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 분단 70 [4]
광복 70, 분단 70 얼마 전에 영화 <암살>을 가족과 함께 봤다. 딸이 나오면서 ‘아빠, 어땠어요?’ 하고 묻는다. ‘음, 그냥 그랬다. 근데 감독이 혹시 <도적들>을 만든 그 사람 아니니?’ 딸이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한다. 내가 이유를 대충 설명했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슷하더라. 볼거리를 많이 제공하긴 하지만 뭔가 어색하더라. 도적들에서는 미션 임파서블 흉내를 많이 냈고, 암살에서는 내가 영화를 많이 안 봐서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만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거 같았어.’ 딸과 아내가 같이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예수와의 존재론적 일치
8월14일 예수와의 존재론적 일치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은 예수님을 가리킨다.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51).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존재론적 일치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교에서 말했다. 존재론적 일치가 무엇인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부활 승천 이후 하나님 오른 편에 앉아 있는 예수가 지금 우리 함께 할 수는 없다. 그는 이미 영화의 차원으로 변화되어서 이 땅에 두발을 딛고 있는 우리와 직접 소통할 수는 없다. 이런 예수와 우리가 일치한다는 것은 실제로 옆에서 있는 것과는 다른 뜻이라는 건 ...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건?
8월13일 아버지께서 이끄신다는 건? 지난 주일 설교 본문 요 6:4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군거리면서 예수님을 냉소적으로 평가한 유대 군중들에게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아버지께서 이끈다는 게 무슨 뜻인가? 가장 간단하게 생각하면,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신다는 뜻이다. 문제는 왜 어떤 사람은 깨닫게 해주고, 어떤 사람은 깨닫게 해주지 않느냐, 하는 데에 있다. 그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마음먹기에...
<천공의 성 라퓨타 2> [4]
8월12일 <천공의 성 라퓨타 2> 정부군은 라퓨타 성에 들어가서 약탈에 열을 올렸다. 허가받은 해적이나 마찬가지다. 남북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온갖 종류의 약탈을 마다하지 않았던 유럽 제국들을 연상시켰다. 정부군은 결국 아무 것도 갖고 나오지 못하고 다 망한다. 미야자키는 지금 자연을 약탈하다가 결국 망해버릴 인간을 고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라퓨타는 고도의 기술 문명이 일찍부터 발전한 나라였다. 인간보다 문명이 훨씬 앞선 외계인의 세계라고 생각하면 된다. 라퓨타는 그 어떤...
<천공의 성 라퓨타 1>
8월11일 <천공의 성 라퓨타 1> 흥미진진한 영화다. 하늘의 영원한 도시 라퓨타를 찬탈하겠다는 인간의 욕망에 얽힌 이야기다. 욕망은 강렬하다.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열정이 작동된다. 그래서 결국 모든 것을 파괴한다. 타자만이 아니라 자기도 파괴한다. 그걸 예상하지만 욕망이 너무 강렬하기에 멈출 수가 없다. 선악과에 대한 첫 인간 아담과 이브의 욕망, 갈망이 얼마나 강렬했든지, 그것을 멀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까지 어길 정도였다. 뱀은 아주 간단하게 그들을 유혹한다. 선악과는 먹으면 신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
<붉은 돼지> [3]
8월10일 <붉은 돼지>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다. <붉은 돼지>가 뭔가? 실제 인물이 평소에 불린 별명을 그대로 영화 제목으로 가져온 것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영화에서 주인공 이름은 포르코다. 포르코의 캐릭터가 특이하다. 그는 무인도에서 해적선을 포획하는 비행사 일을 하면서 혼자 산다. 일종의 프리랜서 해결사다. 당대 최고의 전투 비행기 조종사로서는 바닥 인생으로의 추락인 셈이다. 얼굴 모습도 돼지로 변했다. 그렇게 변장한 것 아니겠는가. 그를 사회 부적응자로 만든 건 그가 직접 체험한 1차 세계대...
<바람이 분다 6> [2]
8월8일 <바람이 분다 6> 영화 대사 중의 하나다. ‘누가 바람을 보았을까?’ 주인공 지로의 말인지, 그의 친구 말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장도 정확하지 않다. ‘바람을 본 사람이 있을까?’일지 모른다. 바람은 누구에게나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바람이 보이지 않는다. 구름이 흘러가도, 나뭇잎이 흔들려도, 파도가 쳐도, 먼지가 날려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눈이 밝은 사람은 그런 움직임이 없어도 바람을 본다. 마음으로 느낀다. 바람의 말을 듣는다. 마치 하나님의...
