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관련링크 : |
---|
<융 심리철학, 손 안대고 코 풀기>
1. 무의식
불교와 동양 사상은 이미 무의식의 존재를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고, 쇼펜하우어나 니체의 저작에서도 무의식에 관한 힌트가 나오지만, 최초로 무의식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이야기한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그는 우리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고, 의식의 수면 아래에는 거대한 무의식이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는 무의식을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 했고, 따라서 개인 의식의 수면 아래로 유배당해 억압되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무의식으로 보았다. 결국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은 의식에서 떨어져 나간 무언가였다. 그는 무의식 그 자체에 관해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지 정신 치료를 위한 이용가치가 있는 정도의 의미에서 무의식을 이용하였다.
그에 반해 융은 무의식 그 자체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는 또한 개인 무의식보다 더 심층에 존재하는 집단 무의식을 직관적으로 발견했다. 개인 무의식은 의식의 수면 아래에 억압되어 컴플렉스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면, 집단 무의식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선험적인 것으로서 원형(Archetype)의 형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라고 보았다. (융은 그 원형이 상징(Symbol)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인간 속의 어떤 원형은 그리스도라는 상징으로, 붓다라는 상징으로 표현된다고 보았는데 그 상징이 표현하는 원형이 바로 "자기"(Self)인 것이다.)
융은 여러 가지 원형들을 발견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들이 아니마(아니무스), 그림자, 페르조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원형 중의 원형인 자기가 있다.
2. 인간 정신의 발달 단계
융에 따르면 인간의 어린 시절 정신적 삶은 무의식적인 삶으로 시작한다. 이 때의 정신은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분리 되지 않은 상태에 가깝다.
그러다가 사춘기를 즈음하여, 의식이 무의식에서 분리되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무의식은 의식에 의해서 억압이 되어 수면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의식이 정신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사춘기 시절이 불안정한 이유는 주도권이 바뀌는 급변적 과도기이기 때문이다.)
융은 창세기의 선악과 설화는 인간의 정신적 급변기인 사춘기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본다. 즉, 선악과를 따먹는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이 무의식적인 삶을 살던 어린 아이의 삶에서부터, 무의식에서 의식이 분리되면서 그 의식이 자신을 책임지며 살아가야하는 삶으로의 급변을 의미한다고 본다. 실낙원은 의식과 무의식이 분열된 이원론적 삶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이다.
사춘기를 넘어서 성인이 되어갈수록 인간은 의식이 주도권을 더 강화하고, 무의식은 완전히 수면 아래로 내려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이 때의 삶은 사회화와 개인적 성취를 이루어가는 자아실현의 삶이다. 비유를 하자면 기초 없이 높은 탑을 쌓아가는 시기이다. 이 때는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이 극에 달하는 시기이며, 그럴수록 정신적 에너지는 넘치는 시기이다.
그러다가 마흔을 전후한 나이가 되면 자신이 쌓아온 탑은 그 기초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지금까지의 삶이 높이적 삶이었다면 이제는 깊이적 삶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춘기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 의식의 주도에 의해서 무의식이 억압된 삶이었다면, 지금부터는 내 속의 무의식이 의식화되어 드러나면서 의식과 화해하고 통합된 삶으로 가야하는 시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국 마흔 이후의 삶은 무의식과 의식이라는 대극이 통합된 인격 완성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융의 심리학은 중년의 심리학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3. 자기(Selbst) 원형과 인격의 완성(자기실현)
중년이 지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을 구성하는 대극적인 요소들이 통합되어 이원성(Dualism)이 극복되고 인격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개인 무의식이든 집단 무의식이든 억압되어 있거나 잠재되어 있던 특징들이 의식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의식화’를 통하여 통합되어 통전적인 인간이 되는 인격의 완성의 과정을 자기실현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남자의 경우 남성성(페르소나)에 의해서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어 있던 여성성(아니마)이 의식화 되면서 남성성과 더불어 통합되는 것이다. 또 예를 들면 자아가 대표하는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 속으로 억압되었던 그림자가 의식화 되면서 자아와 더불어 통합되는 것이다. 이러한 통합은 융이 자주 그렸던 불교의 만다라의 상징을 통해서 형상화되었다.
