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 of Articles
No. Subject Date Views

Agnus Dei [1]

  • Dec 10, 2015
  • Views 58229

12월10일 Agnus Dei 대림절은 예수 재림만이 아니라 초림을 포함하는 절기다. 예수 초림에 따라다니는 인물은 세례 요한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드레는 원래 요한의 제자였다가 자기 형 시몬(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네 복음서가 다 언급하고 있다.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의 세례 건은 잘 알려진 사건으로 보인다. 예수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건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었는데도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세례 요한 추종자들이 초기 ...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2]

  • Dec 09, 2015
  • Views 1513

12월9일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어제의 묵상에 이어서, 말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지, 그게 실제로 가능한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어머니 자궁에서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자기를 완성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게 본능이다. 실제로 몸이 자라고 생각도 자라면서 자기를 완성해간다. 학문적으로 자기를 완성해보려는 사람도 있고, 기업 활동으로 그런 걸 맛보는 사람도 있다. 이런 각자의 노력들이 충돌하면서 많은 문제들이 노출된다. 자기를 방어하고 남을 지배하면서 거짓과 폭력을 행사한다. 이게 실제로 우리가 경험하는 ...

허공으로의 투신

  • Dec 08, 2015
  • Views 1121

12월8일 허공으로의 투신 어제 인용한 문장에 절벽 아래의 허공으로 자기 몸을 던지는 어린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런 모습은 실제로 다큐멘터리 동물의 세계에 자주 나온다. 우리가 볼 때 무모할 정도의 행동을 새들은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방식으로 그들은 평범한 새들보다 한 차원 높은 비상의 능력을 소유한 새가 된다. 나는 이런 새들처럼 하나님의 무한한 품에 자신의 운명을 던질 수 있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그게 기독교 신앙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죽음 이후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목사가 ...

신앙적 화두

  • Dec 07, 2015
  • Views 1110

12월7일 신앙적 화두 어제 설교의 마지막 단락에서 한 문장을 인용하겠다. “그런 화두를 붙들고 꾸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은 마치 알에서 깨어난 어린 새가 날갯짓을 연습하다가 어느 날 저 절벽 아래나 높은 나무 아래의 허공으로 자기 몸을 날리듯이 하나님의 무한한 품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게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엄청 낯설게,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우선 화두라는 말이 그렇다. 선승불교에서 쓰는 용어다. 그들은 ‘화두 잡는다.’는 말을 한다. 어떤 주...

대림절(6)

  • Dec 05, 2015
  • Views 1250

12월5일 대림절(6) ‘대림절 영성을 아는 사람은 예수를 통해서 현재의 삶을 매 순간 새롭게 경험한다.’고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말했다. 그 경험은 해방과 자유와 평화라고 말이다. 이 단어들은 대림절 영성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해방을 꿈꾼다. 작게는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이고, 크게는 영혼의 해방이다. 매일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 노동해야 하고, 싫은 일도 하거나 어쩔 수 없이 싸우기도 한다. 이런 데서 해방되기를 바라지만 죽기 전에는 이런 일상에서 ...

대림절(5) [3]

  • Dec 04, 2015
  • Views 1264

12월4일 대림절(5) 설교에서 생명완성이 인간실존과 인간다움의 완성이라고 말했다. 인간다움이라는 말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휴머니즘과 비슷한 어떤 것쯤으로 말이다. 보통 그렇게 말한다. 사람이 좀 인간다워야지, 기독교인들은 인간다움이 부족해. 이런 점에서 인간다움은 고리타분한 신앙생활과 달리 인간미 넘치는 삶의 태도로 이해된다. 인간실존, 또는 인간다움은 모든 사람에게 중요하다. 비록 그것이 기독교와 다르거나 더 나가서 기독교를 거부하는, 쇼펜아워나 니체 식의 인간다움이라고 하더라도 놓쳐서는 안 될 요소다. ...

