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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묵시적 대파국 [2]

  • Nov 1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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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7일 나의 묵시적 운명 나는 아직 씩씩하게 걸을 수 있다. 테니스장에 나가면 젊은 사람 못지않게 뛴다. 나는 아직 숨을 편안히 쉴 수 있다. 음식을 씹을 수 있고, 물을 마실 수 있고, 적당하게 소화시켜서 필요한 양분을 섭취하고 나머지는 배설할 수 있다. 샤워도 할 줄 알고, 양말도 내 손으로 신고, 신발도 스스로 신는다. 뭘 볼 줄도 알고 냄새를 맡을 수도 있고, 손을 만져서 촉감을 느낄 수도 있다. 생각할 줄도 알고 성경을 해석할 줄도 알며, 음악을 감상할 줄도 안다. 이렇게 일일이 열거하다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게 참으로...

묵시적 대파국 [2]

  • Nov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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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6일 묵시적 대파국 어제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에 와서 집사람과 작은 딸에게 설교가 잘 전달됐는지를 물었다. 전체적으로 이해는 됐지만 일단 ‘묵시적 대파국’이라는 단어에 걸려서 진도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특히 ‘묵시’라는 단어가 와 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말하면서도 설교를 따라오면 저절로 이해가 될 거라는 내 생각이 나이브했나보다. 사실 설교행위에서 전문용어나 개념적인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게 좋다. 그런데도 내가 종종 이런 신학적인 전문용어 사용을 감행하는...

하루살이 [15]

  • Nov 14,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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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4일 하루살이 요즘도 우리 집에는 하루살이 몇 마리가 날아다닌다. 날씨가 이런 정도로 싸늘해졌으면 하루살이들이 번식을 못할 때도 된 거 같은데, 무슨 연유인지 몇 마리가 눈에 뜨인다. 바깥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서 마지막 순간을 견뎌내기 위해서 미로를 통해 집 안으로 들어온 것 같다. 어쨌든지 기특한 일이다. 하루살이를 볼 때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들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르고 자유로운지 모른다. 움직이는 물체는 관성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하루살이는 관성의 지배를 안 받는 것처럼 방향전환을 순간...

가난한 과부 이야기(5) [2]

  • Nov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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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5) 초기 기독교는 자신들을 가난한 과부와 동일시할 수 있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보이기 위해서 길게 기도하는 서기관을 유대교로 보았다. 실제로 초기 기독교의 구성원들은 가난한 이들이 많았다. 노예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는 기독교가 부자 종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가난한 이들의 종교였다. 바울의 편지인 고전 1:26-29절은 아래와 같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

가난한 과부 이야기(4) [4]

  • Nov 1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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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4) 본문에 나오는 과부의 소유는 두 렙돈이 다였다. 그것으로 한 끼니나 두 끼니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다. 혼자서, 또는 자식과 함께 말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우리는 대충 짐작한 할 뿐이지 충분히는 모른다. 아프리카의 몇몇 가난한 나라, 내전으로 먹을 게 없는 나라 사람들이 이런 처지일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정확하게 우리 인생을 들여다본다면 우리 역시 두 렙돈밖에 없는 저 과부의 운명과 다를 게 없다. 설교에서 이미 암시된 거지만, 실제로 수천만 원, 수억 원이 있다 해도 그것으...

가난한 과부 이야기(3) [2]

  • Nov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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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3) 지난 주일의 성서일과 제1독서는 왕상 17:8-16절이다. 거기에도 과부가 나온다. 시돈 지역의 사르밧 마을에 한 과부가 살았다. 엘리야 선지자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그 과부는 한 끼니의 먹을거리밖에 없었다. 그걸 아들에게 해먹이고 함께 죽을 작정이었다. 엘리야는 무리한 요구를 했다. 먼저 자기에게 먹을 해주고, 식구들은 남은 것을 먹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가뭄이 끝날 때까지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사기꾼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무슨 마음인지 과부는 그 말에 순...

