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용할 양식 [4]
7월29일 일용할 양식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주기도의 세 번째 항목이다. 이런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기도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제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가 정치 투쟁을 마다하지 말아야 한다. 모두에게, 특히 가난한 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게 하려면 지나치게 많은 소유가 적절하게 분배될 수 있게 하는 어떤 강제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보장...
생명 왜곡 [2]
7월28일 생명 왜곡 주기도에는 다섯 항목의 기도 제목이 나온다. 첫 번째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이다. 십계명 세 번째 항목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와 뜻이 같다. 설교에서 이 문장은 하나님을 왜곡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 문장은 곧 생명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이런 말들이 애매하게 들릴 것이다. 생명에 대한 이해에 따라서 이 말의 의미와 차원도 달라진다.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가는 게 생명이...
기도 매너리즘 [10]
7월27일 기도 매너리즘 한국교회 예배에서 볼 수 있는 특징 중의 하나는 대표기도 순서가 있다는 것이다. 주일대예배에서는 주로 장로들이 대표로 기도한다. 기도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대체로는 별로 기대할 게 없다. 자신이 주워들었던 온갖 아름다운 종교 언어를 다 동원해서 자신의 기도가 진정성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려고 한다. 역겹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성 소수자들을 비판하는 기도, 정치적으로 반대 되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기도, 타종교를 비판하거나 친미 사대주의를 부추기는 기도도 적지 않다. 그렇지는 않...
기도 냉소주의 [10]
7월26일 기도 냉소주의 지난 설교 시간에 기도 냉소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 지성인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믿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이 시대가 그렇게 만든다. 지금 이 시대는 가파르게 과학 실증주의로 치닫고 있다. 과학적으로 실증이 되지 않는 것에는 마음을 두지 않는다. 인공지능만 해도 그렇다. 현대 지성인들은 인공지능이 현실화되는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주는 인공지능이 출현하면 하나님은 자리에서 밀려날 것이다. 굳이 인공지능을 끌어들일 필요도 없다. 현대 지성인들은 자신의 운명에...
매일 기도하라 [2]
7월25일 매일 기도하라 수년 전에 졸저 『매일 기도하라』가 나왔다. 내 기억으로는 대구샘터교회 설립 10주년이 되는 2013년 봄에 한들출판사의 이름으로 나왔다. 그 전 해에 일 년 동안 매일 기도문을 써서 다비아 매일묵상 코너에 올렸다. 그 책으로 지금도 매일 기도를 하는 분들이 있다.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는 모른다. 기도는 보통 영의 호흡이라고 한다. 영은 몸과 더불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다. 몸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영은 그렇지 않다. 정신, 이성, 혼, 감정, 의지 등이 다 몸과 구별되는 요소로서 영의 영역에 속...
해바라기 [5]
얼마 전부터 우리집 마당에서 자란 해바라기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환한 얼굴을 보세요. 21일에 찍은 겁니다. 대구샘터교회 24일 주보 표지에 위 사진을 올렸습니다. 벌 두 마리가 정신없이 붙어서 꿀을 찾고 있는데, 색깔이 비슷해서 잘 표시가 나지 않을 겁니다. 해바라기꿀은 듣보잡인데 미량이나마 있긴 있나봅니다. 토끼풀 꽃에서도 꿀을 찾는 벌이니 훨씬 찬란한 모양의 해바라기에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지요. 아래는 한발 물러서서 찍은 모습니다. 위 사진은 오늘 23일에 찍은 겁니다. 이틀 차이지만 그 사이에도 많이...
먹고사는 문제 [6]
7월22일 먹고사는 문제 정 목사의 설교와 성경 강해 등은 관념적이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어제 묵상만 해도 그렇다. 이전투구 방식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빼앗기지 않을 것에 영혼을 집중시키고 산다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 교회끼리의 무한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교회에서 성장에 목표를 두지 않는 목회가 실제로 가능한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런 거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만 구하라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 만약 아내와 두 딸이 있는 내가 40 대 젊은 목사로서 3...
빼앗기지 않는 것 [7]
7월21일 빼앗기지 않는 것 예수는 마리아가 좋은 것 한 가지를 택했으니 빼앗기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0:42). 마리아가 예수를 독차지 한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예수와의 관계에 집중하는 마리아의 삶이 그 무엇으로도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 열정을 기울여 얻으려는 것들은 대개가 다시 남에게 빼앗길 수 있는 것들이다. 돈은 두 말 할 것도 없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은 그걸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한다. 애를 쓴다는 것은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뜻이다. 돈만이 아니라 권력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고, 젊음과 ...
예수의 발치 [2]
7월20일 예수의 발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다.’고 누가복음이 전한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는 사람들은 보통 남자 제자들이다. 이번은 예외 경우다. 다른 복음서들은 마리아가, 또는 한 여자가 예수님의 머리, 또는 발에 향유를 부었다는 사실까지는 다 말한다. 마리아가 발치에 앉아서 오랜 시간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는 누가복음만 전한다. ‘당신, 예수 발치에 앉아 있을래?’ 하고 물으면 많은 이들이 사양할 것이다. 예수 발치는 별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재...
염려와 근심 [5]
7월19일 염려와 근심 마르다는 요한복음과 바로 이곳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리아의 언니지만 성경에서의 비중은 동생에게 밀린다. 마리아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렇지만 독자들은 마리아보다 마르다에게 인간미를 더 느낄 것이다. 좋은 뜻으로 대단히 인간적이다. 마르다는 바쁜 일로 염려와 근심을 벗어나지 못하는 유형의 사람을 대표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는 이미 통계에 잘 나와 있다. 노동의 양과 강도는 세계에서 손가락에 들 정도로 높다. 목사로부터 교회 지도자들과 일반 신...
