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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494주년(29)

  • Oct 27, 2011
  • Views 1588

유대교와 바리새주의를 따라가는 이 거짓 사도들은 대단한 명성과 권위를 지닌 자들이었다. 사람들 중에서도 이들은 거룩하고 선택받은 유대인에게 속한 자들로 자랑하였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였으며, 약속과 족장들이 저들에게 속했다고 자랑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이며 사도들의 문하생으로서 사도들을 개인적으로 아는 자들이며 사도들이 행한 기적들을 목격한 자들이라고 자랑하였다. 그들은 아마도 스스로 표적이나 기적을 행한 자들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시기를 악한 자...

종교개혁 494주년(28)

  • Oct 26, 2011
  • Views 1644

우리는 이 신앙의 교리, 혹은 기독교적 의를 항상 반복하고 경고하고 가르쳐야 한다. 계속해서 가르쳐서 그것이 이해되고, 율법의 능동적인 의로부터 정확하게 구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교리에 의해서만, 이 교리를 통해서만 교회가 건설되고 이 안에서만 교회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가 참된 신학을 관찰할 수도 없을 것이며, 쉽사리 법관들, 의식 수행자들, 율법주의자들, 교황주의자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는 심히 암울해져서 교회에서는 아무도 바르게 가르침을 받거나 위로를 받을 수 없을 ...

종교개혁 494주년(27)

  • Oct 25, 2011
  • Views 1632

오늘날 우리는 이 은총의 의에 관하여 아무 것도 올바로 가르치고 있지 못하며 가르칠 수도 없는 열광주의적 심령론자들과 분파주의자들에게서 이 사실을 본다. 그들은 다시 우리의 입에서 그리고 우리의 문서들에서 말을 가져간다. 그리고 그것을 입으로만 말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그들은 실질적인 내용에 관하여는 논의하지도 않으며 다루지도 않으며 주장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것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율법의 의에만 매달려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공로에 관한 규범을 지...

종교개혁 494주년(26)

  • Oct 24, 2011
  • Views 1647

그렇다면 이 의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나는 대답한다. “전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의는 아무 일도 행하지 않고,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율법이나 공로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오직 다음과 같은 사실만을 알고 믿는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에게 가셨다. 그리고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심판자로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에게서 오신 우리의 지혜, 의로움, 거룩함, 구속함이 되신다.(고전 1:30) 다시 말하면 은혜를 통하여 우리 위에...

종교개혁 494주년(25)

  • Oct 23, 2011
  • Views 1599

율법의 의는 땅의 것들과 관계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으로 우리는 선행을 한다. 그러나 땅은 먼저 물을 주고 위로부터 배려해주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땅은 하늘을 심판하거나 새롭게 하거나 다스릴 수 없다. 하늘이 땅을 심판하고 새롭게 하고 다스리고 열매 맺게 한다. 그래서 주님이 명하신 것을 행하려는 것이다. 또 율법의 의로는 우리가 많은 것을 했을 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 된다. 우리가 율법을 다 실천했을 때도 우리는 율법을 성취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의 공로나 공적 없이 우리는 기독교적 의로 먼저 의...

종교개혁 494주년(24)

  • Oct 22, 2011
  • Views 1523

이것이 우리의 신학이다. 능동과 수동, 이 두 가지 의 사이에 있는 정확한 구별을 우리는 이 신학으로 가르친다. 그리하여 도덕과 신앙, 공로와 은혜, 세속 사회와 종교가 혼돈되지 않도록 하였다. 둘은 다 필요하다. 그러나 각각 자기 한계 안에 머무르도록 하여야만 한다. 기독교의 의는 새 사람에게 적용된다. 그리고 율법의 의는 혈과 육으로 난 옛 사람에게 적용된다. 후자는 나귀에게 짐을 지우듯 그를 억제할 짐을 지워 두어야 한다. 그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기 전에는 영적인 자유 혹은 은혜의 자유를 즐기지 ...

종교개혁 494주년(23)

  • Oct 21, 2011
  • Views 1535

이같은 일에는 율법을 그 자체의 한계 안에 머물도록 조절하시는 지혜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이 요청된다. 왜냐하면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되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자신들이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상상하도록 가르치면, 나는 능동적인 의와 수동적인 의를 혼동하는 것이 되고 율법의 한계를 넘어 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합당한 구별을 할 줄 모르고 부족한 변증을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옛 사람 너머로 가면 율법 너머로 가게 된다. 왜냐하면 육체, 옛 사람, 율법, 공로는 모두 한데 묶여 있기 ...

