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of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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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

  • Jan 01,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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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일 시작 2016년이 시작되었다. 2016은 단순히 숫자다. 그러나 우리 앞에 실체로 놓여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앞으로 일 년 동안 우리는 지구 안에 생존해 있을 것이다. 그러나 45억년이라는 지구의 나이 앞에서 금년 한 해는 너무 작아서 무의미에 가깝다. 그런데도 우리는 앞으로 일 년 동안 또 정신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쓸 것이다. 전도서(1:14)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바람을 잡으려...

마지막 [4]

  • Dec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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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1일 마지막 오늘이 2015년 마지막 날이다. 한 해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는 마지막이 있다. 흔히 말하듯이 우리의 일생도 곧 마지막이 온다. 지난 한 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지금의 이 마지막 순간을 능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많은 것들도 죽음을 능가할 수 없다. 모든 것은 마지막의 세력에 의해서 완전히 포섭된다. 마지막이 온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걸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많다. 의식하지 않는 이유는 의식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으니 그냥 현실에 충실히 사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에 놓...

해왕성 [7]

  • Dec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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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30일 해왕성 지난 설교에서 해왕성 이야기를 잠간 했다. 예배 시작 바로 전에 사회를 볼 집사에게 지구에서 보는 태양과 해왕성에서 보는 태양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질문했다. 오늘 인터넷 두산백과 ‘해왕성’ 항목을 찾아봤다. 앞부분만 인용하겠다. 태양에서부터의 평균거리는 30.13천문단위(1천문단위=1.496×108km), 궤도의 이심률은 0.00786(금성을 제외한 어느 행성보다도 작다), 자전주기 0.583일, 공전주기 164.79년, 지구와의 회합주기 367.5일이다. 또 적도반지름은 2만 4764km로 지구의 3.883배이다. 편율(扁率)은 0.02, 부...

규범과 설교 [2]

  • Dec 2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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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9일 규범과 설교 골 3장에는 악덕, 또는 패덕 항목 다섯 개와 선한 덕목 다섯 개가 나온다. 음란, 부정, 사욕, 정욕, 탐심,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 그것이다. 설교에서 짚었지만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용어들이 성서에는 많이 나온다. 갈 5:22,23절에는 아홉 개나 열거되었다. 사랑, 희락,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등이 그것이다. 이것 외에도 신구약성경에는 무수하게 많은 윤리적 규범들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설교자들은 이런 용어 자체를 설명하고 우리 삶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설교한다. 성경...

세리와 죄인

  • Dec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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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8일 세리와 죄인 어제 설교 제목인 ‘기독교인 완전’은 기독교인의 삶이 세상에서 완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또한 완전한 삶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과정이면서 목표이면서 존재 근거이기도 한 그 무엇이다. 그것을 설교에서 말하려고 했는데, 전달이 잘 됐는지 모르겠다. 보충 설명을 몇 가지로 나눠서 해보겠다. 먼저는 설교 앞부분에서 잠간 언급된 세리와 죄인에 대한 이야기다. 믿음과 삶이 반드시 일치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세리와 죄인을 예로 들었다. 예수는 종교 엘리...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 [4]

  • Dec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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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6일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 지난 12월20일 설교 마지막 대목에서 나는 대림절 신앙이 혁명의 거룩한 에너지라고 말했다. 마르크스가 기독교를 비판한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기독교를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중세기에 기독교가 역사 변혁에서 무기력한 조짐을 보인 건 분명하다.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속사정도 있다. 기독교 4세기에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영합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로 분리된 기독교는 자기들 내부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힘이 부...

휘브리스

  • Dec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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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휘브리스 마리아 찬송은 눅 1:51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라고 했다. 기독교 교부들은 교만을 죄의 본질로 여겼다. 대표적으로 어거스틴이다. 그에 따르면 죄는 헬라어 휘브리스가 가리키는 교만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선택한 이유는 자신들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올라갈 수 있다는 뱀의 유혹 때문이었다. 그들에게 자기를 높이려는 열망이 강했다는 의미다. 교만은 보통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이들에게서 흔하게 나타난다. 세상을 자기 뜻대...

