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 첫날의 기도, 3월1일, 목 [2]
주님, 오늘은 삼월 첫날입니다. 금년 한해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많은 일을 한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이렇게 두 달이 훌쩍 흘러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나간 두 달만이 아니라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이 종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지난 세월이 아쉬워서 당신께 하소연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세월의 속도가 아무리 빨라도, 그 속도감에 간혹 주눅이 들긴 하지만 그 세월마저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데, 제가 어찌 세월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지금 삼월...
하나님의 섭리, 2월29일, 수 [1]
주님, 제가 아무리 애를 써도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목사가 되고 싶어서 목사가 된 것도 아니고, 현풍에서 십이 년, 하양에서 십오 년을 살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제가 제 인생에서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작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것도 제가 결정했다기보다는 떠밀려서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입니다. 아직 큰 병에 걸리거나 큰 사고를 만나거나 삶이 곤두박질치는 일은 없었으나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이 ...
새 하늘과 새 땅, 2월28일, 화 [1]
주님, 밧모섬에 유배당한 요한은 환상 가운데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합니다.(계 21:1) 그가 본 환상의 실체가 궁금합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처음 바다도 없어졌다고 합니다. ‘없어졌다.’는 게 무슨 뜻인지 궁금합니다. 왜 있다가 없어지며 없던 것이 왜 새로 나타나는 건지요. 도대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 사이에 어떤 궁극적인 차이가 있는 건지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않습니까. 산이 없거나 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산이 물이 되거나 물이 산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언젠가 그렇게 될 ...
인식의 확실성, 2월27일, 월 [1]
권능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오늘도 저는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상 안에서 이렇게 숨을 쉬며 무엇을 먹으며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어울리는 것은 단지 사람만이 아니라 세상 안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이기도 하고, 더 나가서 모든 사물들이기도 합니다. 태양과 달과 별, 산과 강과 나무와 돌과 먼지 모두 제가 어울려야 할 이 세상의 어떤 것들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아파트, 교회당, 다리, 자동차 그리고 제 방에 있는 컴퓨터, 프린터기, 책상 등등... 저에게 익숙한 이 모든 것들의 운명은 무엇인가요? ...
사순절 첫째 주일, -노아홍수- 2월26일, 주일 [1]
주님, 오늘 우리는 고대 유대인들을 통해서 전승된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척박한 땅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처참하게 파괴당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던 그 능욕의 시절에 까마득한 옛날, 모든 게 전설로만 남아있는 그 시절의 이야기 중에서 인류멸절이라는 대홍수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자신들의 운명이 대홍수로 떠내려가는 것과 같은 현실에서 그들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구원 약속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생명 사건에 대한 절대적인 긍정이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전적...
마라나타, 2월25일, 토
주님, 우리 신앙의 선배였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신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이 속히 다시 오시기를 희망합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이면서 새 세상의 시작인 그 수간에 우리가 부활생명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이해할 수 없는 모순과 부조리의 실체가 그 정체를 온전히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의 잠정성이 극복되어 참된 생명으로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주님의 오심에 대한 희망만...
키리에 엘레이손, 2월24일, 금
주님, 당신의 자비로우심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우리가 드릴 수 있는,그리고 드려야만 하는 유일한 기도는 바로 이것 한 가지 뿐입니다. 키리에 엘레이손! 우리가 처한 실존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궁핍한지 당신은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우리의 영혼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아무리 풍성한 한 끼를 먹어도 다음날이면 다시 배고픈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율법적으로 완벽한 상태에 이르러도 여전히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며, 아무리 호사스러운 것을 보아도 우리의 ...
목사의 자기구원, 2월23일, 목
주님, 구원이 무엇인지 여전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한답시고, 더 심하게는 영혼을 구원한답시고 저는 목사로 살고 있습니다. 구원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보지도 못한 채 구원을 선포해야 할 저의 운명은 거룩한 곤혹, 그 자체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일을 감당해야 하니 남은 세월 그 일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이의 영혼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 좀더 깊이 관심을 갖겠습니다. 남의 구원이 아니라 목사 자신의 구원에 온전히 천착하겠습니다. 목회와 설교와 글쓰기와 생각하기...
삭개오의 기도, 2월22일, 수 [2]
주님 저는 돈만 아는 수전노, 돈을 위해서라면 나라도 파는 매국노, 키가 작아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았던 세리 삭개오입니다. 제가 왜 이렇게 돈만 밝히는 사람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세상을 버텨낼 수 없다는 사실을 젊었을 때 너무 일찍 깨달아버린 것 같습니다. 돈이 쌓이면 쌓일수록 저의 영혼은 점점 더 궁핍해졌고, 사람들로부터의 냉대를 방어하기 위해서 마음의 벽을 높일수록 저의 영혼은 점점 더 경직되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인생이라는 게 별 거냐, 다 그러려니 하고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
바디매오의 기도, 2월21일, 화
주님, 저는 디매오의 아들, 눈 먼 거지 마디매오입니다. 장애에다가 돈도 없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설 수도 없고 나설 때마다 부끄러움을 주체할 길도 없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린 적도 없고, 대신 동정의 대상이나 놀림의 대상이 되었을 뿐입니다. 이제 한숨도 눈물로 다 말랐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죽음이 오히려 복이라는 생각을 수없이 했습니다. 하나님이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는지, 속히 거둬 가시라는 기도를 수없이 드렸습니다. 어느 날,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봄 날, 여리고 성 밖 길목에서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있...
