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길 건널목에서 [1]
오늘도 설교 준비하러 영천 원당 농가에 갔습니다. 영천에서 경주로 이어지는 4번국도에서 북안면 나들목을 빠지면서 터널을 통해 좌회전한 뒤 다시 좌회원과 우회전을 연달아 해야 합니다. 내비를 켜면 '분기점이 연속됩니다.'하는 멘트가 나옵니다. 우회전을 하면 기차길 건널목이 나옵니다. 그 기차길은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길입니다. 경주에서 위로가면 포항이고, 밑으로 가면 울산입니다. 빙 돌아가는 경부선 기찻길입니다. 간혹 내가 지나갈 때 기차와 마주칩니다. 오늘도 그랬습니다. 모양을 보니 새마을 호입니다. 저 건널목은 ...
대림절에 대해(10)
대림절 신앙은 생명완성과 연관된다고 앞에서 설명했소. 생명이 하나님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것이오. 이런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요. 거꾸로 생명이 곧 하나님이오. 여기서 생명은 단순히 디엔에이와 세포로 구성된 동물과 식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오. 우리 눈에 생명으로 보이는 것과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가리키오. 이는 곧 하나님만이 초월적인 존재라는 뜻이오. 그 초월자만이 창조주요. 초월이라는 말을 우리와 아무 상관없이, 저 위에 있는 어떤 상태라고 생...
대림절에 대해(9)
내 설명이 그대의 생각을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오. 그리스도교 신앙은 단순해서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신 설명은 너무 사변적이야.’ 하고 불평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오. 그리스도교 교리가 단순하다는 말은 한편으로는 옳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틀리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무조건 간단한 게 아니오.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게 자동차 운전처럼 기술을 익히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오. 초기 그리스도교 당시의 유대교와 로마의...
대림절에 대해(8)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앞으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충돌하오. 그러나 각각이 진리이며, 합해서도 진리라는 사실도 분명하오. 이러한 인식은 우리의 선입견을 넘어설 때 가능하다는 점을 앞에서 밝혔소.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해야겠소. 여기서 핵심은 재림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있소.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명의 완성을 기다렸다는 뜻이오. 예수의 초림으로 생명이 완성되지 않았소. 구원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이오. 은폐의 방식으로는 완성되었...
대림절에 대해(7)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도 분명하고,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사실도 분명하오. 이는 모순처럼 보이겠지만 영적인 시각으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제의 묵상에서 설명했소. 그 설명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을 것이오. 이 세상의 시공간에 길들여지면 성서의 새로운 세계가 이해되지 않소. 성서의 세계를 자기의 경험으로 재단하게 되오. 성서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일단 세상을 보는 선입견을 내려놓아야 하오. 선입견은 하루 이틀에 형성되지 않소. 오랜 세월에 걸쳐서 굳어지는 관점이오. 어제 다음...
어둠이 내릴 때 [1]
어제(12월2일) 설교준비하던 원당 농가에서 어둠이 내리는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잡았습니다. 작은 방에서 남쪽 편으로 난 창을 통해서 본 모습인데, 대나무와 두축나무로 된 숲입니다. 바로 앞은 금년에 실패한 텃밭이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부터 하루 중에서 이 순간이 제일 감미롭게 느꼈습니다. 옛날 같으면 초롱불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겠지요. 위에서부터 차례대로 대충 5분 간격으로 찍었습니다. 대충 저녁 5시10분부터 시작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 사진은 아직 밝지요? 아래 사진은 조금 달라집니다. 아래사진을 더 달라집니다...
대림절에 대해(6)
어제의 묵상을 기억해보시오. 예수님이 여기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서로 충돌하오.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런 갈등을 느끼지 않고 그 사실을 그대로 주장하고 있소. 그리스도교 교리는 이런 이율배반에 기초하고 있다는 말이오?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신학자가 된 것이오. 아직 오신 않은 주님이 이미 왔다는 모순, 거꾸로 이미 오신 주님이 앞으로 오실 거라는 모순을 넘어서려면 ‘이미’와 ‘아직 아님’의 긴장을 이해해야 하오. 이미(already)는 아직 아님(not yet)을 전제하오. 아직 아...
대림절에 대해(5) [1]
‘주님이 오신다.’는 말도 오해의 소지가 있긴 하오. 오신다면 지금은 다른 데 계시다는 뜻으로 들리오. 우주 공간 어디쯤으로 말이오. 은하계의 저 끝일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의 저 끝일지를 생각해보시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단락에서 당신이 아버지에게 가서 제자들이 있을 거처를 마련하면 다시 온다는 말씀을 하셨소. 사도신경에도 나오듯이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 하오. 그곳은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몇 광년 떨어진 곳이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
대림절에 대해(4)
승천과 재림을 주제로 하는 명화를 볼 수 있소. 실제로 예수님이 공중 부양의 모습으로 그려지오. 그림은 말이 전하지 못하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독자들을 착각하게도 만드오. 화가들도 실제로 공중 부양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그렇게 그린 것은 아니오.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오.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말이 어쩌면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소. 생명이면 그냥 생명이지 궁극적인 생명이 따로 있느냐고 묻고 싶소? 이걸 내가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소. 이는 ...
대림절에 대해(3)
예수 재림이 일어날 때의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시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 하오. 신약성서 시대에 구름과 승천은 어떤 궁극적인 사건을 설명하는 은유(메타포)였소. 오늘 그것을 사실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소. 성서읽기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소. 성서에는 많은 종류의 글쓰기 형태가 들어 있소. 역사, 시, 잠언, 묵시, 율법, 예언, 비유, 편지 등이오. 그리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 있소. 성서만이 아니라 텍스트로 ...
