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6), 2월4일(월)
이렇게 책읽기에 대해서 뭔가를 말하고 있지만, 이런 말이 큰 설득력은 없을지 모른다. 뻔한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책읽기가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 알지만 현실이 받쳐 주지 않는데, 어떻게 하냐 하는 푸념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속된 말로 ‘먹구살기’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책을 읽으라는 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직업적으로라도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책을 손에 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루종일 직장생활을 하고 지쳐서 집에 들어오면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티브이...
책읽기(5), 2월3일(일) [6]
성경도 책이다. 오늘은 성경읽기의 한 예를 들겠다. 오늘 설교의 성경 본문은 렘 1:4-10절이었다. 그 본문 앞인 렘 1:1절에 재미있는 표현이 나온다. 루터 성경의 구문을 그대로 따라서 직역하면 이렇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말이다. 그는 베냐민 지역의 아나돗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다.” 우리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렘 2: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고 한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1장1절에서 예레미야의 말이라고 밝힌다. 예레미야의 말과 여호와의 말씀은 어떻게 다른가? 이게 어려운 질문...
책읽기(4), 2월2일(토) [2]
책읽기는 등산과 비슷하다. 등반 훈련이 되지 않는 사람이 처음부터 에베레스트를 등반할 수 없는 것처럼 책읽기의 준비가 되지 않는 기독교인이 처음부터 바르트나 판넨베르크 같은 신학자들의 책을 읽을 수는 없다. 자기 수준에 적당한 책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등산의 시작이 자기 수준에 적당한 산인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두 가지는 필수다. 하나는 아무리 자기 수준에 맞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기초가 튼튼한 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등산 초보자가 높지 않은 산을 올라갈 때도 최소한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는 등, 등산의 ...
책읽기(3), 2월1일(금) [4]
수년 전부터 멘토, 또는 멘토링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번졌다. 한국을 대표하는 멘토들도 등장했다. 그런 이들의 책은 나오자마자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정치계에서도 그분들의 영향력이 컸다. 멘토링은 지식과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제자나 후학들에게 조언해서 앞길을 잘 헤쳐 나가게 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내가 보기에 멘토링을 받는 것보다는 책을 읽는 게 훨씬 좋다. 멘토링은 기껏해야 여행의 안내를 받는 것에 불과하다. 그 안내가 정확하지 못할 때도 많다. 책읽기는 여행의 의미를 알게 하고, 자기 스스로 지도를 보고 여행...
책읽기(2), 1월31일(목) [3]
어제에 이어서, 책읽기에서 구체적인 내용보다 느낌으로 남는 게 좋은 이유의 다른 하나는 세상 자체가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바로 그런 세상에서 일어난 것에 대한 진술이자 해석이다. 세상이 구체적이지 않다면 결국 책도 구체적일 수는 없다. 세상이 구체적이지 않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게 없다. 보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지나간다. 나 자신도 언제일지 정확하게는 모르나 아무리 길게 잡아도 30년 이상을 버텨내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다. 조금 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별 차이도 없다. 20년 늦게 사...
책읽기(1), 1월30일(수) [5]
지난 1월25일에 있었던 <금요신학강좌>에서 책읽기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다. 그때 나는 책을 읽은 뒤에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어떤 느낌만 남는다고 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일수록 그런 현상은 더 심했다. 기억력이 부족한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력만의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읽은 책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다 기억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책의 느낌만 남았다는 말은 더 본질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다. 하나는 책의 내용을 너무 구체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게 훨씬 건강한 책읽기라는 ...
장준하, 1월29일(화) [4]
매스컴 보도에 따르면 지난 목요일(1월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6부는 고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 씨가 청구한 재심 사건에서 ‘긴급조치 1호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유신헌법에도 위배되고, 현행헌법에 비추어 보더라도 위헌이다. 이 사건 공소사실은 적용한 법령이 위헌, 무효이므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렇게 덧붙였다. “... 한평생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던 잘못된 과거사로부터 얻게 된 뼈아픈 교훈을 바탕으로 기본권 보장의 최후 보루로서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보편적 정의를 실...