종교개혁 494주년(22)

  • Oct 20, 2011
  • Views 1637

그러므로 고통 받고 있는 양심은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은총의 약속, 즉 이 믿음의 의, 이 수동적 의, 또는 기독교적 의 밖에서는 절망과 영원한 사망에서 고침을 받을 수 없다. 기독교적 의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능동적 의를 찾아 헤매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하고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설사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수행한다 해도 그것을 기초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이를 신뢰하거나 그 앞에 설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능동적 의, 내 모든 의, 또는 율법의 의 너머에 나 자신을 둔다....

종교개혁 494주년(21)

  • Oct 19, 2011
  • Views 2034

그러나 양심이 공포에 떨고 죽음으로 두려워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공적, 가치, 그리고 율법 외에 아무 것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곧 인간의 약함이요 비극이다. 율법이 우리의 죄를 보여줄 때 즉시 우리의 과거 생활이 우리 마음에 떠오른다. 그럴 때 죄인은 그 마음에 큰 괴로움을 안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나는 얼마나 저주스럽게 살았는가? 내가 좀더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내 생활을 고칠 수 있을 텐데!”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능동적 의, 즉 자기 의를 쳐다보는 일은 그만 두지 못한다. 수동적 의, 즉 기독교적 의에 그 눈...

종교개혁 494주년(20)

  • Oct 18, 2011
  • Views 2373

이것들 위에, 참으로 이 모든 것들 위에, 믿음의 의, 혹은 기독교적인 의가 있다. 이 의(義)는 다른 모든 의로부터 철저히, 그리고 주의 깊게 구별해야 하는 것이다. 외냐하면 위에 말한 의들은 이 의에 반대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황제의 법들, 교황의 법들, 그리고 계명들에게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며, 우리의 행위로 구성된 것들이며, 스콜라주의자들이 가르치듯이 ‘순전히 자연적 재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며, 은사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공로에 ...

종교개혁 494주년(19)

  • Oct 17, 2011
  • Views 1553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바울이 이 서신에서 당면 과제로 삼고 있는 논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논점은 이런 것이다. 즉 바울은 신앙, 은총, 죄사함, 또는 기독교적 의에 관한 교리를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로 기독교적 의와 다른 모든 종류의 의에 관한 온전한 지식을 가지게 하고, 그 다른 점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의들이 있다. 먼저 정치적인 의(義)가 있다. 이것은 세상의 황제들, 군주들, 철학자들, 그리고 법관들이 생각하는 의이다. 또 의식(儀式)적인 의가 있다. 인간의 전통, 예를 들면 교황의 전통들이...

종교개혁 494주년(18)

  • Oct 15, 2011
  • Views 2088

당분간 마틴 루터의 글을 그대로 인용하겠소. 내용은 <갈라디아서 강해>(김선회 역, 루터신학대학교 출판부)에 있는 것이오. 오늘은 그 책의 ‘강의를 시작하며’ 대목이고, 내일부터는 ‘갈라디아에 보낸 바울 서신의 논점’ 대목이오. 이 책은 2권으로 되어 있는데, 한 권이 670 여 쪽이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오. 루터는 1531년과 1535년에 갈라디아서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했소. 물론 그 이전에도 갈라디아서를 몇 번에 걸쳐서 강의한 바도 있소. 루터의 생생한 강의를 느껴보기 바라오.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갈라디아...

종교개혁 494주년(17)

  • Oct 15, 2011
  • Views 1665

로마가톨릭교회는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이지만 신학생 배출도 교구 차원에서 처리하오. 신학교를 키우기 위해서 신학생을 많이 뽑지도 않고 자격이 없는 학생들을 뽑지도 않소. 자신들의 수급 상황에 걸맞게 뽑아서 철저하게 훈련을 시키오. 수준 미달 신학생 문제는 개신교회에서 큰 문제요. 지방 신학교는 정원이 미달되는 경우가 꽤나 되오. 정원을 채우기 위해서 학력 수준이 턱없이 떨어지거나 신앙적인 준비가 안 된 학생들도 받아들이고 있소. 요즘은 고령자 선발이라는 제도가 있는 것 같소. 나이가 많이 든 분들이 수능 없이 들...

종교개혁 494주년(16)

  • Oct 13, 2011
  • Views 2249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신학교 문제를 좀더 말하겠소. 한국교회 문제는 신학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지금 신학교가 너무 많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소.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공급만 늘어났소. 앞으로 교인 수는 더 줄어들 텐데, 신학생 배출은 더 늘어나게 되어 있소. 어떻게 해야 하오? 일단 신학생 숫자를 줄여야 하오. 반쯤을 줄여도 괜찮소. 줄이지 못하는 이유가 매우 인간적이고, 세속적이오. 재정 축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요. 이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주장이겠소. 소위 하나님의 전문적인 일꾼을 ...