가난한 과부 이야기(2)

  • Nov 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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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0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2) 우리는 사람과 삶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풍요롭지 못하다. 시각이 표면적이고 단조롭다. 서기관은 무조건 행복할 것이라고, 반면에 가난한 과부는 불행할 것이라는 선입견에 묶여 있다. 그래서 다른 이들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한다. 실제로 그래야만 어려움이 덜한 것도 사실이다. 사람과 삶과 세상을 표면적으로 느슨하게 보면 이게 옳은 것 같지만 근원의 깊이에서 보면 틀렸다. 서기관이나 과부나 모두 사람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쪽은 사람이고, 다른 한쪽은 지렁이가 아니라 둘 ...

가난한 과부 이야기(1)

  • Nov 0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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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 가난한 과부 이야기(1) 어제 설교에서 주로 다룬 가난한 과부 이야기는 신앙의 본질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여자는 요즘으로 말하면 생활보호 대상자다. 스스로 생존이 불가능한 사람이다. 모두가 피하고 싶은 운명에 떨어진 여자다. 가난과 불행을 신앙적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그것 자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이 여자의 경우에 가난이 오히려 위대한 행동을 시도할 수 있는 내적 동인으로 작용했다. 마 5:3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했다. 병행구인...

영생 [2]

  • Nov 0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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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7일 영생 지난 설교 후반부에서 하나님 사랑을 말하면서 요 3:16절을 인용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신학생이나 젊은 목사라고 한다면 이 구절을 A4 용지 10장 분량으로 주석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좋겠다.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를 보라. 하나님, 세상, 사랑, 독생자, 믿음, 멸망, 영생 등등이다. 이 단어들 자체의 깊이도 깊이지만 이 단어들이 연결되어서 지시하는 세계는 더 깊다. 그걸 헤아릴 수 있어야만 성서 텍스트를 아...

말씀 안으로 [2]

  • Nov 0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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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6일 말씀 안으로 신명기 기자는 최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한 다음에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라.’고 했다. 이어서 손목, 미간, 문설주, 문에도 이 말씀을 붙이고 기록하라고 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외우고 쓰라는 말이다. 이런 행위들이 자신의 경건한 삶을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심리의 발로로 나타날 때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말씀 안으로 들어가려는 치열한 영적 태도를 가리킨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 경험이다. 하나님 경험은 곧 구원이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 경험에 이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아브라...

하나님 사랑 [2]

  • Nov 0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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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5일 하나님 사랑 지난 설교의 본문인 신 6:4절 이하에 따르면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게 ‘쉐마 이스라엘’이 가리키는 핵심이다. 하나님 사랑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안다는 식의 대답이었다. 요 3:16절이 가리키듯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이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거기에 집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보충 설명이 ...

결의성

  • Nov 04, 2015
  • Views 1106

11월4일 결의성 하이데거 철학이 신학과 유사하다고 어제 말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는 많다. 인간으로 하녀금 본래적인 자기가 되게 하는 계기인 결의성도 그중 하나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자기의 가장 고유한 본연의 자세를 향하여 불안을 각오하면서 말없이 자기를 기투(企投)하는 것이 결의성(決意性, Entschlossenheit)이다. 박찬국 교수의 책에 나온 한 대목을 다시 인용하겠다. 결의성에 속하는 ‘참으로 간주함’은 어떤 특정한 상황에 자신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즉 현존재가 전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

불안과 기쁨 [2]

  • Nov 0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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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일 불안과 기쁨 하이데거 이야기를 한 번 더 하자. 어제 인용한 그 책에서 한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겠다. 399쪽 중간에 나오는 글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로 규정된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세상을 버리고 은둔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를 모든 망상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행위’의 결의성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선구적 결의성은 현존재의 현사실성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적 요구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고 현존재의 현사실적 근본 가능성을 냉철하게 이해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현존재를 단독자화된 존재가능성 앞에 직면...