빛으로의 죽음, 1월28일(월) [2]
한스 큉은 진화와 창조의 관계를 자연신학의 관점에서 설명한 책 <한스 큉, 과학을 말하다>를 다음의 말로 끝냈다(280쪽). 이제 나는 헤아릴 길 없는 전 실재를 이렇게 이해한다. 하나님은 만물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시작이요 끝이다. 그래서 빛으로의 죽음이다. 창세기 첫째 쪽의 ‘빛’이라는 말로 이 책을 시작했으니, 요한계시록 말미의 ‘빛’이라는 말로 이 책을 맺으려고 한다.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계 22:...
자연의 동형식화에 대해, 1월27일(일)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해서 신학과 자연과학은 늘 대립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창조론으로 진화론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진화론을 만능으로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신학은 자연과학이 말하는 물리와 생명현상을 염두에 둔 채 성서가 말하는 세계를 더 심층적으로 설명해나가야 한다. 판넨베르크에 따르면 지구의 생명현상을 단순히 동형식화(Gleichförmigkeit)로 설명하는 것은 추상이다. 동형식화라는 말은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세계를 고정된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나...
진화와 창조, 1월26일(토) [4]
칼 라너 신학의 영향을 받은 데니스 에드워즈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을 부질없는 것으로 본다. 창조론 자체가 진화 현상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을 직접 인용하자. 창조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다른 어떤 것을 창조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유롭게 자신의 실재를 다른 것에게 소통하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기-증여 과정 안에서 우주는 출현하고 지구상의 생명은 진화한다. 하나님은 결코 이 과정으로부터 떠나는 적이 없고 항상 자신을 사랑 안에서 세계에 내재한다. 초월...
대자, 1월25일(금) [2]
어제 설명한 즉자는 계속 그렇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계속 남아 있다면 더 이상의 정신적인 성숙도 없고, 삶의 역동성도 없다. 마치 어머니 품 안에 안겨서 무한한 평화를 느끼는 어린아이의 경험에 머물고 말 것이다. 사람은 즉자로부터 대자로 나간다. 대자(對自)는 독일어 für sich의 번역이다. für는 ‘위하여’, 또는 ‘향하여’라는 전치사다. für sich는 자체를 위하여, 또는 자체를 향하여 일어나는 어떤 사건을 가리킨다. 자신을 대자적으로 인식하려면 자기의 눈이 아니라 다른 이의 눈으로 자기를 볼 수 있어야만 한다. 대자는 ...
즉자, 1월24일(목)
서양철학을 공부하다보면 즉자(卽自)라는 단어가 자주 나온다. 이 단어는 독일어 ‘an sich’의 번역이다. 그 개념이야 아주 오래되었겠지만 현대철학에서는 칸트, 헤겔, 사르트르 등의 글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an은 전치사로 ‘옆에’라는 뜻이다. 단순히 옆에 있는 건 아니고 딱 붙어서 옆에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조금 떨어져서 옆에 있을 때는 neben이라는 전치사를 쓴다. sich은 ‘자체’라는 뜻의 재귀대명사다. 즉자는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그것 자체에 딱 붙어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낱말 뜻이 아니라 현대철학자들이, 특히 ...
눈 감고 설거지를..., 1월23일(수) [3]
나는 종종 눈 감고 설거지를 한다. 시작할 때부터 눈을 감는 게 아니라 중간에 눈을 떴다 감았다 한다. 그릇을 손으로 잡을 때는 뜨고 세제 묻은 수세미로 그릇을 문지를 때는 감는다. 그릇과 수세미와 세제거품의 질감을 더 느끼기 위해서다. 지금 나의 관심은 지난 60년 동안 길들여졌던 모든 고정관념들을 조금씩 거둬내는 일이다. 고정관념은 사물과의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든다. 그것은 생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까지 지배한다. 똑같이 느끼게 하고, 그것을 기술적으로 반복하게 한다. 대상을 늘 똑같은 범주 안에서만 대하게 만든...
