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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친구 [2]

  • Nov 3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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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30일(토) 요 15:14절은 이렇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어 15절에서는 이를 다시 강조하면서 예수와 제자들의 관계가 ‘주인과 종’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이다. 종은 주인의 뜻을 모르지만 친구는 다 안다. 왜냐하면 속마음을 다 말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궁극적인 진리를 다 말했다는 뜻이다. 출 33:11절에 따르면 모세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율법의 발원자로 알려진 모세에게 어울리는 평가다. 예수와 제자들의 친구 관계나 하나님과 모세...

상호내주

  • Nov 2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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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9일(금) 요즘 몇몇 다비안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다. 그건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요 15은 반복해서 그걸 말한다. 신학용어로 ‘상호내주’라 한다. 상호내주는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예수와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와 제자들이다. 오늘은 두 번째만 이야기하자.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포도나무라 하고, 제자들을 가지라고 했다. 가지는 반드시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으며, 그래야만 포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매를 ...

무엇이든지 구하라 [2]

  • Nov 2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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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8일(목) 어제 수요공부의 본문은 요 15장이었다. 예수의 고별설교인 요 14-17장의 일부다. 요 15:7절은 아래와 같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사람들은 특히 후반절에 마음을 빼앗긴다.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룰 수 있다니, 이것보다 더 매력적인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오해다. 전반절이 중요하다. 예수와 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래야만 이 구절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Nov 2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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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7일(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의 첫 구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여기서 아버지를 우리가 세상살이에서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아버지 개념으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아버지라는 표현의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우리의 운명을 책임지신다는 것이다.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조금 돌봐줄 수 있을 뿐이지 우리의 운명을 책임질 수는 없다. 이 구절에서 따라가기 조금 힘든 표현은 ‘하늘’이다. 고대인들은 거기서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그런 공간...

행악자 [1]

  • Nov 2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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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6일(화)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에 다른 두 사람도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형을 당했다고 전한다. 그들을 우리말 성경은 ‘행악자’로, 공동번역은 죄수로 표현했다. 이런 표현은 오해를 불러오기 쉽다. 그들은 단순한 폭력사범이 아니다. 단순한 폭력사범이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처벌을 당했어야만 했다. 십자가 처형은 당시 무소불위의 패권을 행사하던 제국 로마 정권에 저항한 이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다 왜 예수님은 그런 이들과 함께 십자가 처형을 당하신 걸까? 예수님이 반로마 혁명을 주도하...

예수의 정체

  • Nov 2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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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5일(월) 어제 설교의 성경 본문은 예수님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다.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은 정체를 의심받았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즉 그리스도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리스도라는 증거를 대봐라, 하는 소리다. 설교 앞부분에서 짚었지만 이런 의심은 그의 공생애 출발부터 있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마귀의 시험을 세 가지나 받았다. 그 시험의 핵심도 위의 십자가 사건 때의 의심과 같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혹은 스스로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있으면 그 증...

빌립의 요구

  • Nov 2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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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토) 요 14:8절에 따르면 빌립은 예수님에게 이런 요구를 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그가 말하는 아버지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싶다는 이런 요구는 생명의 실체를 알고 싶다는 뜻이다. 이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대답하신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인가?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라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과 하나님...

치매(?) [5]

  • Nov 2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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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2일(금) 최근에 벌어진 에피소드 두 가지. 1) 두 주일 전 수요일이다. 성경공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름 계기판을 보니 집에 가까스로 갈 정도였다. 다음날 집사람이 운전할 걸 감안해서 내가 미리 주유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마침 집사람은 바쁜 일이 겹쳐서 공부에 참석하지 못했다. 대구 시내를 약간 빠져 나가 지하철 2호선 연호역 근처의 주유소에 차를 끌고 들어갔다. ‘5만원어치 넣어주세요.’ 야간 근무를 하시는 나이 든 분이 주유기를 걸고 앞차로 가서 계산을 하셨다. 나도 계산을 준비하려고...

도마의 질문

  • Nov 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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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1일(목) 요한 14:장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먼저 가서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돌아와서 제자들을 그곳으로 인도해주겠다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자 도마는 예수님께 이렇게 반문한다.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니까?” 이 질문은 도마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초기 기독교에 속한 모두에게 해당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저 질문을 알기 쉽게 해석하면 하나님을 잘 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Nov 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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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0일(수) 바울은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빌 4:7) 신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킨다고 했다. 경우에 따라서 이게 상투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또는 감상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도대체 ‘그리스도 예수 안’이 무슨 뜻인가?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보자. 남자는 여자를 통해서, 그리고 여자는 남자는 통해서 삶의 의미를 경험한다. 그들은 비록 성격이 다르고 가치관이 달라도 서로에게 완전히 속해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자는 여자 안에 있으며 여자는 남자 안에 있는 셈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하나님과 평화

  • Nov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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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9일(화) 지난 설교 주제는 ‘하나님의 평화’였다. 바울은 빌 4:7절에서는 ‘하나님의 평화’라고 말하고 4:9절에서는 ‘평화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소유격으로 하든지 아니면 평화를 소유격으로 하든지 똑같은 의미다. 하나님이라는 말과 평화라는 말이 병행구조를 이룬다. 하나님은 곧 평화라는 뜻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그는 신학의 중심에 들어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은 평화를 협의로만 생각한다. 유엔에서 파송한 군인들을 평화 유지군이라고 한다. 그게 좀 ...