대림절에 대해(2)
대림절(待臨節, Advent)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주제로 하는 절기요. 성탄절인 12월25일 이전의 4번에 걸친 주일을 차례대로 대림절 첫 주일, 둘째 주일.... 이렇게 계산하오. 세계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첫 주일에는 초를 하나 켜고, 둘째 주일에는 두 개를 키오. 넷째 주일에는 물론 네 자루의 초를 키오. 초는 빛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키는 메타포요. 금년에는 성탄절이 주일과 겹쳤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오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소?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야를 가리키오. 예수가 메시...
대림절에 대해(1) [1]
오늘은 2011-2012년 대림절 첫째 주일이었소. 그대는 교회 절기에 대해서 알고 있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교회력에 대해서 관심이 없소.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게 맞는 말이오.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된 뒤에도 교회력은 나와 거리가 멀었소.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니었소. 중학생 때부터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교회력을 별로 접해보지 못했소. 기껏해야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만 지켰소. 그런 절기의 공통점은 헌금을 낸다는 것이오. 그러니 내 머리에는 교회력이 헌금 내는 날로만 ...
오직 믿음(14) [1]
우리는 마틴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을 신앙의 중요한 원리로 삼는 사람들이오. 이 문제를 그대는 훨씬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야만 하오.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신앙 선배들의 글을 읽어야 하오. 그것도 신앙적인 바탕이 탄탄한 선배들의 글을 읽어야 하오. 그렇지 않은 글들을 오히려 그대로 하여금 믿음을 왜곡하게 만들 것이오. 신앙의 왜곡이 한국교회에서는 흔하게 일어나오.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대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려면 그대를 ...
오직 믿음(13)
가능하다면 믿음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신비에 접하게 한다는 말을 화두로 삼아 보시오. 여기서 많은 대답을 들을 수 있소. 예를 들어, 신앙의 세계로 바르게 들어간 사람은 결코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소.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생각을 아예 할 수가 없소. 공격적인 선교를 하지 않소. 감히 누가 구원을 받았느니, 아니니 하고 말하지 못하오. 자기의 믿음을 절대화하지 않소. 왜냐하면 삶의 신비를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오. 오해가 없었으면 하오. 믿음이 깊어지면 자기의 신앙마저 상대화한다는 말이 아니오. 상...
오직 믿음(12)
다시 앞에서 처음에 인용한 보른캄의 말로 돌아가겠소. “믿음이라는 말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신비에 접하게 한다.” 가장 심오한 신비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시오?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오. 그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소. 개념화할 수도 없소. 그것은 가까이 갈수록 빛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어둡소. 한자로 현묘(玄妙)가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인지 모르겠소. 성서는 그 세계를 가리켜 영광이라고 말하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말 이외에는 전달할 방법이 없으니 일부분을 말로 설명해보겠소. 시간을 생...
오직 믿음(11) [2]
내가 영적 시각장애를 말한 이유는 우리의 인식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소. 신앙의 문제를 자기 확신으로 삼지 말라는 뜻이었소.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확신하려는 사람들이 있소. 불을 보았다거나 환상을 본 것으로 확신하오. 그런 믿음은 결국 자기 확신이오. 믿음 열광주의요. 겉으로 뜨거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신앙이 깊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취약하기 그지없소. 점점 자기 안으로 집착하오. 여러 면에서 퇴행적인 요소가 나타나오. 자기를 과신하거나 자기를 학대하오. 하나님과 거리가 멀수록...
오직 믿음(10) [1]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인 영적인 시각장애가 무언지 생각해보셨소? 이것을 심리적인 차원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또는 종교적 덕담으로 여기지도 마시오. 어떤 실체를 말하는 것이오. 지금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방식으로만 세상을 인식하고 있소. 나무가 있고, 시냇물이 있고, 구름이 있소. 그것이 각각 다르게 우리에게 인식되고 경험되오. 강아지에게 그것이 구별될 것 같소? 아니오. 그들에게는 구분이 안 되오. 물고에게 물이 인식될 것 같소? 아니오. 그들은 물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즉 물과 일치되어 있기 때문에 물을 대상...
오직 믿음(9)
앞에서 나는 보른캄의 설명을 몇 대목 인용했소. 그런 설명이 그대에게 확 와 닿는지 잘 모르겠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그대가 젊은이라면 모를 가능성이 크오. 내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그렇다는 뜻이오. 나도 나름으로 성실하게 교회에 다니고 학생회 임원도 하고, 결국 신학교를 나와서 목사가 되었소. 신학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이 뭐가 뭔지를 잘 몰랐소. 별로 뛰어난 신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을 단지 교회생활을 하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소. 조금 더 나가면 자신의 ...
오직 믿음(8)
오늘은 설명 없이 보른캄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만 하겠소. 무슨 뜻인지는 그대가 잘 알 거로 보고, 그래도 조금 생각해보기 바라오. 신앙과 행위는 분명히 동속(同屬)적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부적합한 신앙을 어떤 특별하고 뚜렷한 행위로 보충해야 하는 두 가지 다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이 행할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굴복하는 신앙 가운데 내포되어 있다. 신앙과 사랑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근원과 원천을 하나님의 사랑에 향한 신앙에 있...
오직 믿음(7) [1]
보른캄의 설명을 다시 들어보시오.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근본적인 복음주의 법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반대들이 되풀이 되었다. 결국 믿음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도 인간이 무엇인가 꼭 해야 한다고 요구하신다는 것과 인간은 선행을 행해야 하고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루터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면 당신은 신앙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신앙은 결코 그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이 아니다. 참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돌아서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