을 보는 바람에 삑사리가 나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거기에서 웃겨 누님 내외분께서 계시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골길은 정말 정감이 있었다. 결국 마이산에서 30분 정도 걸려서 웃겨 누님 내외분이 계시는 곳에 도착했다. 첫 인상은 두 분 다 눈이 참 맑다는 느낌이었다. (요새 내 눈은 마가 끼었는지 탁해져서 쥐눈에 좀 가깝다 ㅜ ㅜ)
같이 고기를 굽고, 직접 재배하신 채소와 된장, 그리고 웃겨 누님께서 직접 생산하시는, 잊을 수 없는 맛의 김치도 함께 곁들여 성찬을 했다. 대구는 날씨가 찌는데 진안은 고원지대라 그런지 선선했다. 식사 후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이야기 꽃이 피었다. 웃겨 누님의 바깥 어른(이 선생님?)은 너무 재밌는 분이었다. 약간은 장난기 있는 개구장이 같으면서도, 사람이 무진장 좋은데, 거기다가 빠져들게 하는 입담까지 겸비한 분이셨다. 교회에 관한 이야기, 신앙에 관한 이야기, 또한 삶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면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런 이야기가 이렇게 행복한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리는 서로 말이 너무 고팠던 것일까? 이야기가 끝날 듯 또 이어지고, 내일 교회에서 뵙자는 인사를 하고 나서도 또 아쉬운 듯 대화가 이어졌다 ㅋ.
편안하게 잠을 이루고 다음 날 근처에 있는 '봉곡교회' 에 갔다. 웃겨 누님 내외분이 진안으로 내려오신 후에 목사님을 도와서 열심히 섬기고 있는 곳... 화려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전형적인 시골 교회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귀농하셔서 진안에 정착하신 여러 분들이 봉곡교회의 목사님의 진정성에 이끌려 열심히 목사님을 돕고 있어서 젊은 분들이 제법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 웃겨 누님 내외분이 계시는 것 같았다.
노인들 밖에 없어서 결국은 사라져야만할 것 같은 교회에 그 젊은 분들의 존재는 참으로 보석과 같았다. 웃겨 누님이 섬기시는 소박한 성가대의 송영과 찬양을 들으면서 나는 어디서도 느끼지 못했던 전율과 감동을 느꼈다. 화려한 파이프 오르간에 전공자들로 구성된 삐까뻔쩍한 성가대도 이런 느낌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신성의 역설적 신비를 느꼈다.
(한국 근본주의의 거목 박형룡 목사가 수트를 멋지게 차려 입고는 바르트를 만나러 갔는데, 초라한 촌로 - 바르트 - 가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것이 뜻밖이었고, 거기다가 멋진 큰 교회가 아닌 스위스의 작은 시골 교회를 담임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는 이야기를 책에 적어놓은 것을 읽어본 일이 있다. 그러고는 자유주의자에게 한국의 신학자가 복음을 변증하고 이기고 돌아왔다나 뭐라나. 암튼 걔들 겉멋은 박형룡을 닮은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진안의 세세한 부분까지 상세히 프린트까지 출력하셔서 설명해주시던 이 선생님은 우리가 계곡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회를 지나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아이처럼 손을 흔들어주셨는데, 그 아이같은 장난기와 천진함, 따뜻함이 참 좋았고 재밌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치랑 이 것 저 것 챙겨주시는 웃겨 누님은 어머니 같기도, 친누님같기도 했다. 누나가 없는 나는 정말 저런 누님 한 분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웃겨 님께서 그냥 웃겨 누나라고 불러라고 하셨지만, 차마 그렇게는 못할 거 같아서 웃겨 누님으로 불렀습니다. 글을 쓰고 보니까 약간 예의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우려가 느껴져서 사족을 달면서 글을 끝맺습니다. ㅋ)
첫날님, 콰미님, 웃겨님, 더웃겨님의 그 시간들을 가늠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