대림절(4) [2]

  • Dec 03, 2015
  • Views 1653

12월3일 대림절(4) 지난 설교에서 ‘삶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죽음도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뚫어보는 사람은 죽음과 결합되어 있는 현재의 삶을 매 순간(Augenblick) 신비롭게 경험하는 것처럼 예수 재림이 이미 우리의 삶 안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아는 기독교인들은 현재의 삶을 매 순간 새롭고 신비롭게 경험한다.’고 말했다. ‘순간’이라는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과거와 미래보다 현재, 바로 이 순간에만 집중해서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다. 순간이라는 단어에는 과거와 미래의 차원이 다 포함되어 있다. 나는 지금 ...

대림절(3) [2]

  • Dec 02, 2015
  • Views 1086

12월2일 대림절(3) 예수 재림이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결속을 예로 들었다. 한 사람이 출생하면 그와 동시에 죽음을 향해서 간다. 살아있다는 것은 죽음을 전제할 때만 성립된다는 의미다. 죽음 없이 늘 살아 있다면 그건 살아있는 게 아니다. 배고픔을 모르면 배부름을 모르는 거와 같다. 먼 미래에 과학이 인간을 영생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믿지 않지만 그 개연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의학의 도움으로 늘어난 수명을 보거나, 과학의 발전 속도가 ...

대림절(2) [4]

  • Dec 01, 2015
  • Views 1339

12월1일 대림절(2) 예수 재림이 공간 이동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 재림을 부정하면 이단이다. 나도 예수 재림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 그게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는 내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라 더 이상 할 말은 없다. 다만 나는 지난 설교에서 재림의 방식이나 시기가 아니라 목표에 초점을 맞춰서 생각했다. 예수님이 자신의 초월적인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건 아니지 않은가. 신약성경과 사도신경에 따르면 재림의 목표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심판이며, 심판은 생명의 완성...

대림절(1) [6]

  • Nov 30, 2015
  • Views 1739

11월30일 대림절(1) 대림절이 시작되었다. 강림절이라고도 한다. 어제가 대림절 첫째 주일이었다. 주일 숫자로만 계산해서 성탄절 전 네 주간이 대림절이다. 대림(待臨)은 주님이 오심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초림은 이미 2천 년 전에 일어났다. 예수가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낮은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는 승천하셨다. 그리고 다시 오실 것이다. 그것이 재림이다. 기독교는 그분이 다시 오심으로써 구원이 완성된다고 믿는다. 이런 기독교 교리가 자칫하면 희화화(戱畵化)될 수 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고,...

안심하라

  • Nov 28, 2015
  • Views 1292

11월28일 안심하라 지난 설교의 마지막 문장은 ‘안심하라.’였다. 안심해야 할 근거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책임지실 분이기 때문이다.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던 고대인들만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도 안심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영혼의 심연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심연의 공허를 피해보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지만, 그럴수록 그 공허의 힘은 더 강렬해진다. 안심은 평화라는 말이기도 하다. 영혼이 평화로워야 안심하고 지낼 수 있...

알파와 오메가

  • Nov 27, 2015
  • Views 1434

11월27일 알파와 오메가 지난주일 설교 제목은 ‘알파와 오메가’였다. 도대체 이런 제목에 어울리는 존재, 또는 존재자가 누군가? 성서가 하나님을 알파이며 오메가인 분이라고 말하지만 대다수의 신자들은 그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더라도 막연하게만 생각한다. 이것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 신앙을 막연하게만 생각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1) 기독교 신앙을 다 아는 것으로, 또는 대충 아는 것으로 여긴다. 2) 신앙의 깊이를 몰라도 신앙생활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고 여긴다. 이건 신자들에게 책임이 있는 ...

모두 같다 [6]

  • Nov 26, 2015
  • Views 1642

11월26일 모두 같다 설교 끝부분에서 요한계시록이 전혀 새로운 언어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짚으면서 상대적으로 이 세상의 일이나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했다. 사람은 그의 신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서 크게 달라 보이는 거 같아도 근본에서는 모두 같다는 뜻이다. 그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두 알고 있고, 또 반복되는 이야기겠지만 미심쩍어하는 분들을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야겠다. 세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겠다. 1) 모든 사람이 먹고 배설하고 숨을 쉬어야 한다. 예외는 없다. 조 단위의 부자나 노숙...

