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공부(204)- 죽음(13)
죽음(13) 죽음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끌고 가는 이유는 목사가 그것을 실질적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기독교 복음에 접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전달해보려는 마음에서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식이다. 생명을 얻는 것이 가장 복된 소식이다. 예수 믿고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단순히 교리로서만 이해하면 복음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보기 힘들다. 죽음을 아는 것만큼 생명이 눈에 보일 것이며, 생명을 아는 것만큼 죽음도 눈에 보일 것이다. 문제는 생명도 그렇고 죽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손에 확실하게 잡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
목사공부(203)- 죽음(12)
죽음(12) ‘나’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은 인간을 종(種)의 차원에서 바라볼 때 더 분명해진다. 인간 종은 현재 지구에서 절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까지 왔다. 소위 호모 사피엔스라고 자칭하는 인간 종이 지구 생태계를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그런 세월이 그렇게 오래지 않았다. 유인원 시절에는 다른 동물들과 엇비슷하게 경쟁하면서 지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동물들이 지구를 지배했다. 지금도 사실은 인간이 지구를 지배하는 건 아니다.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앞으로...
목사공부(202)- 죽음(11) [6]
죽음(11)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 바꾸면 그것은 하나님 경험을 가리킨다. 하나님 경험이 우리의 정체성 문제에서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만 ‘나’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나’가 누군지를 알게 되는 그 순간이, 또는 그 사태가 곧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몰두하고 있는 일상을 통해서는 ‘나’가 누군지를 알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인간관계와 업적만 해도 그렇다. 그 모든 것들은 먼지와 같다. 어느 순간에 날아가 버린다. 초등학교 시절이나 ...
목사공부(201)- 죽음(10)
죽음(10 인간관계와 업적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에서도 우리가 삶의 동력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구도의 길을 간다. 구도는 바로 인간관계와 업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이런 구도의 과정이 일정한 경지에 이른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지는 쉽게 말해서 잃을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게 말은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쉽지 않은 삶의 단계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인간관계를 확대하고 싶어 하고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하...
목사공부(200)- 죽음(9)
죽음(9) 앞의 이야기를 가장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될 것이다. 죽으면 ‘나’는 완전히 없어지는 걸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바로 ‘나’의 해체에 있다. 해체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우선 ‘나’가 누구, 또는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을 주로 인간관계에서 경험한다. 아무개의 아내나 남편, 부모나 자식, 직장 상사와 동료, 스승과 제자 등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한다. 또는 자기가 행한 업적이 그런 통로가 되기도 한다. 시인들은 자기가 쓴 시...
목사공부(199)- 죽음(8) [2]
죽음(8) 나는 지금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이다. 기독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혼불멸이 옳은지를 설명하다가 너무 관념적인 쪽으로 나간 것 같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가야겠다. 몸은 실제로 흙이 되지만 영혼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가? 기독교인은 몸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희망하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가? 조금 단순한 질문을 하자. 지금까지 지구에서 살다가 죽어 구원받은 이들의 영혼은 지금 어디에 가 있는 걸까? 우주 공간 어디쯤에 영혼이 모여 사는 곳이 있을까? 장례식 때 목사...
목사공부(198)- 죽음(7)
죽음(7) 인간의 영혼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에 답하려면 책 한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완전한 대답을 알지 못한다. 현대 뇌 과학자들은 영혼을 뇌 현상으로 설명하려고 할 것이다. 성서는 영혼을 몸과 대별되는 인간의 구성 요소로 본다. 뇌는 몸에 속하기 때문에 영혼은 뇌를 초월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최종 결론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영혼이라는 말이 종교적으로 들리면 그걸 정신으로 바꿔도 된다. 인간의 정신은 무엇인가? 정신이 단순히 뇌의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뇌의 영향...
