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9)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가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오. 이사야의 성전, 모세의 시내 산을 생각해보시오. 하나님의 영광은 스랍들의 찬양이고, 불붙은 가시떨기이고, 빽빽한 구름이오. 구약의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소. 메타포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오. 이 문제는 내일 말하겠소.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고, 메타포로만 말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오. 부정을 통한 긍정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
예배(8)
영광은 히브리어로 ‘카봇’이고 헬라어로 ‘독사’라 하오. 이 단어를 일일이 따져들며 조사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오. 성서 시대의 사람들이 왜 영광이라는 개념을 생각했는지 여러 관점으로 조사해야 하오. 예컨대 모세는 시내 산에서 율법 문제가 정리된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 했소. 하나님을 보고 싶다 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싶다고 했소. 그 말이 그 말이긴 하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었소. 너무나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소. 그래서 영광이라는 단어를 생...
예배(7)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 무슨 뜻이라 생각하오? 우리는 그런 표현을 흔하게 쓰오. 열린 예배, 또는 경배와 찬양 유의 모임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멘트를 자주 날리오.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오? 어떻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이오? 이런 문제는 하나님 표상과 연결되오.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이 말이 달라진다는 뜻이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만 놓고는 그게 영광을 돌리는 건지, 아니면 영광을 가리는 건지 알 수 없소. 겉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생각하는...
예배(6)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최선의 종교의식이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오. 어떤 이들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예배드리러 간다고 말하오. 그건 틀린 말이오. 예배는 은혜가 중심이 아니오. 영광을 돌리는 게 우선이오. 은혜는 그 다음이오. 오늘 한국교회 신자들은 은혜를 받으려고 너무 애를 쓰오. 경쟁하듯이 은혜를 받으려고 하오. 그래서 예배도 경쟁하듯이 드리오. 그렇게 은혜를 경험할 수 있겠소? 예배를 통해서 은혜가 임하는 것은 분명하오. 그런 은혜의 경험이 없이 어찌 예배의 영성이 가능하겠소. 그럼에도 불구...
예배(5)
매 순간을 예배드리듯이 사는 건 어떻소? 밥을 먹을 때도, 글을 쓸 때도, 숨을 쉴 때도, 심지어 똥을 눌 때도 예배드리듯이 하는 거 말이오. 이런 말은 흔해 빠졌소. 자기가 지구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말을 하오. 흔해 빠진 말이라 해도 그걸 새롭게 느끼기만 하면 되오. 모든 삶의 순간에 궁극적인 생명을 찬양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오. 여기서 궁극적인 생명을 찬양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오? 이런 말이 영적인 힘을 얻어야 할 텐데, 자칫하면 죽은 말이 되고 마오. 그걸 어떻게 살려...
예배(4)
지금 예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아주 짧은 글을 쓰고 있소. 예배를 이렇게 짧은 글로 다 설명할 수는 없소. 책 한권으로도 부족하오. 그렇지만 우리 형편 상 어쩔 수 없소. 나는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24시간, 일주일 전체, 일년 전체를 예배로 채우고 싶소. 그럴 정도로 내 영혼이 투명하지 못해서 엄두를 내지는 못하지만 중심으로는 그런 생각이 많소.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오. 나는 예배 열광주의자가 아니오. 내가 시무하는 교회에는 예배가 일주일에 딱 한 번이오. 그것으로 충분하...
예배(3) [1]
예배를 등한하게 여기는 이유는 예배를 드리나 드리지 않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오. 이런 생각도 예배를 드리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틀렸소. 양자 모두 예배를 실용적인 어떤 행위로 생각하오. 예배를 아무리 자주 드려도 복을 받는 건 아니오. 하나님과 복은 별로 상관이 없소. 성경에 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지만 그것은 지금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오.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생각는 아주 단편적인 것이오. 예배를 통해서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당장 얻는 것은 아니지만 전...
예배(2)
지금처럼 바쁜 세상에서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소. 특히 지성인들에게 그런 생각이 강하오. 그것은 세속화의 결과요. 유럽과 미국은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시절을 겪었소. 명분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자지만 예배에는 참석하지 않소. 참석하더라도 뜸하게 참석하오. 어떤 이들은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만 참석하오. 그들은 주일에도 공부하거나 돈 벌거나 취미 생활을 하거나 가족과 여행을 다니오. 삶을 즐기는 것이오. 한국교회에도 그런 경향이 밀려들고 있소. 앞으로 머지않아 예배 참석률이 뚝...