성탄절 [2]

  • Dec 2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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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5일 성탄절 오늘은 2015년 성탄절이다.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것은 물론 로마 교회 전통이다. 기독교가 로마에 자리를 잡으면서 로마 문화와 접목되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일요일과 성탄절이다. 유대인들은 원래 토요일인 안식일을 지켰고, 초기 기독교도 역시 그랬다. 예수 부활이 안식일 다음날인 일요일에 발생했다는 전통이 있긴 했지만 초기 기독교는 대부분의 유대교 전통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다. 사도행전에 보면 새로운 지역에 가서 바울이 전도할 때 주로 안식일에 유대인 집회를 찾아갔...

2천 년 전과 2천 년 후

  • Dec 2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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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4일 2천 년 전과 2천 년 후 나는 시간에 대해서 자주 말한다. 시간이 나에게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은 예수를 만나는 데서 오지 무슨 시간 경험에서 오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수 경험이 기독교에서 핵심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 경험이라는 것도 시간 경험이 없으면 도그마에 떨어지고 만다. 예수 경험에서 핵심은 영원한 생명, 또는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생명인 부활인데, 시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 어떻게 부활을 말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해보자. 나는 1953년 출...

하나님 경험 [3]

  • Dec 23, 2015
  • Views 1499

12월23일 하나님 경험 지난 설교의 주제인 마리아 찬송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다. 이 찬송에 나오는 하나님의 큰일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또는 예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사건이라는 뜻이다. 먼저 마리아 찬송이 말하는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표현 자체를 생각해야 한다. 이건 곧 하나님 경험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은 마리아 찬송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 해당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자주 하지만 그 말에 아무런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많다. ...

마리아의 순종 file [3]

  • Dec 22, 2015
  • Views 2555

12월22일 마리아의 순종 어제 묵상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절정의 신앙은 결국 순종이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을 보면서 이 사실을 다시 절감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신비로웠다. 참척의 고통을 삭히는 중인지, 너무 고통스러워 넋을 잃은 건지, 삶의 허무를 되새기는 중인지, 잘 모르겠다. 무표정으로 보이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순종의 영성에 깊이 들어간 사람의 모습이 바로 저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 도대체 순종이 뭘까? 순종(順從)은 ‘순...

성모 마리아 file

  • Dec 2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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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1일 성모 마리아 어제 설교 앞부분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해서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몇 마디 했다. 15세 전후로 추정되는 마리아가 요셉과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건으로 인해서 구설수에 시달렸을 거라고 말이다. 소위 동정녀 마리아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이 아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그 사실을 말하고, 마가복음과 요한복음과 나머지 서신들은 이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동정녀 보도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의 내용에 들어온 게 아니라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들어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

새로운 현실

  • Dec 19, 2015
  • Views 1175

12월19일 새로운 현실 설교 마지막 구절은 다음이다. ‘그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현실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고 노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 제목을 다시 강조한 결론이었다. ‘새로운 현실’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있었지만, 과감하게 그대로 그 단어를 사용했다. 일상에서 익숙한 다른 마땅한 단어를 찾기 힘들었다.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실현과 현실은 비슷해보여도 다르다. 현실, 또는 현실성은 실현보다 더 근원적...

세상을 버틸 힘 [7]

  • Dec 18, 2015
  • Views 1379

12월18일 세상을 버틸 힘 다른 설교에서도 가끔 그런 말을 했던 거 같고, 이번 설교에 두 번쯤 이런 말을 했다. ‘.... 없이는 이 세상을 버텨낼 수 없다.’ 세상을 버텨내는 힘이 하나님과 그의 구원에서만 온다는 뜻이다. 우선 세상을 버텨낸다는 게 무엇인가? 일단 우리의 삶이 늘 위태롭다는 걸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 위태롭다는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하다. 인간 생존 자체가 위태롭다. 대한민국은 이런 점에서 더 유별나다.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도 힘들고, 복지 대책이 충분한 것도 아...

