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5), 6월29일, 금
6월29일 교회(5) 주님, 요즘 젊은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에 대한 관심을 끊고 엔터테인먼트만 찾고 있습니다. 또는 어쩔 수 없이 취업에만 목을 매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재미를 얻지 못하는 한 그들은 교회로부터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지혜를 허락해주십시오. 주님, 젊은이들이 교회에 머물지 않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그들의 영혼에 공명될만한 공동체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교회는 신자유주의를 대항할만한 용기가 없습니다. 남북...
교회(4), 6월28일, 목 [2]
6월28일 교회(4) 주님, 믿음은 있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교회생활을 포기하거나 유보한 이들을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한국교회에는 그런 이들이 점점 늘어납니다. 올바른 정신으로 교회생활을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교회에 상처가 많다는 증거입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성장이 멈췄으며, 더 정확하게는 하락 추세에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실제로 신자들이 모이는 교회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안다면 아무리 실망할만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교회...
교회(3), 6월27일, 수
6월27일 교회(3) 주님, 지금 한국교회가 얼마나 역동적인지를 아시지요?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가 대부분은 한국에 있습니다. 동기가 어디 있든지 세계에서 한국교회만큼 자주 모이고 헌금을 많이 하는 교회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건강하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오늘 한국교회는 혼합주의의 한 전형을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여호와 하나님을 그럴듯하게 섬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에 의존적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는 사실을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
교회(2), 6월26일, 화 [1]
6월26일 교회(2) 주님, 교회의 역사가 자그마치 2천년이나 되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믿습니다. 주님, 지난 교회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일만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일도 많았습니다. 유대 종교권력과 로마 정치권력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교회가 자기 자신을 권력의 주체로 여긴 일들도 꽤나 많았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앞세워 폭력을 행사한 적도 없지 않습니다. 우...
교회(1), 6월25일, 월
6월25일 교회(1) 주님, 대한민국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드립니다.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가 어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만 오늘 한국교회는 저 바닥으로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더 이상 떨어질 데도 없을 듯한 지경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주님, 그 무엇보다도 교회의 단일성을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이 크게 부끄럽습니다. 우리는 지금 150개 이상의 교파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갈가리 찢겨 있습니다. 이런 교회 현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난 2천 동안 한 번도 없었던 ...
성령강림절후 제4주, 거룩한 두려움, 6월24일
6월24일 거룩한 두려움 주님, 배를 삼킬 듯한 풍랑이 ‘고요하라.’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잔잔해진 사건 앞에서 제자들은 크게 두려워했다고 합니다.(막 4:35-41) 거룩한 두려움!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이 흔들리면서 세상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는 세상을 너무 단조롭게 인식하고 경험합니다. 모든 것들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우리 모두의 신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수단으로 삼고, 자연을 수단으로 ...
영생, 6월23일, 토
6월23일 영생 주님,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진리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영생에 대한 희망을 안고 오늘도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주님, 그래도 궁금증은 지울 수 없습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원히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의 마지막이 있는 이 세상의 생명 형식에 굳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이 너무 짧기 때문에 좀더 오래 사는 것을, 이왕이면 영원하게 사는 것을 꿈꿀 수는 있습니다. 그런 꿈의 성취가 구원이라고 생각할 수...
하나님 경험, 6월22일, 금
6월22일 하나님 경험 주님, 저를 비롯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코끼리 피부에 붙어 있는 세균이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기에 우리는 너무 작고 하나님은 너무 크십니다.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코끼리 피부에 붙어 있는 세균이 아무 미미한 차원이라 하더라도 분명히 코끼리와 접촉하고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작고 하나님이 아무리 크셔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
하나님과의 일치, 6월21일, 목
6월21일 하나님과의 일치 주님, 저는 지금까지 수백 번, 수천 번 하나님과의 일치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글을 쓰고 설교하고 강의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것에 관한 질문이 저에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고, 더 나가서 어느 정도 경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와의 일치가 그 중 하나입니다. 거시세계로부터 미시세계까지 그 오묘한 메커니즘에 놀랍니다.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영과의 일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호흡하면서 살아갈 수 있고, 주변 세계와 어...
멍한 느낌이 드는 순간, 6월20일
6월20일 멍한 느낌이 드는 순간 주님, 저는 가끔 멍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제가 없어도 세상이 잘 돌아간다는 엄연한 사실이 저의 의식 세계 안에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에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백 년 전에 저는 세상에 없었고, 앞으로 짧은 세월이 흐르면 저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류 전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일 억 년 전에 지금과 같은 인류는 지구에 없었고, 앞으로 일 억 년 후에 인류가 존속하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도대체 인간으로 산다는 것, 특히 개인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6월19일, 화
6월19일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주님,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마 5:10)라니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워 꼼짝할 수 없습니다. 박해는커녕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한 탓이기도 하지만 불편한 것은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영성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안일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정의에 민감한 사람으로 살기 원합니다. 이를 위해서 삶에 대한 생각을 늘 새롭게 하기 원합니다. 우리 자신만 착하고 정직하게 사...
