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복음 묵상(21) [1]
포도주 사건에 예수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결혼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그 사실을 전한다.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마리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 예수로부터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인들에게 예수의 말대로 실행하라고 이른다. 예수가 어떤 표적을 행할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그 잔치를 책임지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로마가톨릭 교도들은 마리아를 ...
포도주와 믿음, 요한복음 묵상(20) [12]
포도주 이야기에서 마지막 결론은 제자들이 예수를 믿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결국 믿음이다. 믿음이 있다면 굳이 포도주 사건이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예수가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았다는 말이냐, 딱 부러지게 말하라고 다그치고 싶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알고 싶은 분들을 위해서 말해야겠다. 예수는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라. 물리적인 차원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는 ‘온전한 사람’이다. 온전한 ...
포도주 이야기, 요한복음 묵상(19) [7]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은 예수의 첫 표적으로 인정된다. 요 2:11절은 이렇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공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 전승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가 지금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 사건은 기독교적인 성격보다는 이교적인 성격이 강하다. 헬라 신화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생활필수품이었다. 거기에 얽힌 에피소드는 지천이다. 이 표적으로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한다. 요한복음 기자가 ...
물과 포도주, 요한복음 묵상(18) [9]
요 2:1-11절에는 예수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런데 일단 본문을 꼼꼼히 읽어보면 그 사실에 대한 명시적 언급은 없다. 그렇게 추정될 수 있을 뿐이다. 예수가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한 다음에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했다. 연회장은 원래 물이었던 포도주를 맛보고 신랑을 칭찬했다. 복음서에 나오는 일반적인 기적은 예수의 어떤 행위가 병행된다. 기도를 한다거나 몸에 손을 댄다.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예수는 축사를 했다. 그런데 포도주 사건에서는 아무런 언행이 없었다. 물을 포도주...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복음 묵상(17) [3]
우리는 일반적으로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가 갈릴리 호수에서 그물질을 하고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된 걸로 알고 있다. 그 사실을 마 4:18-22, 막 1:16-20, 눅 5:1-11절이 전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에 대해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세례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가 요한의 권면으로 예수를 따르게 되었고, 자기 형인 베드로를 예수에게 인도했다는 것이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이었다. 예수님이 그에게 게바라는 새 이름을 주었다. 게바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이다. 이런 개명 이야기가 공관복음에 ...
하나님의 아들, 요한복음 묵상(16)
세례 요한은 비둘기 같은 성령 현상을 보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요 1:34). 앞에서 본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기에 성령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생명을 준다는 뜻이다. 생명을 주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의 전권에 속한다. 물론 예수 믿는다고 해서 돈이 나오거나 밥이 나오는 건 아니다.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만을 생명으로 안다면 예수 믿을 준비가 안 된 사람이다. 그분이 주시는 생명은 세상의 생명과는 다르다. 그게 무엇인지를...
성령 세례, 요한복음 묵상(15) [3]
세례 요한은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서 예수 위에 머무는 것을 보고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요 1:33). 하나님께서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는 자이고,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자라는 뜻이다. 성령 세례는 무슨 말인가? 가장 간단한 대답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을 가리킨다. 세례는 물에 잠긴다는 뜻이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에 잠겼다가 다시 나오는 것은 새롭게 산다는 뜻이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이 곧 성령 세례다. 그...
요한보다 앞선 자, 요한복음 묵상(14)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요 1:30)고 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미 서두에서 예수를 가리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신 로고스라고 말했다. 먼저 태어난 세례 요한보다 예수가 먼저 계시다는 말과 비슷한 뜻이다. 이게 말이 될까? 세상을 연대기로만 보면 이게 말이 되지 않는다. 한 달이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앞선 자다. 성서는 시간과 역사를 연대기(크로노스)가 아니라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로 본다. 카이로스로 볼 때 예수는 창조의 완...
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 묵상(13) [6]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이 요 1:29절부터 시작해서 34절까지 나온다. 첫 증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표현이다. 그걸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벌써 그림이 그려진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가 연상된다. 동물을 잡아서 피를 뿌리고 몸은 태운다. 물론 다 태우는 게 아니라 일부를 태운다. 나머지는 함께 제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나눠 먹거나, 제사장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동물을 번제로 바쳐서 죄의 용서를 기대했다. 요한은 그 번제 제물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본 것이다. 즉 예수...
'장난기 가득한 눈' [7]
來如哀反多羅 7 불어오게 두어라 이 바람도, 이 바람의 바람기도 지금 네 입술에 내 입술이 닿으면 옥잠화가 꽃을 꺼낼까 하지만 우리 이렇게만 가자, 잡은 손에서 송사리떼가 잠들 때까지 보아라, 우리 손이 저녁을 건너간다 발 헛디딘 노을이 비명을 질러도 보아라, 네 손이 내 손을 업고 간다 죽은 거미 입에 문 개미가 집 찾아 간다 오늘이 어제라도 좋은 날, 걸으며 꾸는 꿈은 壽衣처럼 찢어진다 來如哀反多羅 8 내게로 왔던 것은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니, 오늘 같이 자주지 못해 미안해요 피에로 파올로 파솔리...
