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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우상숭배 [2]

  • Sep 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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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삶(9) [2]

  • Sep 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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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0일(금) 삶(9) 삶의 반대말은 죽음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인간은 왜 죽어야 하나?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모든 피조물의 숙명이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죽어야 할 뿐이다. 인간만 죽는 게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탄생, 노화,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을 간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그런 숙명에 놓여 있다. 태양도 노화되고 죽을 것이다. 다른 별들도 다 마찬가지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가는 길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실제...

삶(8)

  • Sep 1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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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9일(목) 삶(8) 어제는 영생 이해가 시간 이해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연대기적인 시간 이해에 떨어지면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지속되는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런 상태는 행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이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실제로 죽지 않을 운명으로 산다면 인간은 허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죽음을 구원으로 여길 것이다. 부모도 죽고, 스승도 죽고, 친구도 죽고, 자식도 죽는데 자기 혼자만 쨍쨍하게 살아있다고 생각해보라. 연대기적인 시간 이외의 시간을 모르기에 지금 우리는 영생을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성경은 왜...

삶(7)

  • Sep 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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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8일(수) 삶(7)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를 믿으면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이 진술은 우리의 경험과 배치된다. 예수를 믿은 수많은 기독교들 중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고, 지금도 계속 죽어갈 뿐이다. 그렇다면 이 진술이 말하는 영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게 분명하다. 우선 영원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보라. 이것을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시간의 연장으로 보면 곤란하다. 그런 시간의 연장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듯이 시간과 공간의 결합으로 진행되는 ...

삶(6) [4]

  • Sep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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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7일(화) 삶(6) 오늘 생후 4개월 된 아기를 보았다. 대략 3시간 쯤 옆에 머물렀다. 그 사이에 150-180 씨씨 정도 되는 우유를 두 번이나 마셨다. 그 마시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한지 옆에서 보고 있던 나까지 저절로 삶의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저래서 젖 먹던 힘을 낸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저 아이는 지금 삶의 힘에 사로잡혀 있기에 주변 세계에 대한 불안도, 의심도, 걱정도 없다. 무엇을 마시는지, 무엇을 먹는지, 입는지,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이 없다. 그런 것 자체를 모른다. 오직 살아있음에만 본능적으로 ...

죄와 고 [2]

  • Sep 1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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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6일(월) 죄와 고 어제 설교 중에 죄를 설명하면서 그것이 불교의 고(苦)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말했다. 고는 ‘괴로워하다’, 또는 ‘쓰다’는 뜻이다. 삶이 고해와 같다는 말도 한다. 여기서 고는 불행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행복하다고 여기는 모든 삶의 조건들도 결국은 사람을 얽매기 때문에 사람은 한평생 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연봉 높은 직장에 들어가고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잘 키운다고 해서 우리가 고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다. 조금 더 깊은 차...

죄인 중의 괴수 [4]

  • Sep 1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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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4일(토) 죄인 중의 괴수 내일 설교의 성서 본문에는 바울의 이런 고백이 나온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꽤나 잘 알려진 구절이다. 역시 바울은 죄에 대한 인식이 남다르게 통절하구,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구절을 놓고 설교하는 사람은 청중들을 향해서 바울을 본받으라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라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죄를 종이에 나열하거나 하면서 눈물, 콧물까지 흘릴지 모르겠다. 그런 정도로 생각하면 오해다. 성서는 파렴치한 행위를 죄...

삶(5) [2]

  • Sep 1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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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3일(금) 삶(5) 삶은 ‘사는 것’이라는 뜻이다. 순수한 우리말이다. 한자로는 생(生), 또는 생명(生命)이다. 영어 life, 독어 Leben이 이에 해당된다. 어원적으로 보면 삶은 숨과 연관된다. 숨을 쉬어야 삶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 루아흐와 헬라어 프뉴마는 영, 바람, 숨이라는 뜻이 있다. 우리나라 말과 어원적으로 비슷한 구조다. 삶은 생명, 살아있음의 문제다. 루아흐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야겠다. 고대인들은 바람을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했다. 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우리가 세상을 계량적 차원...

삶(4) [7]

  • Sep 1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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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2일(목) 삶(4)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현존재(Dasein)로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인간을 현존재라고 하는 이유는 인간만이 사유를 통해서 존재를 존재로 드러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현존재 개념보다는 세계내존재 개념을 좀더 따라가려고 한다. 그게 삶 문제와 깊이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다. 1) 세계내존재는 인간이 세상을 대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이와 달리 세상을 대상으로 경험한다고 생각한다. 저것은 구름, 이것은 나무, 또 저것은 강이나 새라고...

삶(3)

  • Sep 1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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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수) 삶(3)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삶을 습관적으로 대한다. 좋은 습관도 있긴 하다. 공부 잘 하고 돈 잘 벌고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좋은 습관들이다. 문제는 습관을 절대화하는데 있다.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의심해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렇게 믿고 산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면 된다. 다만 삶에 대한 참된 경험은 포기해야 한다. 삶에 대한 경험은 습관으로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습관에 충실해서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돌아갈수록 삶의 본질에서는 멀어질 염려가 있...

삶(2) [4]

  • Sep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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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0일(화) 삶(2) 우리는 지금 살아있지만 곧 죽는다는 것도 분명하다. 죽는다는 게 실감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지금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으니 말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삶을 누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삶의 태도를 뭐라 할 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그래서 현재의 삶을 비관만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다. 정당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죽는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지금 살아있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삶은 교수대로 불려갈 순간을 기다...

