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비안들의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부담없이 서로의 생각과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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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이야기 거꾸로 읽어보기...
우리는 선악과 이야기가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하여 실락원에서 퇴출된 이야기로만 읽는다.
선악과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이상, 이 것을 역사의 인과율로 해석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세르비아의 한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왕족을 암살하는 바람에 세계 제 1차 대전이 일어났다는 그런 스토리와는 다르다는 이야기다.
결국 그 이야기는 인간의 존재와 실존에 관한 어떤 해석학적 시도다.
그리고 그 해석은 열려 있어야 한다.
선악과를 따 먹은 이야기를 신의 명령에 대한 불복종으로 해석하는 것은 종교를 너무나 규범적으로 만드는 시도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이 구조는 얼마나 진부하고 폭력적인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로 만들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 이야기에서 인간의 "운명"을 발견한다. 신의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게서 그 불을 건네 받은 인간의 위험한 운명 말이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기와 같던 인간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버리는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의 성장과 발달의 과정과도 꼭 일치한다. 사춘기라는 과도기를 통하여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인간은 피치못하게 철이 든 성인이 되지만, 성인이 되면서 더 명확하게 되는 것은 실존적 소외감이다. 홀로 세상에 버려졌다는 것, 그래서 외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뿌리 없음을 느끼게 될 때 무의미함과 허무는 덤으로 따라온다. 실존주의에서 소외와 허무를 진단해낸 것은 정말 탁월하다.
차라리 모를 때가 나았다며 우리는 어린 시절의 무의식적 삶을 동경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에덴으로 돌아갈 수 없다.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은 우리의 의식적인 삶이 무의식적인 삶과 다시 화해될 필요성을 암시한다.
너무나 의식적인 성인의 삶은 이제 내면의 무의식적인 삶 속에 뿌리 박으며 연결을 시도해야 한다. 뿌리감을 찾는 것... 이 것이 종교적으로는 "신과의 화해" 그리고 "하나됨"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