來如哀反多羅 4
來如哀反多羅 4 나는 사랑하지 않을 것이기에 내 삶에 숫기 없기를, 나는 이미 뿔을 가졌으므로 내 삶에 발톱이 없기를! 눈 대신 쇠꼬챙이를 가졌으므로 내 눈에 물기 없기를! 지금 내 손에 감긴 때 묻은 붕대, 언제 나는 다친 적이 있었던가 지금 내 머릿속 여자들은 립스틱 짙게 처바른 양떼들인가 해묵은 상처는 구더기들의 집, 물 많은 과일들은 물이 운 것이다 來如哀反多羅 5 초록을 향해 걸어간다 내 어머니 초록 초록 어머니 가다가 심심하면 돼지 오줌보를 공중으로 차올린다, 하늘의 가장 간지러운 곳을 향해 축포쏘기 그리고 또...
래여애반다라 [7]
來如哀反多羅* 1 이성복 추억의 생매장이 있었겠구나 저 나무가 저리도 푸르른 것은, 지금 저 나무의 푸른 잎이 게거품처럼 흘러내리는 것은 추억의 아가리도 울컬울컥 게워 올릴 때가 있다는 것! 아, 푸르게 살아 돌아왔구나,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 來如哀反多羅 2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돌아가면 볼 수 있을까, 바람의 어떤 딸들이 신음하는 어미의 자궁을 열고 피...
원당일기(22-2) 다시 집으로 [2]
어제 아침 집을 떠나 대구샘터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오후에는 서울샘터교회 예배와 신학공부를 인도했다. 약간 늦은 저녁을 먹은 뒤 서울여성플라자에서 하룻밤 자고, 오늘 오전 10:00-12:30에 기독교장로회 목회연구원 목회학 박사 과정에서 강의한 뒤에 하양에서 볼 일을 보고 한 시간 전에야 다시 원당집으로 돌아왔다. 강행군이라면 강행군이었다. 뭔가를 계속 말해야만 했다. 워낙 말을 잘 할 줄도 모르거니와 말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 불행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렇게 ...
아버지의 품, 요한복음 묵상(12) [1]
요한은 18절에서 예수를 가리켜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자’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품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뜻이다. 그 독생자 예수가 아무도 보지 못한 하나님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진술의 근거가 무엇인가? 앞에서도 몇 번 말했지만 요한은 예수에게서 궁극의 생명을 경험했다. 그 궁극의 생명이 곧 하나님을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것으로도 다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궁극의 생명으로만 경험할 수 있다. 그 궁극의 생명도 우리가 ...
하나님을 본 사람, 요한복음 묵상(11) [24]
요 1:18절은 좀 심각한 내용이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을 만난 것처럼 읽힐 수 있는 사건들이 적지 않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모세도, 여러 선지자들도 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다거나 보았다는 의미인가? 아니다. 그것은 문학적인 수사다.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가 없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궁극적인 생명을 본다는 것, 즉 그것을 직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은혜와 진리, 요한복음 묵상(10) [3]
1:14절에 예수의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한다. 은혜와 진리는 보기에 따라서 궁합이 맞지 않는 결합이다. 은혜는 종교적인 개념인데 반해서 진리는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기자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증거다. 복음은 은혜이면서 동시에 진리다. 은혜는 진리로 나타나야 한다. 참된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은혜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단순히 낱말 뜻인 ‘참된 이치’로만 알면 곤란하다. 진리로 번역된 헬라어 ‘알레테이...
노동절, 5월1일(수) [7]
오늘은 노동절이었다. 대다수의 직장이 문을 닫은 것 같다. 이렇게 하루 쉰다고 해서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잠시 유예될 뿐이다. 노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인간이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노동 없이 인간 삶은 유지될 수도 없다. 인간의 얼굴을 한 노동이 필요할 뿐이다. 어떤 것이 과연 인간의 얼굴을 한 노동인가? 자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것만큼 받아가는 세상에 대한 마르크스의 꿈을 공산주의가 실현해보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역시 노동 해방이라는 ...
독생자의 영광(요 1:14), 요한복음 묵상(9) [2]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에게서 영광을 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도대체 영광은 무엇인가? 저 단어는 일상적으로도 사용된다. 나의 영광이라거나, 가문의 영광이라는 말들을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그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영광은 신적인 차원의 단어이기 때문이다. 영광은 일종의 신적인 빛이자, 능력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식할 수 있는 어떤 현상이기도 하다. 예수의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다. 초기 기독교가 예수에게서 하나님과 동일한 힘을 경험했다는 뜻이다. 그것...
파리잡기, 4월29일(월) [7]
어제 대구샘터 교우들이 우리 집을 방문했다. 주일예배에 참석하신 분들 대부분과 그 외의 몇 분까지 포함해서 여러분들이 오셨다. 함께 노래 부르고, 먹고, 마시고, 개별적으로 쑥 캐고 산책하고,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여러분들이 올 때마다 동행하는 생명체가 있다. 파리다. 손님들은 예정 시간에 맞춰 돌아가지만 파리는 그대로 머문다. 돌아갈 집이 없는지, 길을 잃었는지, 우리 집이 좋다고 여긴 탓인지 모르겠으나 제법 많은 파리가 남았다. 파리와 같이 살아도 큰 문제가 없지만, 불결하다는 선입관 탓에 (...
성육신(요 1:14), 요한복음 묵상(8) [1]
요 1:14절은 요한복음의 여러 구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할 뿐만 아니라 중요하기도 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은 곧 성육신(incarnation)을 가리킨다. 말 그대로 육신(肉身)을 이루었다(成)는 뜻이다. 뻔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겠으나 성육신은 하나님 상에 대한 혁명적인 전환이다. 유대교가 기독교의 다른 것은 다 인정할 수 있어도 이것만은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초월적이다. 하나님은 구체화할 수 없다. 하나님에 대한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