예수 수수께끼 [4]

  • Nov 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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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8일(월) 지난 수요일 공부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신약성서는 예수라는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이었다. 수수께끼는 비밀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비밀이었다.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은 수수께끼와 같은 인물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은 뒤에 다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물으신 적이 있는데, 예수님의 정체가 당시에 드러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제자들과 일부 추종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

루터(7)

  • Nov 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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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95개 신학 논제 중에서 몇 가지를 맛보기로 추렸다. 1)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 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 없다. 5) 교황은 그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한 형벌 이외에는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권세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

루터(6) [3]

  • Nov 1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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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5일(금) 루터의 95개조 신학논제의 두 번째 주제는 교황무오설이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 교황은 잘못이 없는 존재다. 우리 개신교 신자들은 그걸 비판한다. 교황을 신으로 여긴다고 말이다. 교황의 이름으로 진행된 종교재판 중에서 오류로 밝혀진 것들은 수없이 많다. 갈릴레이에 대한 종교재판은 대표적이다. 로마가톨릭교회도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무조건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교황이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릴 수 있지만 일정한 때가 되면 교정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오류...

루터(5)

  • Nov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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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4일(목)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출입문에 내다붙인 95개조 신학논제는 주로 면죄부와 교황무오설에 대한 비판이다. 면죄부는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독일 알브레히트 추기경에게 판매권을 허락함으로써 독일 지역에서 시행되었다. 알브레히트는 테첼로 하여금 독일 지역을 순회하면서 면죄부를 옹호하는 강연을 하게 했다. 면죄부는 로마 베드로 성당 건립 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교황청에서 생각해낸 꼼수(?)처럼 우리는 생각한다. 베드로 성당 건립과 관계가 없는 건 아니지만 면죄부가 그렇게 신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는 ...

예수와의 일치 [7]

  • Nov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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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수) 이번 주일 설교를 들은 어떤 신자가 하는 말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무엇인지 딱히 손에 잡히는 게 없어서 집에 갈 때까지 계속 그걸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 설교가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겠다. 예수와의 일치가 도대체 무얼 가리키나? 우리 세상을 살면서 경험하는 사람과 사람의 일치는 결혼관계나 친구관계 등을 가리킨다. 그런 관계는 다른 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특별한 관계다. 또는 자전거나 등상 동호회 활동도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거기...

숨 이전과 이후 [2]

  • Nov 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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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화) 오늘 주제도 지난 설교에 나온 이야기다.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문장에서 모든 사람은 지금 이렇게 살아서 숨 쉬고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죽어서 숨을 멈춘 사람까지 포함된다는 것이다. 이게 말이 될까? 아무래도 하이데거 이야기를 해야겠다. 그는 사물(Ding)을 가리켜 사중자의 회집이라고 말했다. 사중자(四重者)는 독일어 das Gevierte의 번역이다. 번역이 우습게 보이긴 한다. 저 단어는 독일어로 4(四)를 뜻한 vier에서 왔다. 사각형을 Geviert라고 한다. 이걸 의인화해서 Gevierte라고...

삶에 대한 선입견 [3]

  • Nov 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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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월) 어제 설교 본문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절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구절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로 설명했다. 거기서의 핵심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미몽이나 광신으로 떨어진다. 마치 남편이나 자식이 죽었는데도 살아있다는 생각으로 시체와 함께 수년 동안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광신으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죽음 너머의 삶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

루터(4) [2]

  • Nov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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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9일(토)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신학 논제를 일종의 대자보 형식으로 내다 걸은 때가 1517년 10월31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훗날 멜랑히톤이 그렇게 말한 걸 교회사학자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니다. 루터가 일단 95개조 신학 논제를 작성한 건 분명하고 그걸 몇 사람에게 보낸 것도 분명하다. 95개조 신학 논제가 종교개혁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상징적인 사건으로서는 충분한 의미가 있다. 1517년은 루터의 나이가 34세 되는 때다. 1512년에 박사학위...

루터(3) [2]

  • Nov 0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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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8일(금) 루터는 별로 잘 생기지 못한 것 같다. 크라나흐라는 화가가 루터와 그의 가족을 그리곤 했다. 루터가 대학교를 다니거나 수도원 시절에는 마른 편이었는데, 수도승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였는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살이 오른 것 같다. 루터는 젊었을 때는 건강했으나 종교개혁의 중심에 발을 디디고 나서는 별로 건강하게 산 거 같지는 않다. 정신적으로도 예민한 편이어서 헛것(마귀)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 1520년에는 사고로(?) 동맥이 끊기기도 했고, 종교재판을 받으러 보름스로 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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