종교개혁 494주년(15)

  • Oct 12, 2011
  • Views 1559

신학적 성경공부라는 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소. 신학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지 평신도는 은혜를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이오. 큰 착각이오. 목사가 되려면 물론 신학의 전문가가 되어야 하오. 모든 신학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의 신학교에 신학이 사실상 없소. 신학적 사유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오. 신학교를 졸업해도 평신도와 다를 게 없소. 단지 성경의 정보를 좀더 안다는 것 말고는 없소. 신학 능력보다는 은혜가 많아야 한다는 선입견이 한국교회 전체를 압도하고 있어서 이런 불행한 일이 벌어지...

종교개혁 494주년(14)

  • Oct 11, 2011
  • Views 1650

루터는 원래 종교개혁을 의도한 게 아니었소. 그는 성당의 사제요, 신학교 교수였소. 미사를 집전하고 신학생들을 가르쳤을 뿐이오. 그의 눈에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이 뜨이게 된 동기는 성경연구였소.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니까 로마가톨릭의 오류가 무엇인지 눈에 들어온 것이오.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가장 바른 길은 성경에 대한 바른 공부요. 성경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아는 공부 말이오. 그것은 신학적 사유가 아니면 안 되오. 성경은 어떤 점에서 닫힌 책이오. 그 안으로 들어가려면 ...

종교개혁 494주년(13)

  • Oct 10, 2011
  • Views 1741

넷째는 거룩성이오. 교회는 거룩을 본질로 하오. 거룩은 구별된다는 뜻이오. 이것을 교회의 권위로 생각하면 오산이오. 거룩은 외적인 권위가 아니라 내적인 권위요. 내적으로 거룩성을 담보해야 하오. 교회가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경쟁하면서 거룩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소. 교회의 빈익빈부익부 현상을 나 몰라라 하는 교회를 거룩한 공동체라고 말할 수 없소. 도대체 오늘 한국교회의 거룩한 모습은 무엇이오? 예배가 거룩하오?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거룩하오? 목사와 장로의 다툼을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으...

종교개혁 494주년(12) [1]

  • Oct 09, 2011
  • Views 1572

종교개혁 494주년(12) 셋째는 보편성이오. 보편성이라는 말은 개별 교회만이 아니라 개별 교회가 구성원으로 활동하는 큰 모임이 교회라는 뜻이오.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노회라고 부르는 조직을 가리키오. 더 넓혀서 총회라고 볼 수도 있소. 노회나 총회가 교회라는 뜻이오. 이 보편성이 중요한 이유는 개교회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데에 있소. 예컨대 노회를 교회라고 한다면 노회에 속한 모든 개별 교회의 문제를 다른 모든 교회의 문제로 담아낼 수 있소. 개별 교회에 있는 각각의 조직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교회 전체의 ...

종교개혁 494주년(11)

  • Oct 08, 2011
  • Views 1606

둘째는 사도성이오. 교회는 본질적으로 사도에 의해서 성립된다는 뜻이오. 예수님은 교회를 직접 설립하지 않으셨고, 사도들에게 그걸 명령하지도 않으셨소. 교회는 순전히 사도들에 의해서 역사에 등장하게 된 것이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대한 모든 내용은 사도들에 의해서만 우리에게 전승되었다는 사실이오. 아무도 예수님을 직접 만날 수는 없소. 아무도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직접 경험할 수는 없소. 모든 것은 사도들을 통해서만 가능하오. 오늘 거의 모든 교회는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오. ...

종교개혁 494주년(10)

  • Oct 07, 2011
  • Views 1668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거쳐 자리를 잡은 교회의 본질적 속성은 네 가지요. 첫째는 ‘단일성’이오.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뜻이오. 서울에 있는 영락교회가 하양에 있는 중앙교회나 하나요. 더 나가서 가톨릭교회나 개신교회나 하나요. 지금 이 단일성이 큰 위기에 처했소. 말은 하나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가 되지 못했소. 오히려 경쟁 논리 가운데서 갈가리 찢겨지고 있소. 대형 아파트 단지에 있는 상가에는 경우에 따라서 교회가 몇 개씩 들어서는 일이 있소. 그들은 신자들을 서로 모으려고 온갖 이벤트를 다 벌이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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