퇴락 [5]

  • Nov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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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일 퇴락 내가 혼자 밥을 먹을 때는 주로 책을 본다. 주간지를 볼 때도 있지만 요즘은 서울대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을 읽는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다보니 속도는 나지 않는다. 앞에서 나는 여러 번에 걸쳐 그 책의 내용을 이 코너에서 소개했다. 오늘도 한 구절을 더 인용하겠다. ‘세계’ 안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것들에 몰입하여 퇴락해 있는 존재는 현존재의 일상적인 자기 해석을 규정하면서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를 은폐한다. 따라서 그것은 현존재에 대한 진정한 존재론에 적합한 지반을 제공할 수 ...

비텐베르크 file [7]

  • Oct 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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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1일 비텐베르크 1517년 10월31일은 마틴 루터가 95개 항목의 신학 명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 위에 내다 걸은 날로 알려져 있다. 대자보를 만들어 붙였다는 말이 되는데, 분량으로 볼 때 실제로 그걸 붙이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도 정확한 거는 모른다. 아래 사진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이다. 당시에는 가톨릭 성당이었지만 종교개혁 운동을 거치면서 교회당으로 바뀌었다. 성당이었다가 교회당으로 바뀐 건물이 독일에는 제법 된다. 베를린에서 가장 큰 고딕식 교회당도 그렇다. 가톨릭을 따르는 영주들과 프로테스...

삶의 완성 [2]

  • Oct 3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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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30일 삶의 완성 지난 설교의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삶의 완성’에 대해서 한 마디 했다. 삶의 완성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의 삶이 완전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걸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완성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 일반적인 공부도 그렇다. 자기의 공부가 크게 부족하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인식하는 사람만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 공부에 매진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삶이 파괴되었다고 진단한다. 파괴된 이유는 죄에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생...

예수 따름 [1]

  • Oct 2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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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9일 예수 따름 바디매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즉시 예수를 따른 것이다. 예수가 누군지를 알아본 사람에게서는 그런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신앙은 취미생활처럼 안 해도 되지만 하면 더 좋은 대안적인 것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실존적인 결단이 뒤따른다. 이런 일은 바디매오나 당시 제자들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의 제자가 되어 그의 뜻에 순종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

시(視)와 견(見) [4]

  • Oct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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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8일 시(視)와 견(見) 지난 설교에서 바디매오가 보게 되었다는 것을 단순히 육체적인 눈이 뜨인 것만으로 보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것의 종교적인 차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문제를 동양의 가르침인 시(視)와 견(見) 개념으로 보충하겠다. 시와 견은 똑같이 본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념적으로는 크게 다르다. 시는 말 그대로 눈으로 무엇을 보는 것이다. 여기에는 육체의 눈이 절대적이다. 망원경과 현미경도 역시 인간으로 하여금 대상을 더 잘 보게 해준다. 눈으로 뭔가를 본다고 해서 근원적인 것을 깨닫는 것은...

예수의 유랑생활 [1]

  • Oct 27,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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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7일 예수의 유랑생활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서 외에는 없다. 당시 로마의 역사 기록물에 예수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초기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 나온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에 대한 이야기도 일대기가 아니다. 예수에게도 어린 시절, 사춘기, 청년 시절에 있었을 텐데, 복음서가 그걸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집필 목표가 거기에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설화와 어린 시절 이야기는 예수의 일대기와는 관련이 없다.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

위장조영검사 [6]

  • Oct 2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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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6일 위장조영검사 주일 저녁 밥 먹은 후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오늘 있을 건강검진을 준비했다. 다들 알듯이 2년에 한 번씩 검진을 받아야 한다. 접수대에 섰다. 예약했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하자 예약 안 됐으면 위 내시경은 안 된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건 할 생각이 없었다. 안내 팜프렛에 나와 있는 위장조영검사를 하겠다고 하자 약간 의외라는 표정으로, 또는 반가운 표정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다. 소변과 피 검사 등, 몇 군데 검사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영상의학과 3번 방 앞 의자에 앉아 의사의 호명을 기다리면서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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