목사공부(197)- 죽음(6)
죽음(6) 몸이 죽어 없어진다는 것은, 또는 지구의 질료로 해체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만 영혼은 좀 다르다. 기독교는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 몸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옳은가? 정말 몸은 죽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가? 영혼은 불멸하는가? 도대체 불멸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 인간을 몸과 영혼으로 분리해서 보는 성서적 근거는 많다. 한 군데만 예를 들겠다. 마 10:28절은 다음과 같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
목사공부(196)- 죽음(5)
죽음(5) 내일(또는 일 년 후나 10년 후) 내가 죽었다고 상상해보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가족들과 교회 신자들이 장례식을 거행할 것이다. 장례식은 따지고 보면 죽은 이를 위한다기보다는 살아있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죽은 이는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경험되는 이 세상을 이미 떠났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장례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사람들을 모을 게 아니라 가족끼리만 조용하게 절차를 밟아서 화장하고, 남은 재는 납골당 같은데 두지 말고 산이나 강에 뿌리는 게 가장 간편할 것이다. 당장은 아내와 딸들...
목사공부(195)- 죽음(4)
죽음(4)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다닐 때 나는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을 팔았다. 당시 아이들은 대개 그랬다. 부잣집 아이들은 좀 다르긴 했지만 서민 가정의 아이들은 노는 게 일이었다. 그때가 그립다. 당시는 1960년대였다. 우리는 2000대가 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친구들과 실제로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혼자 생각했으면서 친구들과 이야기한 것으로 기억하는 것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어쨌든지 당시의 내 의식에는 2000대라는 게 신비의 시간이었다. 너무 까마득한 미래인 탓에 현실감은...
목사공부(194)- 죽음(3)
죽음(3) 1981년 후반기인지 1982년 전반기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시 나는 8사단 포병단 군종장교(군목)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대에서 인사사고가 일어났다. 한 병사가 죽었다. 당시만 해도 이런 일들은 군대에서 일상으로 일어났다. 정확한 사고원인을 밝히기도 힘들고, 책임자 처벌을 더더욱 힘들었다. 당시 표면적으로 밝혀진 사고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저녁 식사 시간 뒤에 점호가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점호 시간이기는 하지만 이때 고참이 내무반 병사들의 군기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화기의 개머리판으로 한 병사의 배...
목사공부(193)- 죽음(2) [6]
죽음(2) 이제 내가 죽음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말해보겠다. 우선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죽음에 대한 몇 가지 에피소드를 기억해내야겠다. 첫 경험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다. 7남매를 낳으셨지만 육이오 때 하나를 읽고 막내가 겨우 한 살을 넘긴 40대 초반의 어머니는 뇌수술을 크게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돌아가셨다. 그 과정에서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 몇 장면이 오래된 영화의 스틸 자신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열 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 큰 누님의 손에 끌려 다른 곳에서 요양하고 있...
목사공부(192)- 죽음(1) [2]
죽음(1) 목사공부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죽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목사의 설교는 따지고 보면 신자들에게 죽음을 준비하라는 설득이요 권면이자 선포다. 죽음에 대한 공부와 경험 없이 설교할 수 없다. 설교만이 아니다. 목사의 배타적 카리스마에 속하는 세례와 성만찬도 역시 죽음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세례는 예수와 더불어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고, 성만찬은 세례의 일상화다. 목사는 장례의식도 자주 감당해야 한다. 결국 목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신자들에게 죽음에 대해서 자주 말할 수밖에 ...
목사공부(191)- 심방(7)
심방(7) 심방 이야기를 정리하자. 목사와 장로가 앞장서고 그 뒤로 여전도사와 권사들이 한 무리를 지어 신자들의 집을 방문하는 옛날 방식의 심방은 이제 자취를 감춘 것 같다. 신자들이 그런 심방을 반기지도 않는다. 살아가는 게 바쁘기도 하고,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기 싫어하는 탓이다. 그래도 여전히 대심방을 실시하는 교회가 시골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심방이 제공하는 좋은 점도 적지 않다. 심방 대원들은 이런 방식으로라도 교회 일에 참여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함께 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먹고 ...