<바람이 분다 5> [2]
8월7일 <바람이 분다 5> 주인공 지로가 나호코라는 여자를 만나는 계기도 바람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모자가 바람에 날려 옆 2등 객차로 갔는데, 그걸 나호코가 잡아 준 것이다. 그 뒤로도 바람에 의한 에피소드가 연결되어서 결국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지로에게 나호코는 바람이 안겨준 여인인 셈이다. 남녀관계도 그렇고, 모든 인간관계에는 에피소드가 개입된다. 지금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를 조금만 살펴보라. 우연한 일이다. 대구성서아카데미 회원들과의 관계도 그렇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바람이 분다 4>
8월6일 <바람이 분다 4> 많은 사람들이 미야자키의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이 사람들의 단조로운 시각을 열어서 풍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손을 통해서 요정과 유령, 산과 숲, 강과 구름이 생기를 얻는다. 그가 아예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어린아이들, 또는 예술가들과 시인들의 영혼에서 흔히 나올만한 이야기를 고유한 시각으로 이끌어낸 것뿐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그의 영화에 몰입한다.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그 어떤 예술, 문학보...
<바람이 분다 3> [2]
8월5일 <바람이 분다 3>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이지만 <바람이 분다> 역시 그림이 다이내믹하다. 앞 부분의 관동대지진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주인공 지로가 군중을 헤치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꽉 끼어 있는 그 상황인데도 그 움직임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유려한지 화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했다. 이런 장면이 수없이 많다. 그림의 진수를 느끼게 한 장면들을 이곳으로 끌어올 수 있는 컴퓨터 조작기술이 내게 없는 게 아쉽다. 영상미의 능력은 단순히 기술이 아니라 세계를 보는 눈에 달려 있다. 세상, 인간, 역사를 ...
<바람이 분다 2> [2]
8월4일 <바람이 분다 2> 주인공 지로는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타고 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실제 인물을 극화한 것이라고 한다. 지로는 눈이 나빠서 비행기 조종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비행기 설계에 모든 삶의 에너지를 쏟는다. 그는 꿈을 이룬다. 예쁘고 튼튼한 작은 비행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게 전쟁에 사용되고 말았다. 마지막 대목에서 자기가 어릴 때부터 몽상의 세계에서 만나곤 했던 원로급 이탈리아 비행기 설계사를 다시 만난다. 그 설계사가 지로의 비행기를 아름답다고 칭찬하자 지로는 이렇게 말한다...
<바람이 분다 1> [2]
8월3일 <바람이 분다 1> 미야자키의 <바람이 분다>를 두 번에 나눠서 봤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한다. 군국주의에 동조하는 대목이 나온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비판적인 움직임이 있었는데, 내가 보기에는 별로 타당한 비판이 아니다. 그런 시각이라면 비판받지 않을 철학자, 예술가, 신학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요즘처럼 내가 한 감독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본 적이 없다. 그동안 이런데 마음과 시간을 쓸 정도로 삶의 여유가 없기도 했거니와 이런 데 대한 안목이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내가 철이 드는 걸까? <바람이...
원당일기(66) 달빛
8월1일 원당의 달빛 이틀 전 목요일 7월30일이 음력으로 6월 보름이었다. 다행히 구름 없어서 휘황찬란한 보름달을 볼 수 있었다. 어제는 3년 만에 찾아오는 ‘블루문’이었다고 한다. 보름달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달이 뜨는 시간이 조금씩 늦어진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늦었다. 8시20분부터 원당의 월출이 시작되었다. 우리 마을 원당은 말발굽 모양으로 남향을 향해 터진 형태다. 남쪽에서 마을로 들어오면 중앙에 버스 승강장으로 사용하는 넓은 마당이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우리 집은 왼편 언덕에 자리하고 했다. 우리 집에서 보면 ...