십자가의 운명

  • Dec 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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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7일 십자가의 운명 어제 묵상 마지막 단락에서 두 가지를 말했다. 그것과 연관해서 설교에서 다음의 사실을 짚었다. 우리 모두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운명, 즉 버림받은 자의 운명에 떨어진다고 말이다. 설교에서 짚은 이야기지만 좀더 부연 설명하겠다. 십자가 처형은 혼자 감당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전승이 있긴 하다. 그래도 결국은 각자 홀로, 절대 고독 가운데서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 두 사람이 겹쳐서 십자가에 못 박혀도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행복한 사람이...

예수와 십자가 [8]

  • Dec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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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6일 예수와 십자가 사실 예수와 십자가는 어울리지 않는다. 세례 요한과 참수형은 오히려 어울린다. 요한은 노골적으로 헤롯을 비판했으니 그럴 수도 있지만 예수는 반로마 무력투쟁은 물론이고 그렇게 오해될만한 발언을 한 적도 없으니 십자가 처형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차라리 순교자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었으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반로마 혁명가들에게만 해당되는 십자가 처형이 예수에게 집행되었다. 그 사실을 모든 기독교인들이 자주 읽고 있는 사도신경이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

하나님의 기쁨

  • Dec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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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5일 하나님의 기쁨 목사로 사는 즐거움의 하나는 설교다. 회중들이 설교에 은혜를 받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본인이 설교행위를 통해서 성경의 세계를 늘 새롭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 없이 목사로 산다는 것은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보다 오히려 불행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나이가 들면서 이런 즐거움이 늘어난다. 이제야 신앙적으로 철이 드는 건지. 스바냐는 흑암의 시절에도 하나님이 남겨놓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이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이다. 이들로 인해서 하나님이 즐거이 노...

삶의 추상화 [4]

  • Dec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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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4일 삶의 추상화 지난 설교 앞부분에서 나는 스바냐가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서 비판했던 우상숭배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다들 알고 실제로 경험하는 이야기다. 현대인들은 돈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 돈의 절대화가 우상숭배의 본질이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런 삶의 태도가 곧 삶을 추상화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애매해서 오늘 보충 설명해야겠다. 돈의 절대화는 너무나 명백한 현상이라서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지금 돈이 신이다. 교육, 의료도 모두 경제 논리로 돌아간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삶이...

대림절의 기쁨과 평화 [4]

  • Dec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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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12일 대림절의 기쁨과 평화 지난 설교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그 순간이 오늘이기를, 그래서 대림절의 기쁨과 평화가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빕니다.’ 도대체 대림절의 기쁨과 평화가 뭔가? 이게 말이 되나? 실감이 가나? 선의의 속임수는 아닌가? 말로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아니, 설명할 수는 있지만 공감을 얻기가 어렵다. 그래도 말로 설명하는 수밖에 없다. 대림절의 중심 개념은 예수의 재림을 통하여 완성되는 생명에 대한 기다림이다. ‘생명 완성’은 수도 없이 말했기 때문에 듣는 거 자체가 지겹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광야의 영성

  • Dec 11, 2015
  • Views 1393

12월11일 광야의 영성 세례 요한은 누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에 따라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로 규정되었다. 요한은 요단강 서안 광야에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래서 그를 세례 요한이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에 세례가 성찬식과 더불어 중요한 종교 의식으로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세례 요한의 영향력이 크다. 그런 흔적이 사도행전에 종종 나온다. 문명과 거리가 먼 광야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요한의 설교를 들은 민중들이 어떤 감동을 받았을지는 상상이 간다. 설교에서도 짚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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