그런데 이런 통합을 매개해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원형 중의 원형으로 불리는 자기(Self)이다. 이러한 대극적 정신 요소들의 화해와 통합은 바로 ‘자기’ 원형에 의해서 일어난다. ‘자기’ 원형은 일반적으로 중년이 넘어선 나이에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이 원형은 대극적 정신 요소들의 통합의 매개체임과 동시에, 통합되어가는 과정이자, 그렇게 완성된 인격의 결정체라는 세 가지의 모습을 띠고 있다.
4. 자기실현과 누미노제 체험
인격의 완성을 의미하는 자기실현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의식적 삶에서 중심을 차지하던 자아(ego)가 중심의 자리를 자기(Self)에게 내어주면서 ‘자아-자기 축’ (ego-Self axis)을 형성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우리의 정신의 중심은 자아가 아닌 자기가 된다.
자기는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원형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엄청난 힘이 나온다. 그 힘은 바로 무의식을 의식화하면서 의식을 확장하여 시야를 넓히고, 인격을 변환시키는 힘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자기 원형은 그리스도, 혹은 붓다와 같은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었다. 상징은 원형을 자극하여 변환을 일으킨다. 그 것이 바로 융이 말한 Symbol & Transformation이다.)
자기실현을 경험한 인간은 정신의 전체성(단일성)을 체험하며 그 체험은 누미노제(Numinose)와 일치한다. 거룩의 체험을 표현하는 누미노제는 그냥 종교적인 성스러운 분위기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이 것은 정신의 전체성 체험 속에서 모든 삼라만상이 하나됨(하나임) 속으로 들어가는, 진짜 거룩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전체성은 집단성과는 전혀 다른, Uniformity가 아닌 University를 의미한다.)
누미노제에 대한 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의 정신치료적 작업의 주된 관심은 노이로제의 치료 - 심리적 문제 해결 -에 있지 않고 누미노제에로의 접근 - 정신의 전체성 체험 -에 있다. 누미노제에로의 접근이 원래적인 정신치료이고, 누미노제의 체험에 도달하는 한, 병의 화(禍)로부터 해방된다”
5. 원형, 의식화냐? 빙의냐?
개인 무의식은 콤플렉스의 형태를 띠고, 누군가 그 콤플렉스를 건드렸을 때 인간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를 부리게 되지만, 치료자의 도움으로 그 콤플렉스와 의식적으로 대면하게 될 때 콤플렉스는 힘을 잃는다. (히스테리는 그 속에 힘을 담고 있다.)
비슷하게 집단 무의식도 원형의 형태를 띠고, 인간은 그 원형에 의해 사로잡히기도 하고, 그 원형을 의식화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를 빙의라고 하고, 후자의 경우를 초월이라고 한다.
정명석과 예수(싯다르타), 안철수와 문재인(프란체스코 교황)은 빙의와 초월의 구체적인 예로 볼 수 있다. 빙의의 경우 인간은 퇴행과 정신병적인 상태를 경험하지만, 초월의 경우 인간은 자기를 넘어서는 인격의 변환을 경험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사람들 중에는 원형에 의한 사로잡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온통 정신병을 앓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6. 원형과 동시성, 그리고 목적론적 세계관
융은 원형을 단순히 인간의 정신에만 관련이 있는 독립체가 아닌, 더 근본적으로는 정신으로부터 물질계 일반을 잇는 다리로 보았다. 즉, 원형은 인간의 의식을 형성할 뿐 아니라, 물질계의 현상도 일으킨다는 것이다. 융이 이야기 한 “하나의 세계(unus mundus)”는 원형이라는 매개에 의하여 인간의 정신계가 물질계와 하나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인과율이라는 측면에서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일들이 우연의 일치처럼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성’도 이렇게 설명이 된다. (어느 날 융은 학회를 갔다가 그 날 저녁에 숙소에서 쉬는 도중에 자신의 뒤통수가 둔기에 맞는 듯한 충격을 느끼는데, 그날 그 시간에 자신이 상담했던 환자가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원형은 인간의 정신계와 물질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며 그 둘을 이어주는 초심리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또한 융은 이 세계의 역사를 인과율(causality)에 의해서가 아닌 목적론(teleology)의 입장에서 보았다. 마치 ‘자기’ 원형에 의하여 인간의 정신은 통합이라는 목적론적 전망으로 이끌려가는 것처럼, 이 세계의 역사도 목적론적 전망에 의하여 이끌려간다고 본 것이다.
계속 연재해주세요. 너무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