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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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 전서 15장 다시 읽어보는데, 앞에 부분은 서론이 장황하고, 중요한 부분은 35절 이후...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본문이 말하는 '종말의 부활' 이라는 상징은 융의 관점으로 보자면 개성화(individuation)와 자기실현(Self realization)의 궁극적 완성을 의미한다. (사실 완성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참으로 부적절한 표현이다. 완성은 개념으로서만 가능할 뿐 실존에서는 불가능하다.)
일단 이 이야기부터 하고 시작하자.
하늘이 “궁극”을 공간적으로 표현한 것인 것처럼, 종말은 “궁극”을 시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늘이 궁극의 헬라적 어법이라면, 종말은 궁극의 히브리적 어법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나는 성서에서 말하는 하늘을 공간적인 의미로 이해하지 않듯이, 종말을 시간적 미래로 이해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늘이라든가, 종말이라든가, 더 구체적으로는 미래적 전망으로 표현된 부활은 사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 숨겨져 있는 궁극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제 본문으로...
35절 이후 본문을 보면, 약간 난삽하게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씨앗이 각각의 고유한 영광을 지닌 몸으로 완성되는 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한다. 씨앗 - 비천한 것, 썩을 것, 약한 것, 육적인 몸 - 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존재를 말한다면, 몸 - 영광스러운 것, 썩지 않을 것, 강한 것, 영적인 몸 -은 그 현존재가 도달하게 될 - 도달해야 할 - 궁극적 목표점을 의미한다.
44절에 보면 ‘소마 프쉬꼰’(σῶμα ψυχικόν)과 ‘소마 쁘뉴마띠꼰’(σῶμα πνευματικόν)이라는 말이 대비되어 나온다. 우리말로 번역해보면 육적인 몸과 영적인 몸이라는 뜻으로, ‘프쉬꼬스’를 ‘육체적인’, ‘물질적인’으로 번역해놓은 경우도 더러 있던데, 별로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성서에서 보통 몸이라고 번역이 되는 “소마”는 참 묘한 단어이다. 사릌스와 소마, 또한 쁘뉴마와 소마를 대비해보면 소마의 뜻이 어떠해야 하는지 드러난다. 전자의 경우에 사릌스는 단순한 살, 육체인데 반해서, 소마는 생명을 가진 존재로서의 몸을 의미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쁘뉴마가 영적 지향성이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데 반해서 소마는 육적 지향성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즉, 소마는 단순한 물질적 몸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지향성을 가진 인간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프쉬케의 의미를 규명해보면, 현대의 영어에서는 프쉬케는 psych- 어근으로 ‘정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한계적 목숨”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고 할 때 그 “목숨”이 바로 프쉬케다.
어떤 번역에서처럼 소마 프쉬꼰을 물질적인 몸으로, 소마 쁘뉴마띠꼰을 신령한 몸으로 번역을 하면서, ‘이 신령한 몸의 재질은 뭘까?’ 이런데 관심이 가면 그냥 나가리 되는 거다. 설마 티타늄 합금이겠는가?
소마 프쉬꼰은 한계적인 목숨에 저당 잡힌 인간을 상징한다. 그에 반해서 소마 쁘뉴마띠꼰은 영적인 인간, 즉, 한계적인 목숨을 넘어서는 인간이다.
육적인 몸은 자아 중심적인 삶 (ego oriented life)에 머물러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을 표현하는 말이라면, 영적인 몸은 자아를 넘어서 자기 중심적인 삶(Self oriented life)으로 넘어가면서 자기실현을 향해 달려가는 궁극적 인간을 표현하는 말이다. 결국 성서에서 말하는 육의 소욕을 따르느냐 영의 소욕을 따르느냐 하는 것도 다 이런 맥락이다. 이걸 무슨 기독교가 제시하는 규범을 따르는 삶의 여부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 한심한 일이다.
46절에서 성서는 육적인 것이 먼저고, 그 다음이 영적인 것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정말 지당한 이야기다. 융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아도 자아실현의 삶에 이어서 자기실현의 삶이 나타난다. 어느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국면이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49절)
51절 이후에서 바울은 신비를 말한다. 이 신비는 당대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다. 단지 에크하르트의 말을 빌리면 그 신비는 우리의 영혼의 무시간성 무공간성 속에서 일어난다.
연금술사들은 여러 가지 금속을 융합하여 금을 만들려는 시도를 해왔지만, 결국 물질계에서 그 것은 헛된 시도로 판명되었다. 그렇지만, 융은 물질 현상을 넘어서 있는 연금술의 중요한 의미를 발견했다. 금은 우리의 영혼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6절)
자기실현을 경험하는 인간은 외적 규정에 의한 삶이 아닌, 내적 동기에 의한 삶을 산다. 성서에서 말하는 성령에 이끌리는 은혜의 삶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자기만의 멋을 가진 삶이다. 자기실현은 항상 개성화를 수반한다.
니체가 말 한대로 율법은 주인의 윤리가 아닌 노예의 도덕이다. 노예의 도덕은 끝없이 강박을 양산해내고 죄의식만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사는 삶의 귀결은 결국 죽음 같은 무의미와 허무함이지 않겠는가?
융은 인간의 자기실현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에도 계속된다고 이야기 한다. 결국 부활은 궁극적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을 이루어가는 주체는 ‘그리스도’라는 상징에 의해서 표현되는 자기 원형이다. 에크하르트의 말을 빌리면 하느님이 우리의 영혼 속에 낳으신 외아들이자 영혼의 불꽃이다.
융은 잘 몰랐는데 글 잘읽었습니다.
죽음이후에도 자기실현이 계속된다는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자기를 찾은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고 죽어도 사는것이겠죠.
이런 영원한 생성, 과정, 새로움과 생명력이 있는데,
'종말', '완성', '완전' 등의 단어는 뭔가 닫힌 결말을 예고하는 거 같기도하고,
지금과 그때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거 같고,
그런 기질들 기어이 플라톤으로 회귀하려는 건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인가 봅니다.
뭐, 세상이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지금 살아있으니 지금을 꿀같이 살아야겠네요. ㅋㅋ
꿀떨어지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