생명의 떡
7월31일 생명의 떡 오병이어 사건(요 6:1-15)에 대한 요한복음의 고유한 해석이 요 6:22-59절에 자세하게 나온다. 당연히 공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 대목 중에서 ‘나는 생명의 떡이다.’(요 6:35)는 문장이 핵심이다. 요한복음에는 ‘에고 에이미...’, 즉 ‘나는 ...이다.’는 정형화된 문장들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나는 세상의 빛, 나는 양의 문, 나는 선한 목자 등등이다. 요한복음 기자만 전하고 있는 이런 문장에 얽힌 전승사적 층위는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성서신학 전공자들 외에는 더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원령 공주> [12]
7월30일 <원령 공주> 멧돼지로 표상되는 저주신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한 마을 사람들을 구하려다가 멧돼지를 제거했지만 저주에 걸린 남자 주인공 아시타카는 저주를 풀기 위해 서쪽 나라로 간다. 거기서 겪는 파란만장한 사건이 <원령 공주>의 전체 줄거리다. 우선 줄거리도 그렇지만 그림의 스케일이 대단하다. 그림 구도를 미야자키 감독 자신이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의 마음을 한껏 고조시키기에 부족한 게 없었다. 그림의 디테일도 실감나게 처리되었다. 어느 한 구석 소홀한 데가 없었다. CG를 사용한 흔적도 없어 보였다...
메시아니즘
7월29일 메시아니즘 오병이어 현장에 군중이 모여들었다. 복음서마다 약간씩 표현이 다르지만 대략 5천명 이상은 되는 거 같다. 말이 5천이지 당시 이스라엘 전체 인구수나 장소가 광야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숫자다. 메시아적 열망이 그렇게 표현된 것이다. 인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메시아를 열망한다. 주로 정치와 경제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통령 선거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대통령을 메시아로 여긴다는 의미다. 독재자들이 그런 인간의 심리를 잘 이용한다. 히틀러는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
<이웃집 토토로> [6]
7월28일 <이웃집 토토로> 오늘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를 봤다. 주인공은 자매 사츠키와 메이다. 메이가 4살이니 사츠키는 7-8세 정도다. 그들은 어머니가 요양 중에 있는 병원 가까운 곳에 집을 얻어 간다. 거기서 벌어지는 일화다. 이 자매들은 나무 유령을 만난다. 메이가 먼저 보고 ‘토토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겠다. 미야자키의 작품에서 씩씩한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들은 대게 여자 아이이다. 며칠 전에 본 <마루밑 아리에티>도 그렇고, <토토로>도 그렇다. 앞으로 보게 될 다른 작품도 그렇...
오병이어와 창조질서 [2]
7월27일 오병이어와 창조질서 어제 설교 ‘예수와 표적 이야기’에서 오병이어 사건을 설명하면서 빵이 마술을 부리듯이 늘어나는 현상은 창조질서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이 말이 오해를 부를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기적들은 다 창조질서와 어긋난다거나, 또는 자연과학적인 설명이 가능해야만 옳은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거나 아는 것보다 훨씬 심층적이기 때문에 자연과학으로 다 해명되는 게 아니다. 우리가 몰랐던 현상이 밖으로 드러나는 걸 우리는 기적이라고 한다. 그런 기적은 당연히 옳다...
<마루 밑 아리에티> [4]
7월25일 <마루 밑 아리에티>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루 밑 아리에티>를 오래 전 가족과 함께 영화관에서 봤다. 아마 딸들도 동행했을 것이다. 기억나는 건 그 영화가 자막이 아니라 더빙 판이었다는 사실이다. 영화 감상의 맛이 좀 떨어졌다. 한 소년이 방학 때 할아버지 댁에 놀러가서 겪은 이야기다. 어느 날 소년은 인형처럼 작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그 집의 마루 밑에서 사는 이들이다. 그 소인족의 딸 아리에티는 종횡무진 활약을 벌이면서 소년과 가까워진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 대충 가자. 아리에티 가족을 ...
소명에 대해
7월24일 소명에 대해 지난 21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던 박영선 목사와의 설교 대담 중에 소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설교자의 소명이다. 소명에 대해서는 작년에 ‘목사공부’를 연재하면서 어느 정도는 짚었다. 그때의 생각이 떠오르기도 하고, 당일 말하면서 어떤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부름을 받는다는 건 위험한 사건이다. 부름을 받으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는데, 그 부르는 대상이 사이비일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히틀러를 메시아처럼 따라나선 독일 사람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목사들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