사랑의 무능력, 2월20일, 월
주님, 저는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의 가족, 친구, 믿음의 동료, 제자들을, 그리고 저의 주변에 있는 모든 죽어가는 것들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사랑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사랑하지 못할 겁니다. 사랑하는 모양을 취할 수 있으나 실제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는데 어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에 무능력한 자가 어떻게 감히 사랑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
주현절후 일곱째주일 -침묵 명령-, 2월19일, 주일
주님, 저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처럼 예수님의 변모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까지 나타났다니 얼마나 황홀했을지 세 명의 제자들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매일 밥 먹고, 배설하고, 숨 쉬고, 글 읽고 쓰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낯익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마저 초월하는 변화산 경험이 오늘 저에게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곳에 초막 셋을 짓자고 제안하는 베드로의 심정을 이렇게 나이가 드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문득 둘러보니 모든 것은 사라지고 자기들만 남았습니다...
복 있는 자, 2월18일, 토 [1]
주님,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극단적으로 경쟁논리가 지배하는 오늘의 세상에서 가난은 저주라는 말과 똑같습니다. 어느 누가 저주를 복으로 알아듣겠습니까. 주님의 저 경구, 저 명령, 저 선포는 우리의 영혼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모든 뜻인지 알아듣기 힘듭니다. 주님께서 가난 자체를 미화하거나 가난한 자의 혁명적 기운을 말살하셨을 리는 없습니다. 이제 이 말씀의 새로운 빛이 비칩니다. 가난이 복이 되는 세상을 향해서 나가라는, 그런 세상을 기다리라는, 그런 세상을 위해서 투쟁하라는 명령으...
설교자(3), 2월17일, 금
주님, 오늘도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쳤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전달하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성경을 마주대했습니다. 제가 하나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인지 세월이 갈수록 확신이 떨어집니다.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은 늘고, 성경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은 많아지지만, 그것만으로 성경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려다가 결국 둘 다 웅덩이에 빠진다는 주님의 경고가 바로 저를 향한 것이라는 두려움이 저를 휩싸고 있습니다. ...
겸손, 2월16일, 목 [1]
주님, 세월이 갈수록 겸손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으니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평생 설교하고, 강의하고, 고담준론을 설파하고, 많은 책을 읽고 나름으로 베스트셀러 논객이 되었어도 겸손할 줄 모르니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엄정한 사실 앞에서 때로 절망하고 자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기 합리화인지 모르겠으나 사람에게 겸손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겸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주님, 그렇습니다. 겸손은 말이 아니라 능력이며, ...
커피집에서, 2월15일, 수 [2]
주님, 지금 저는 오랜만에 커피집에서 느긋하게 카푸치노를 한잔 마시고 있습니다. 큰 유리창 밖 어둠이 깔리는 길거리로 사람들과 차들이 각각 제 갈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일리’(ILLY) 커피집 안에서는 손님들이 들락거리며 각각 제 볼 일을 봅니다. 세 시간 전부터 샹송과 째즈가 번갈아가며 흐르고, 커피 가는 소리가 띄엄띄엄 반복되고, 원통의 천정 등에서 내려오는 불빛을 받으며 저는 이렇게 기도문을 쓰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사건들이, 또는 지금 여기서 제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현상들이 실재인...
레퀴엠, 2월14일, 화 [2]
주님,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사실보다 우리에게 더 엄중한 사실은 없습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무덤 속에서 만나는 절대어둠과 절대고독과 절대고요, 불길 속에서 당하는 완전한 해체, 이 세상 모든 것과의 영원한 결별... 이런 운명에 떨어진 죽은 이의 영혼은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해주십시오. 우리는 레퀴엠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죽은 자들만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자들에게도 레퀴엠이 여전히 필요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
호모 에렉투스, 2월12일, 월
주님, 지금 우리 인류에게는 2백만 년 전 처음으로 지구 위를 두 발로 섰던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극동 한반도까지 생존을 위해 용감하게 앞으로 나갔던 우리의 선조입니다. 몸을 안전하게 지탱해주던 네 발 걷기를 포기하고 중심잡기가 어려웠던 두 발 걷기를 선택한 그들이었습니다. 땅만 보다가 먼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하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늘을 보게 되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호모 에렉투스로 하여금 하늘을, 바...
주현절후 여섯째 주일 -수행으로서의 믿음생활, 2월12일 [1]
주님, 이렇게 오랫동안 믿음생활을 했는데도 저의 믿음은 생각처럼 진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나날이 새로워지고 매일의 삶이 영적으로 풍요로워져야 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책망을 받은 것처럼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았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하고 글을 쓰고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탐욕적이며, 여전히 권위적이고 위선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의 큰 잘못은 모른 채 하면서 남의 작은 잘못에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늘나라를 희망한다는 말은 곧잘 하면...
하나님의 미래, 2월11일, 토 [1]
주님, 우리가 지금 매달리고 있는 모든 욕망들이 완전하게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생명을 이루지 못한다는 준엄한 사실이 우리를 두렵게 하고 절망하게도 합니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과 함께 파멸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죽지 않고 영원히 생명을 연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생명완성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많은 것을 성취하면 곧 허무에 빠지고 성취하지 못하면 지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쪽으로 살아도 길이 보이지 않고 저쪽으로 살아도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