마르다와 마리아 [3]
7월18일 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절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독립 전승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기는 하지만 차이가 난다. 누가복음은 예수가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 들어왔을 때 마르다는 부엌일에 충실했고 마리아는 말씀 듣는 일에 충실했다고 하는 반면에, 다른 복음서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없이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한다. 조금 자세하게 보자. 마태(26장)는 예수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향유를 식사하는 예수의 머...
골로새 교회(6) [6]
7월16일 골로새 교회(6)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는 명제는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가리킨다. 속량은 값을 지불하고 죄를 용서받는 것이다. 노예가 속량 받으려면 그에 해당되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아들 안에서 속량을 받았다는 것은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지불되었다는 뜻이다. 속량은 법적인 개념이다. 고대 이스라엘의 제사 행위에도 이런 개념이 들어 있다. 현대인들에게 속량 개념에 근거한 죄 사함은 이해 불가다. 말이 안 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죄 사함의 길이라는 성경의 주장은 현대인...
골로새 교회(5) [3]
7월15일 골로새 교회(5) 골 1:14절은 이렇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기독교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절이다. 이걸 단순히 구호로만 알고 있으면 말씀의 능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죄 사함이 무언지 알려면 죄가 무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인간의 저주스러운 운명이 다 죄 탓이라고 보았다. 가난, 질병, 사고, 죽음이 모두 죄 때문이다. 선악과 설화는 그건 단적으로 보여준다. 아담과 이브의 죄로 인해서 인류는 출산과 노동과 죽음의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졸지에 재산과 가족...
골로새 교회(4) [1]
7월14일 골로새 교회(4) 어제 성서읽기에서 해석학 작업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걸 염두에 두고 골 1:5절을 보자. 바울이 골로새 교우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이라고 한다. 하늘의 소망이라는 표현이 우리에게는 낯설다. 2천 년 전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당연했겠지만 말이다. 고대인들은 하늘을 오늘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만 세상을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자 망원경과 현미경이 없던 시대이니 어쩔 수 없다. ...
골로새 교회(3) [1]
7월13일 골로새 교회(3) 골로새서는 골로새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다. 편지는 발신인과 수신인이 있다. 골로새서의 발신인은 바울(공동 발신인 디모데)이며, 수신인은 골로새 교회 신자들이다. 무슨 말인가? 골로새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서 기록된 문서라는 말이다. 그 역사는 물론 교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가리킨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과 우리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크다는 사실이다. 1백년도 아니고, 1천년도 아니고, 자그...
골로새 교회(2) [4]
7월12일 골로새 교회(2) 골 2:4절은 다음과 같다.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교묘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장8절도 비슷한 내용이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이들이 교회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이들을 오늘의 ‘신천지’쯤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신천지는 이미 잘못된 게 확 드러나니까 큰 문제가 못된다. 골로새 교회의 이들은 신앙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신앙의 방식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냥 ...
골로새 교회(1) [1]
7월11일 골로새 교회(1) 지난 설교의 성경본문인 골 1:1-14절에 나오는 이야기의 배경은 골로새 교회다. 2천 년 전 골로새에 살던 일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해서 세계관이 갑자기 완전히 바뀌는 게 아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내 따라서, 친구 따라서, 또는 직장 상사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해도 그 사람의 세계관은 거의 그대로 남는다. 지금 교회 장로들도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그런 세계관이 기독교 신앙과 충돌하면서 갈등을 겪게 되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충돌이 심해지면 교회를 ...
기적(6) [8]
7월9일 기적(6) 우리의 ‘현대적’ 기적 이해와 성경이 증언하는 기적 사이에 가로놓인 격절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는 다음의 세 가지 통찰이다. 1) 우리는 기적 자체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에 관해 이야기하는 성경 본문만을 언제나 대한다는 통찰 2) 성경의 기적사화는 첫째로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의거해서, 현재와 미래에도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눈뜨게 하고 그럼으로써 직접 거기에 동참케 하려 한다는 통찰 3) 성경의 기적사화는 자연과학적 서술을 하는...
기적(5) [14]
7월8일 기적(5) 1969년 나는 ‘Bibel heute’(오늘의 성서)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나사로 사화를 예로 들어 예수께서 죽은 자를 소생시킨 사건의 의미를 나름대로 설명했다. 거기에 어떤 독자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했다. ‘나사로 소생에서는 역사상의 실제 사건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양자택일이거나 기껏해야 우리는 그것을 모른다는 한 가지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건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관된 의미만이 중요하다는 식의 그런 표현방법은 짐작컨대, 순진한 신자들에게 ...
기적(4) [2]
7월7일 기적(4) 성경은 주변세계이 이교적 통념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에 어긋나느냐?’ 따위의 문제는 제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근대적인 자연법칙성에 관한 개념을 몰랐으니 그런 문제는 아예 제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편 성경은 ‘모든’ 사건을 하나님의 활동 및 보살핌의 접근과 관련시켜서 관찰한다. 물론 많건 적건 하나님의 활동을 나타내는 뚜렷한 표징이 있기 마련이다. 성경의 기적신앙은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확신으로 정립되는 게 아니다. 그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고, 실제로 그것을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