하나님의 영광, 1월22일(화) [4]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문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을 가리킬까? 하나님과 영광은 하나다. 하나님은 어떤 실체로가 아니라 영광으로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뜻이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수여받았다. 이 사건이 유대교의 출발이자, 뼈대다. 모세는 하나님께 ‘당신의 영광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다. 하나님은 모세가 죽을까 염려해서 당신 자신의 영광을 보여줄 수 없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못보고 등만 보았다고 한다. 하나님을 본 자는 죽기 때문이다. 하...
예수의 얼굴, 1월21일(월) [8]
수년전 영국의 어떤 연구소에서 예수의 얼굴을 CG로 복원한 적이 있다. 2천 년 전 유대인 노동자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왔다. 실망한 분들도 많았다. 기존의 명화로 알려진 유럽의 잘생긴 남자 모습과는 달라도 꽤나 달랐다. 그런 얼굴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 또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실제의 외모가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를 가리킨다. 그 인격은 단순히 인간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의 운명을 담지하고 있는 실존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
주현절에 대해, 1월20일(주일)
오늘은 주현절후 둘째 주일이다. 주현절(Epiphany)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한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을 기리는 절기이다. 또는 아기 예수의 정결의식이나 예수의 세례를 기리는 전통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는 예수님의 주되심에 있다. 즉 예수가 주님이라는 사실을 기리는 절기다. 이런 절기는 좀 막연해 보인다. 왜냐하면 예수의 주되심이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은 숨겨 있다. 아무도 예수의 공생애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훗날 교...
소극적인 삶, 1월19일(토) [7]
적극적인 삶에 대립해 있는 소극적인 삶은 오늘날 별로 환영을 받지 못한다. 경쟁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하기 알맞다. 교회에서도 그런 삶은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피하고, 두려워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라. 적극적인 삶이나 소극적인 삶이나 근본적으로는 별 차이가 없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단지 연봉에 차이가 날 것이다. 연봉이 많은 사람은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 많은 걸 소비한다. 소비가 지배하는 삶은 권태롭다. 그것으로 만족을 얻지 못한다.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적극적인 삶, 1월18일(금)
현대인들은 적극적인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강요받는다. 일상이 그런 가치에 포위당했다. 뭔가 역동적인 것 같지만 안식이 없다.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한국교회는 소위 ‘긍정의 힘’ 류에 세뇌당한지 오래다. 목사와 회중들은 믿음으로 뭔가를 성취하기 위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달린다. 그렇게 달려봤자 안식이 없다. 그래도 대안이 없으니 앞만 바라보고 달린다. 세상이 달릴 때 옆에서 제동을 걸어야 할 교회가 앞서서 달리는 형국이다. 현대 문명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간섭으로 발전되었다. 그걸 사...
세균 찾기, 1월17일(목)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구 러시아)은 군비경쟁만이 아니라 우주선 경쟁에서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치열하게 다퉜다. 냉전이 종식된 뒤로 지금은 미국이 앞선 형국이다. 우주 탐험을 전담하고 있는 미국의 나사(?)는 오래 전부터 지구 밖으로 무인 우주선을 쏘아 보내고 있다. 태양계 밖으로 운항 중인 우주선도 있다. 그들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행성은 화성이다. 지구와 가장 비슷한 환경의 행성이라고 한다. 화성 탐사에 들어가는 돈과 기술은 천문학적이다. 그들은 화성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의 흔적이라도 찾으려...
물 한 모금, 1월16일(수) [2]
오늘도 오후에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구에 물이 있다니! 이것보다 놀라운 현상은 별로 없다. 내 몸도 태반이 물이다. 물이 물을 마시니 조화로울 수밖에 없다. 언젠가는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할 순간이 올 것이다. 지구에 물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든지, 내가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그럴 것이다. 아직 실감하지는 못하지만 그 순간이 온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타닉 호가 빙산과 충돌하기 직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