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2) [4]
11월7일(목) 루터는 1546년 2월18일 새벽에 죽었다. 돌연사라고 할 수는 없으나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자기의 기력이 다했다는 것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지만 그렇게 금방 죽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죽기 얼마 전에도 다음과 같은 농담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내가 다시 비텐베르크로 가게 된다면, 나는 관 속에 누워 벌레들에게 뚱뚱한 박사를 실컷 포식하게 해줄 것이다.” 루터의 시신은 의장병에 의해서 비텐베르크로 운송되었다. 중간에 유해가 안치되는 곳마다 군중들이 몰렸다. 그...
루터(1)
11월6일(수) 오늘 종교개혁 596주년 기념 특강의 주제는 루터의 95개 신학 논제였다. 이 주제는 천천히 기회가 되는대로 설명하기로 하고 오늘은 루터 생애의 중요 사건만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겠다. 일단 도표는 아래와 같다. 1483년 11월10일- Eisleben에서 출생, 7남매의 맏아들 1505년(22살)- Erfurt 성 아우구스티누스 은둔자 수도회 가입 1510년- 로마 방문, 스칼라 상타 계단 1512년- 박사 학위 1512년(29살)-Wittenberg에서 시편강해를 시작으로 교수 활동, 사제. 1517년(34살) 10월31일 95개 신학논제 게재, 면죄부와 교황 무오설...
예수의 믿음 [6]
11월5일(화)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 제목에 따르면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 각자의 믿음은 물론 중요하다.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세상적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옳음의 능력
11월2일(토) 지난 설교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이다. “... 더 나가서 본문의 세리처럼 지금 여기서 이미 그 옳음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옳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충분히 전달되지 않은 것 같다. 저 말은 ‘칭의의 능력’이라고 보면 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때 우리는 삶의 참된 능력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삶의 능력을 다르게 생각한다. 돈이나 권력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함으로써 자신을 높이는 것을 삶의 능력으로 여긴다. 그게 우리 눈에 쉽게 들어오기 ...
삶의 완성(2)
11월1일(금) 지난 주일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가 비록 신앙의 부침이 있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집중하면 평생 전체를 놓고 볼 때 신앙이 앞으로 진보할 것이며, 삶의 완성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삶의 완성’이라는 말을 오해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완성은 불가능하다. 구원받았는데도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소위 구원파다. 구원이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회심기도를 드리지 않는다. 일종의 실증적 구원론이다. 구...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4]
10월31일(목) 어제 저는 WCC 부산 10차 총회 개회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예배 순서의 하나인 신앙고백이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드려지더군요. 이 신조는 동방 서방 모든 교회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샘터교회는 매월 첫 주일에 성찬예식을 하면서 신앙고백을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로 드리는 까닭에 이번 총회의 예배가 더 반가웠습니다. 번역이 매끄럽게 되었더군요. 그래서 이번 주 샘터교회도 이번 총회 예배에서 사용된 번역문을 따르려고 합니다. 중심 내용은 원래의 것과 비슷합니다. 단 하나의 차이가 있는데, 성령에 대...
하나님의 자비
10월30일(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기독교 영성의 핵심이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했다는 뜻이다. 말이 그렇지 저런 기도를 드리기가 쉽지 않다. 겉으로 기도를 드릴 수는 있겠으나 그런 기도의 영성으로 살아가기는 어렵다. 그런 삶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손에 잡히는 건 주로 실증적으로 확실한 것들이다. 그것이 뭔지는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우리 모두가 붙잡으려고 맹렬히 따라가는 그것을 생...
다시, 바리새인과 세리
10월29일(화) 지난 설교의 중심인물인 바리새인과 세리에 대한 질문을 몇 분에게서 개인적으로 받았다. 1) 세리처럼 몰상식하게 살았어도 하나님의 자비에만 의존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다는 말인가? 2) 바리새인이 자신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면 세리는 자기의 부끄러운 행동을 수치스럽게 생각한 것뿐이라는 점에서 양쪽의 태도가 똑같은 건데 왜 세리만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가? 둘 다 생각해볼만한 질문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세리가 괜찮은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실제 삶에서는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이다. 요즘의 상황...
영혼의 훼손 [2]
10월28일(월) 어제 설교 중에 상대적인 우월감에서 만족해하는 삶은 결국 ‘영혼의 훼손’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영혼의 훼손이라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리얼하게 전달되겠으나 어떤 사람에게는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후자에 속한 분들을 위해서 보충 설명을 해야겠다. 영혼이 뭘까? 영혼은 영의 인간적 현상이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적 본질인데, 그 성령에 반응하는 인간의 구성 요소가 영혼이다. 그래서 사람은 영혼의 만족에서만 참된 만족이 가능하다. 좋은 직장을 얻거나 마음에 드는 결혼...
무엇이 ‘옳음’인가? [4]
10월26일(토) 성서를 관통하는 큰 흐름의 하나는 의(義), 즉 ‘옳음’에 대한 것이다. 구약은 율법을 통해서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 선지자들도 개인과 사회의 정의를 외쳤다. 의, 율법, 옳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웬만해서 의로워지지 않는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다. 예수 시대의 사람들에 비해서 오늘 우리가 더 옳다는 보장은 못한다. 이 문제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인간이 죄의 지배를 받는다고 표현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하지만 ...