화평하게 하는 자, 6월18일, 월
6월18일 화평하게 하는 자 주님, 마틴 루터의 번역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5:9) 주님, 평화를 사랑한다는 말이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 평화는 소극적인 차원에서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차원에서 정의로운 평화를 가리키는 게 아니겠습니까? 너무 많이 가진 자와 너무 적게 가진 자가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 부의 재분배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유재산이 보장된 자유민주주의...
마음이 청결한 자, 6월17일, 주일
6월17일 마음이 청결한 자 주님, 마음이 청결한 자가(마 5:8) 어떤 사람입니까? 이 세상에서 어떻게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살 수 있겠습니까? 매일 기도하고, 성경 읽고, 하나님만 생각하고, 남을 섬기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주님, 안타깝게도, 아니 당연하게도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마음이 청결해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겉모양을 어느 정도 청결하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의 청결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노력은 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거룩한 일을 하면서도 세속적인...
긍휼히 여기는 자, 6월16일, 토
6월16일 긍휼히 여기는 자 주님, 우리는 평생 복음을 따라서 살려고 노력했지만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마 5:7)을 여전히 얻지 못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긍휼이 느는 게 아니라 고집만 늡니다.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십시오. 주님, 어떻게 긍휼히 여기며 살아갈 수 있는지 지혜를 주실 뿐만 아니라 능력도 허락해주십시오. 긍휼을 생각하기에는 세상살이가 너무 팍팍합니다. 모두가 경쟁을 위주로 살아가기에 긍휼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히 여기고 자비롭게 여길 수 있지만 실제로 그런 마음으로 살기는 쉽지 않습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6월15일, 금 [1]
6월15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주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저를 두렵게 합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의를 인식할 능력이 크게 떨어집니다. 제가 아무리 의로운 일이라 확신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의롭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의가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더라도 외면할 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라니, 두렵습니다. 주님,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도 역시 두렵습니다. 그 말은 육체가 배부르게 먹는다는 게 아니라 의로 만족하게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6월14일, 목 [1]
6월14일 나이를 먹는다는 것 주님, 우리는 늘 나이를 비교하면서 살아가는데 익숙합니다. 나이가 조금 더 들면 어른인 것처럼, 세상 이치를 더 아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런 행세를 부립니다. 나이가 젊은 사람을 무시하기도 하고, 또는 나이가 더 든 사람을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거꾸로 젊음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늙음을 측은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주님, 나이를 먹는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이가 더 들었다 해도 기껏해야 이십년, 오십년입니다. 나이가 더 젊었다 해도 기껏해야 이십년, 오십년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
온유한 자, 6월13일, 수
6월13일 온유한 자 주님,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주님의 축복 선언을 듣습니다. 이 세상의 경험으로는 그런 논리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온유하기보다는 악착같은 태도로 경쟁하고 버텨내야만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축복은 이 세상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에서나 해당되는 말씀입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에 희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몸을 담...
애통하는 자, 6월12일, 화
6월12일 애통하는 자 주님,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에 복이 있다는 말씀(마 5:4)을 우리는 자주 읽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자주 접했으면서도 여전히 그 말씀을 관념적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능력을 다 놓치고 맙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우리는 애통하는 삶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삶 자체가 우리를 실제로 힘들게 하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영혼까지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긴 터널과 같은 애통의 순간이 지나면 그 무엇으로 비교할 수 없는 위로가 하늘로부터 옵니다. ...
심령이 가난한 자, 6월11일, 월
6월11일 심령이 가난한 자 주님,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을, 천국이 그런 사람들의 것이라는 말씀을(마 5:3) 저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고 듣습니다. 또한 그 말씀으로 설교합니다. 그렇지만 그 말씀이 오늘날 교회 안에서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물질적으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부자가 되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이 오늘의 절대적인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런 시대정신을 완전히 거스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 반드시 이해가 되어야...
성령 모독의 죄, 6월10일, 주일
6월10일 성령 모독의 죄 주님,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다는 준엄한 말씀을(막 3:29) 듣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마음 속 깊이 불안합니다. 혹시 우리가 이런 죄를 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예루살렘의 서기관들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거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 행위를 근본적으로 모독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런 소문은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진리를 알아채지 못하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