목사공부(190)- 심방(6)
심방(6) 그 뒤로 위에 큰 문제는 없었다. 30대와 40대를 편하게 지냈다. 그런데 50대에 한번 크게 아픈 적이 있었다. 그 이유도 일종의 에피소드다. 2004년부터 4년 가까이 ‘설교비평’ 글을 ‘기독교사상’에 매월 연재했다. 당시 한창 글을 쓸 때는 성결교회 월간지인 <활천>에도 연재했고, 그 외의 잡지에도 심심치 않게 기고해야만 했다. 대구샘터교회를 2003년 6월에 시작했으니 설교 준비도 병행해야만 했고, 더 일찍 시작한 ‘인문학적 성서읽기’ 모임을 위한 글도 써야했고, 그리고 여름과 겨울에 마치 하안거와 동안거를 거치듯이 진...
목사공부(189)- 심방(5)
심방(5) 봉산교회에 교역자가 셋이었다. 담임목사, 심방여전도사, 그리고 교회행정과 교육을 맡은 남전도사인 나였다. 여전도사가 나이가 제일 많았는데, 그래봐야 당시 사십대 후반이었다. 문제는 그분이 교회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는 사실이다. 과부이시고, 조카 여자 아이와 함께 살았다. 그 외에 교회 사무 정리의 실무를 맡은 여자청년이 직원으로 있었고, 물론 사찰 집사도 있었다. 사무 청년만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다 교회 사택에서 살았다. 나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본당 층계 아랫방에서 살았고, 담임목사는 교회 외편에 붙어지...
목사공부(188)- 심방(4)
심방(4) 혼자서 자취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불편한 일은 먹는 문제다. 지금은 솔로를 위한 먹을거리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것 같은데, 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별 게 없었다. 라면은 지금이나 그때나 솔로들에게 인기식품이다. 대구봉산교회 전도사로 내려온 직후 두세 달은 교회 근처의 하숙집에서 살았다. 연탄불로 난방을 하는 두 평정도 크기의 단칸방이었다.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했고, 반찬도 경상도 치고는 그 이전까지 서울에서만 살던 나에게도 크게 불편하지 않아서 좋았다. 문제는 교회에서 받는 사례비의 대부분이 하숙비로 ...
목사공부(187)- 심방(3) [2]
심방(3) 둘, 심방을 맞는 가정에서는 빠짐없이 먹을 것을 내놓는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주 간략하게 차와 과일 한 접시 정도만 내놓지만, 마음만 간절한 분들은 떡, 식혜 등, 작은 잔칫집처럼 내놓는다. 그걸 먹지 않고 나올 수는 없다. 실제로 배가 불편해서 덜 먹으려고 해도 억지로라도 먹이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 나중에 시골에서 단독 목회를 할 때의 일이다. 어느 나이든 여집사님이, 지금 돌아보면 그분이 대략 오십대 중반쯤이었으니 그렇게 나이가 든 건 아니지만 그때 삼십대 중반의 내가 볼 때는 그렇게 보였는데, 어쨌든...
목사공부(186)- 심방(2)
심방(2) 아무개 구역을 심방하는 날이었다. 마침 신혼부부가 사는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릴 때 담임목사가 내게 기도 순서를 맡겼다. 대심방 때의 기도 순서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그날 참여한 심방대원들에게 무작위로, 또는 직급에 따라서 자유롭게 기도순서를 맡긴다. 그래서 대원들은 일단 한번쯤 대표기도를 감당할 각오를 한다. 그래도 그렇지, 스무네 살 총각 전도사에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신혼부부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시킬 게 뭐란 말인가. 돌이켜 생각해보니 당시 담임 목사도 사십대 ...
목사공부(185)- 심방(1)
심방(1) 나는 1977년 초에 대구에 있는 봉산성결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그해 봄에 정기 대심방이 있었다. 담임 목사와 여전도사가 주축이 되었고, 몇몇 권사와 집사들로 꾸려진 심방대원이 함께 했다. 나는 만으로 스무 네 살 총각 전도사로서 그런 심방에 참가하는 게 어울리지 않았지만, 정식 교역자인데다가 신자들의 가정 형편도 좀 아는 게 좋다는 담임 목사의 제안에 따라서 대략 두 달 가까이 진행된 정기 대심방 대원으로 활동했다. 두 번의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나, 대심방은 일반 심방과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일반 심방은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