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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저녁 때 나는 서재에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고 두 딸 아이는 텔레비전에서 어린이 프로를 보고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어보니 내가 어렸을 떄 읽었던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이 인형극으로 방영되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에 화려한 옷을 입기 좋아하는 임금이 살았다. 이웃나라의 옷 짜는 사람들이 임금 앞에 와서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멋진 옷을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자, 그 말에 솔깃해진 임금은 그 사람들이게 하루 빨리 옷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드는 옷은 아주 특별해서 마음이 더러운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보인다고 허풍을 떨었다. 이들은 직기 앞에서 천을 짜는 시늉을 능청스럽게 해 보이면서 몇 날에 걸쳐 열심히 옷감을 만들어 나갔다.
임금을 호기심 때문에 참을 수 없어서 그들의 작업장에 가 보았다. 아니, 이게웬일인가. 신기한 옷감이 자기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눈을 아무리 비비고 보아도 역시 오색영롱한 실타래가 달려 있어야 할 직기 안에는 먼지만 너풀거릴 뿐이었다. 옷을 다 만든 다음에는 보이겠거니 하고 혼자 끙끙 앓으며 기다렸다.
드디어 임금이 옷을 입고 온 백성 앞에 행차하는 날이 되었다. 그렇데 문제는 임금의 눈에도, 거기 모여 섰던 고관대작의 눈에도 여전히 그 신기한 옷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임금은 지금이라도 자기눈에 보이지 않는 옷을 입지 않겠다고 버티고 싶었지만 이미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존재하지도 않는 그 옷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있으니 자기 혼자만 마음 나쁜 사람이 될 수 없어서 결국 벌거벗을 수밖에 없었다.
몇 날 몇 달 동안 온 나라에 떠벌린 일이기 때문에 그 날에는 백성들이 벌떼처럼 모여 들었다. 삼현육각을 울리며 높은 가마에 올라 탄 임금의 꼴이라니, 삼척동자도 배꼽을 잡을 만한 일인데 아무도 끽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너무도 장엄하고 엄숙하고 멋진 잔치였기 때문이다.
모두들 자기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벌거벗은 임금을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있는 임금으로 인정했다. 아예 입을 다물고나 있었느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임금의 마음을 사려는 듯 어떤 이들은 너도 나도 보이지도 않는 옷을 입은 임금에게, 너무 품위 있게 보인다고 아부하고 있었다. 그 때 한 쪽 구석에 구경 나왔던 어린아이가 재미있다는 듯이 소리쳤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이 이야기의 끝마무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아이의 외침에 거기 모였던 모든 사람들의 의식이 되살아나서 부리나케 벌거벗은 임금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혔는지, 아니면 소리치는 아이를 서둘러 집으로 쫓아 보내고 벌거벗은 임금의 행차를 계속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 이갸니는 비록 짧은 어린이 동화지만 우리에게 너무도 많은 가르침을 주도 깅싿. 잠시 여기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자.
좋은 옷 입기를 좋아하던 임금은 권위의식과 허위의식의 상징이다. 그에게 패션에 대한 예술적 안목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기의 본분에 맞지 않는 일에 집착하다가 사기꾼들에게 자기의 영혼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둘째로 핵심적인 인물은 사기꾼들인데 인간의 허위의식을 이용하여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문민정부라하는 지금도 청와대를 사칭하여 부동산을 사고 파는 데 사기를 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고관대작과 백성들은 감히 임금의 마음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나라는 벌거벗은 임금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허위 질서 가운데서 오직 어린아이만이 사실을 직시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직관이라고 부른다. 있는 것을 있는 것으로, 없는 것을 없는 것으로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은 어른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갖고 있었다. 임금과 고관들과 백성들은 벌거벗은 임금에 대해 너무도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사실을 사실로 말할 수 없었지만, 어린아이는 그저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진술했던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 이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가능한 것은 아닐까? 오늘도 역시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그런 이데올로기를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로서 나는 너무도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여론을 조작해 나가는 거대한세력이 아직도 이 나라를 지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부끄러워한다. 특히 북한에 대한 지나친 공포심과 증오심을 키워나가는 정치인들과 매스컴의 그 허위의식에 대해 슬픔을 감출 수 없다.
통일이란 정치적으로 협약을 맺는다고 가능한 게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부터 허물어야 하는 것인데,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높게 담을 쌓아간다. 북한과 관계된 문제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면서 어떻게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어떤 귀순자의 입을 빌려 북한에 핵이 다섯 개가 있다는 엉뚱한 유언비어를 퍼뜨렸다가 미국으로부터 심한 반발은 산 후, 흐지부지 된 적도 있다. <객지>와 <장길산>등을 저술한 황석영은 우리의 신문들이 갖고 있는 편협성과 왜곡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인터뷰에서 북한 사람들이 매일 이데올로기 토의만 하는 게 아니라 우리처럼 화투도 치고 음담패설도 하면서 살아간다고 대답하면, 다음 날 신문에 "북한 사회 놀음 성행 중" 이라고 실린다는 것이다.
진리에 선다는 것은 그렇게 엄청난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을 없다고, 있는 것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그 아이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자. "임금님이 벌거벗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