일상의 범람

  • Nov 25, 2015
  • Views 1575

11월25일 일상의 범람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상의 범람이라고 설교에서 짚었다. 그런 현상을 하이데거 용어로 바꾸면 ‘일상에로의 퇴락’이다. 일상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냐, 일상 없이 인간의 삶을 말할 수 있냐,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옳은 말이다. 먹고, 일하고, 돈 벌고, 사람들을 만나고, 돈을 쓰고,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구도정진을 목표로 하는 수도원이나 절간도 일상으로 채워져 있다. 일상의 범람, 또는 일상에로의 퇴락이라는 말은 일상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통해서만 자기의 ...

성서문자주의 [4]

  • Nov 24, 2015
  • Views 1579

11월24일 성서문자주의 설교 중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성서문자주의와 비교해서 설명했다. 성서문자주의에 묶여 있는 분들의 성서에 대한 진정성은 높이 살만하다. 그들도 성서의 문자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성서의 존엄에 대한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태도다. 18,19세기 성서 역사비평을 통해서 성서의 권위가 크게 추락한 것을 감안하면 그의 주장을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문자주의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런 방식으로 성서를 대하면 결국 기독교 신앙이 왜곡되...

요한계시록

  • Nov 23, 2015
  • Views 1200

11월23일 요한계시록 어제 설교의 본문은 계 1:4-8절이다. 요한계시록은 위험한 성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 오해의 소지가 높다. 설교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전형이다. 극단적인 상징을 통해서 궁극적인 진리를 알리는 문학 장르가 묵시문학이다. 숫자와 이상한 동물과 현상에 대한 묘사가 자주 나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묘사들을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면 성서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사실은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다른 성서에도 이런 상징이나 은유는 많다. 성서는 사실언어가 아니라 종교언어...

삶의 블랙홀 [4]

  • Nov 21, 2015
  • Views 1569

11월21일 삶의 블랙홀 블랙홀이란 단어가 설교 마무리 부분에서 스치듯이 나왔다. 묵시적 대파국을 당하지 않아서 우리들의 삶이 겉으로는 밝은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는 블랙홀처럼 어둡다는 뜻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일상만 보아도 이게 분명하다. 지난 11월13일 금요일 밤 프랑스 파리에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나서 백 수십 명이 죽었고, 더 많은 이들이 중상을 입었다. 간발의 차이로 운명이 바뀐 이들이 적지 않다. 왜 그런 방식으로 운명이 바뀌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깜깜하고 아득하고, 그래서 블랙홀과 같다. 지금의 인...

마지막 식사

  • Nov 20, 2015
  • Views 1408

11월20일 마지막 식사 지난 설교의 주제는 추수감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묵시사상에 기초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였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일과를 따라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설교 후반부에서 추수감사절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다. 아래와 같다. 오늘은 2015년 추수감사절입니다. 먹을거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절기입니다.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찬송을 부르고 함께 마시고 먹는 축제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에게 즐거운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추수감사절은 두려운 날이기도 합니...

창백한 푸른 점

  • Nov 19, 2015
  • Views 1329

11월19일 창백한 푸른 점 지난 설교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칼 세이건의 말을 인용했다.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90년 2월14일에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을 전송했다. 모래를 횡으로 뿌렸거나 칙칙한 색깔의 물감 스프레이를 뿌린 듯한 모양 중간쯤에 유독 빛나는 행성이 있었다. 그게 지구였다. 여러 행성 중에서 지구만 빛을 낸 이유는 모르겠다. 보이저 호의 카메라 위치가 그렇게 놓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뿐이다. 어쨌든지 『코스모스』를 쓴 칼 세이건은 그 사진에 등장하...

묵시적 대파국 이후 [3]

  • Nov 18, 2015
  • Views 1314

11월18일 묵시적 대파국 이후 묵시적 대파국은 기존의 모든 질서가 완전히 해체되는 걸 가리킨다. 모양이 바뀌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 자체가 뒤바뀌는 것이다. 우주와 지구, 국가와 인간, 모든 역사와 제도 등이 다 허물어진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가? 우주의 마지막 이후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른다. 우주 물리학자들도 확정적으로 말할 게 별로 없을 것이다. 신학이 말하는 종말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여기서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나의 대파국 이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만 말하...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