삶(1) [4]

  • Sep 09,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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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9일(월) 삶(1) 나는 죽을 때까지 ‘삶’이라는 주제 하나로 글을 써도 아마 다 쓰지는 못할 것이다. 삶의 부분적인 현상은 조금 경험했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는 너무나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완전한 대답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없는 대답을 찾으러 나서는 것과 비슷하다. 헤매다가 중간에 쓰러지지 않겠는가. 그래도 찾으러 다니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서 너무나 쉬운 대답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삶을 선물로 주셨다...

제자 되기, 가능한가?

  • Sep 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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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7일(토) 제자 되기, 가능한가? 내일 설교 본문을 해석하기가 만만치 않다. 예수는 가족도 미워하고 모든 소유도 포기하지 않으면 당신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하셨다(눅 14:25-33). 출가 수도승이 되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린다. 가족을 미워하고 소유를 포기한 채로는 일상을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이 말씀을 종말론적 명령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종말이 오긴 전인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지만 종말에서는 가능한 말씀이라고 말이다. 또는 이 말씀을 일반 대중을 향한 게 아니라 12 제자를 향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예수님...

손(5)

  • Sep 06,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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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6일(금) 손(5) 아래의 글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하나님 이야기> 15-17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읽기에 따라서 조금씩 달리 전달되겠지만, 하나님의 손이라는 발상이 재미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뭔지 활기 있고 새하얀 것이 한 줄기 아련한 광채처럼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춤추듯이 오락가락하고 있었습니다. 그 근방은 이미 그 즈음부터 지형이 무척 둥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이 나서, 성 니콜라우스에게 ‘내가 창조한 사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손(4) [2]

  • Sep 05, 2013
  • Views 2447

9월5일(목) 손(4) 예수는 출가 전까지 아버지 요셉에게서 목수 일을 배우면서 살았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것에 대해서 직접 발언을 하지 않지만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은 자주 거론한 걸 보면 간접적으로 그것을 인정한 게 분명하다. 예수는 출가 전까지 목수로 살았다고 말이다. <희랍인 조르바>로 유명한 니스코 카잔치키스는 놀랍게도 <예수의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도 썼다. 거기서 첫 장면은 무장 독립을 운동을 하던 아들이 로마의 십자가형에 처형당하는 날 어떤 여인이 십자가를 만든 사람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것이다. ...

손(3) [4]

  • Sep 04,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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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4일(수) 손(3) 이십 여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과 이미 70대 중반에 들어선 큰 형님의 손은 막노동자의 손답게 거칠다. 겉으로 볼 때 큰 손은 아니지만 내 기억으로 두툼했다. 손아귀 힘도 셌다. 그분들은 평생 육체노동으로 사셨다. 함석을 가위로 자르고 접고 나무망치로 두드리고, 납작한 철근을 구부리는 모든 일이 손을 필요로 한 탓에 손 근육이 발달했다. 나도 어렸을 때 그분들의 일을 조금씩 돕곤 해서 그분들의 손힘이 얼마나 센지 잘 안다. 어른이 돼서 가끔 만나 악수할 때도 손의 힘이 전달되곤 했다. 그들에 비해 내 손은...

손(2) [2]

  • Sep 03,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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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일(화) 손(2) 나는 예배 마지막 순서인 후주가 울리는 동안 미리 출입문 쪽으로 가서 밖으로 나가는 교우들과 악수를 나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어린이들과도 악수한다. 예배를 인도한 사람으로서 거기에 참여한 분들과의 사귐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악수를 할 때는 손을 보는 게 아니라 얼굴을 본다. 성찬식을 집행할 때와는 반대다. 손을 안 보고 악수를 하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의 손이 엇갈리기도 한다. 내가 교우의 손끝만 잡는 경우도 생기고, 또 거꾸로 되는 경우도 있다. 악수를 나누는 데도 다 사람의 성격...

[8]

  • Sep 0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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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월) 손 샘터교회에서는 매월 첫 주일에 성찬예식을 거행한다. 회중들이 한 줄로 서서 성찬대 앞에 오면 내가 빵을 뜯어서 각자의 왼편 손바닥에 올려놓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하고 말한다. 그러면 회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왼편 손바닥에 놓인 빵을 오른손으로 잡아 바로 옆 질그릇에 담긴 포도주에 찍어 먹는다. 나는 앞으로 나온 회중들의 얼굴은 안 보고 그의 손만 본다. 빵을 떨어뜨리지 않게 위해서 조심스럽게 그분의 손을 보고 정확하게 올려놓는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빵이 굴...

바알 숭배 [4]

  • Sep 0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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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일(일) 바알숭배 오늘 설교에는 바알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헛된 것’은 바알에 대한 언어유희이다. 그것이 왜 헛된 것일까? 그걸 정확하게 아는 것이 오늘 설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서 중요하다. 그것을 아는 게 쉬울 거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거의 일방적으로 바알 숭배 방식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물질적인 풍요를 신앙의 잣대처럼 생각한다. 거룩한 분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면서도...

아, 예레미야 [2]

  • Aug 3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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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31일(토) 아, 예레미야 내일 설교 본문은 유대가 저 나락으로 떨어지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예레미야의 글이다. 우선 우리는 예레미야가 누군지를 알아야만 그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 역사적 인물을 알려면 그 시대를 또한 알아야 한다. 기원전 7세기 제사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독하게 말씀을 전하던 예레미야는 도대체 무엇을 경험한 것일까? 그래서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은 상황에서도 말씀 선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일까? 나는 그것이 정말 궁금하다. 예레미야는 불운한 선지자였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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