하나님의 계시 [2]
10월25일(금) 지난주 설교의 성경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새로운 약속이 맺어질 때 하나님께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고 말했다. 하나는 계시이고, 다른 하나는 사죄다. 사죄는 앞에서 ‘하나님의 망각’이라는 제목으로 설명했으니 오늘은 계시에 대해서 보충하겠다. 그 대목에서 나는 예레미야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한 채 계시의 명확성을 언급했다고 설명했다. 새로운 약속이 맺어지면 하나님을 알리는 말을 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에게 명확히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이스라엘 역사에서는 일어나지 못했...
예수 경험 [2]
10월24일(목) 어제 묵상 마지막 단락에서 삶 경험은 존재 경험이고 그 존재 경험이 하나님 경험이라고 말했다. 이런 표현들이 너무 현학적이어서 우리에게 잘 와 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별로 상관없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현학적이라는 말은 일단 접어두고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만 짚자. 기독교 신앙은 주로 예수 사건과 연관된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런 신앙의 기초와 존재 경험은 거리가 있어 보인다. 예수 경험은 순전히 믿음에 관계된 것이고 존재 경험은 철학적 인식에 관계된 것이...
삶 경험 [4]
10월23일(수) 오늘 수요공부의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살아있다는 경험을 언제 하느냐고 물었다. 공연한 질문일지 모른다. 모두들 생생하게 잘 살고 있는 마당에 당신 정말 살아있다는 걸 느껴, 하고 물었으니 말이다. 정신없이 그냥 쫓기며 사는 것과 실제로 삶을 느끼면서 사는 것은 다르다. 대개는 정신없이 산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거나 허무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그런 느낌이 오더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시 정신없는 삶으로 돌아간다. 그게 그나마 자신을 지탱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
하나님의 망각 [2]
10월22일(화) 지난 주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신다고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걸 기억하느라 영적으로 지쳐 있거나 병들어가는 게 아닌가 하고 물었다. 자기의 잘못이 무엇인지 분간 못해도 좋고 또는 뻔뻔하게 살아도 좋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예레미야도 그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핵심은 사죄의 일방성이다. 그걸 깊이 인식한 사람은 누가 뭐라 말하기 전에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살아간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실제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율법 패러다...
삶의 완성(1) [4]
10월21일(월) 어제 설교의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주신다는 사실 하나로 우리의 삶은 완성된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잘 전달되지 않았을 것이다. 설교 시간에는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넘어가고 마는데, 설교자로서는 아쉬움이 크다. 도대체 삶의 완성이라는 게 무언가? 이 말은 우리의 삶이 늘 미완성 상태라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하고 즐긴다고 하더라도 삶이 완성되는 건 아니다. 지난날 왕이나 오늘날 대통령이라고 하더...
하나님의 자기 제한 [1]
10월19일(토) 내일 설교의 제목은 <약속의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약속이라는 게 성립할까? 약속은 평등한 관계에서만 가능한 사건인데 하나님과 인간은 평등한 관계가 아니지 않은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많은 걸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약속은 우리가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약속 개념과는 차이가 있다. 쌍방이 서로 조건을 맞추는 것과는 다르다. 성서의 약속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제안이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제안했다고 해서 이것을 불평등한 약속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결혼예식 기도문 [2]
10월18일(금) *내일 대구샘터교회 남청년이 구미에서 결혼한다. 신부가 경북 구미에 살기 때문이다. 관례대로 신부측 교회의 담임 목사님이 주례를 감당하시고, 나는 기도를 맡았다. <매일 기도하라>에 이미 쓴 결혼 기도문을 기초로 해서 다시 살을 붙였다. 혹시 결혼예식에 기도할 기회가 있는 분은 내 허락을 미리 받지 않아도 이 기도문을 사용하실 수 있다. 오석원, 윤성희 결혼예식 기도 주님, 꽃처럼 아름다운 신부 윤성희 자매와 늘 푸른 나무처럼 듬직한 신랑 오석원 형제가 지금 여기 부부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과 많은 증인들 ...
망실(亡失)
10월17일(목) (오늘은 ‘창작과 비평’ 2013년 가을 호에 실린 시를 한편 소개한다. 시적 운율을 파괴하고 산문처럼 적은 시다. 소리 내어 읽어보니 뭔가 가슴이 남는 게 있다. 문태준은 1970년 경북 김천 출생, 1994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그늘의 발달>, <먼 곳> 등이 있음) 망실(亡失) 문태준 무덤 위에 풀이 돋으니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아요 오늘은 무덤가에 제비꽃이 피었어요 나뭇가지에서는 산새 소리가 서쪽 하늘로 휘우둠하게 휘어져나가요 양지의 이...
믿음과 구원의 관계
10월16일(수) 지난 토요일 묵상에서 나병환자였다가 치료받은 사마리아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즉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소.’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물으면서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 대답을 알고 있지만 그대로 살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은 막연하게 잘 되겠지, 하나님이 알아서 잘해주겠지, 하는 게 아니다. 또는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도 아니고 믿음 만능주의도 아니다. 그 믿음은 예수와 직결된다. 이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느끼며 사는 사람들은 드물다. 어렴풋이 그러려니 ...
발아래 엎드리기
10월15일(화)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했다는 눅 17:16절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13일 묵상에서 그것이 절대 순종을 의미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렇게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런 영성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기에 오늘 한번더 구체적으로 생각해야겠다. 보통 순종이라고 하면 말을 잘 듣는 거라고 여긴다.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직장 상사의 말을 잘 듣고 심지어 목사의 말을 잘 듣고, 국가와 정부의 말을 잘 듣고, 남편의 말을 잘 듣고 ... 등등, 주로 수직적인 관계에서 일어나는 태도이다. 이것으로 순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