예배(1)
그대는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소? 그렇지 않다면 속히 예배에 참여하도록 하시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예배 공동체’라오. 그것을 부정하면 모든 것이 해체되오. 봉사도, 친교도, 신학도, 그리고 더 나가서 삶도 그렇소. 왜 그런지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대가 잘 알 거라 믿소. 예배는 말 그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종교 의식이오.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상투적인 것으로 듣지 마시오. 그것은 궁극적인 생명과 관계가 있소. 우리 운명과도 직결되오. 그대가 생명을 얻었다면, 그리고 그것을 희망한다면 예배를 등한...
낮은 자리 [1]
그대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시오? 낮은 자리, 십자가, 어린아이, 자기 부정 ...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경구를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소. 실제로는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추구하오.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높은 자리를 찾소. 거기서 자기 삶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잊지 마시오. 인사 받는 자리는 불편하오. 거기에 습관이 들면 인사 받지 못하는 삶을 불행하게 생각하게 되오. 그것이 바로 생명으로부터의 소외라오. 설령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가도 늘 인사를 받을 수는 없소...
오지 선교 [4]
오지 선교를 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셨소? 그분들은 원주민들이 사는 마을에 가기 위해서 며칠을 고생하기도 한다오. 돈을 주고 그렇게 하라면 못하겠지만, 오직 복음을 전한다는 사명 하나로 그렇게 견디오. 재미있는 나의 오지 선교 이야기를 하니 들어보시오. 어제 서울샘터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집까지 오는 과정이오. 서울 여성플라자에서 모든 모임이 마친 시간이 저녁 7시 25분이오. 대방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4정거장만에 서울역에 도착했소. 저녁 8시 출발 KTX를 탔소. 자리에 앉아 성찬식을 하고 남은 모닝 빵을 ...
신학개론 [5]
나는 가을학기에 신대원 <기독교 해석학> 외에 학부 1년을 대상으로 <신학개론>을 강의하오. 그대가 신학생이라면, 또는 젊은 목사라면, 또는 평신도 지성인이라고 한다면 이 과목을 꼭 들으라고 권하고 싶소. 이 과목은 말 그대로 신학의 길로 안내하는 것(introduction)이오. 신학의 기초라 할 수 있소. 무엇이든지 기초가 중요하오. 테니스도 기초가 잘 되어 있지 못하면 아무리 구력이 오래 되어도 실력이 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문제가 생기오. 신학과 신앙에서도 기초가 중요하오. 어떤 기초를 닦았는가에 대해서 그 뒤의 모...
해석이 문제다 [3]
어제 법과 성서나 모두 해석이 중요하다고 말했소. 나는 이번 가을학기에 영남신대원에서 <기독교 해석학>을 가르치오. 신학과 설교는 기본적으로 해석의 문제라는 것을, 그리고 해석이 진리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신대원생들에게 말하려고 하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해석이 없다는 것이오. 성서를 문자적으로 맹신할 뿐이오. 강해설교라는 말이 있긴 한데, 그것은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낱말풀이에 불과하오. 말하자면 노자의 <도덕경>을 단지 한자풀이만 하는 것과 비슷하오. 해석은 그 텍스트 안에 어떤 고유한 세계가 있다는 것...
법과 성서
법을 뭐라 생각하시오? 내가 신학대학교 저학년 다니던 시절 같은 대학부에 있던 선배가 이렇게 말했소. 법은 이현령비현령이라고 말이오. 법대 다니던 선배였소. 좀 냉소적인 말이지만 일리가 있소. 법이 인간 문제의 정답은 결코 아니오. 법으로 담아내기에는 인간 삶이 너무 오묘하기 때문이오. 성서를 뭐라 생각하시오? 같은 성서를 읽으면서도 생각이 극과 극으로 갈릴 때가 많소. 문자로 된 법도 그렇고 성서도 그렇고 그것이 직접적으로 삶을 규정할 수 없소. 법이나 성서나 모두 해석이 중요하오. 법을 잘못 해석하면 유신헌법으...
세월 [2]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귀가 따갑게 들어서 별로 실감이 나지 않소.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소. 세월의 속도에 대한 느낌은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주관적이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의 속도를 더 빠르게 느끼는 이유는 지나간 세월이 많기 때문이오. 세월은 지나간 것만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소. 별로 세상을 많이 살지 않은 사람은 그게 느껴지지 않소. 물론 영적으로 철이 일찍 든 사람은 젊어서도 그걸 느끼오. 앞으로 살아갈 세월이 많이 남았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별로 남은 게 없다고 아쉬워할 것도 없소. 모두 비슷한 분량...
초승달 [3]
오늘 저녁 7시10분에서 30분까지 영천에서 하양까지 국도를 타고 왔소. 황혼이 지는 시간은 늘 정답소. 멀리 팔공산 너머 노을 진 하늘이 아름다웠소. 그곳에 초승달이 예쁘게 걸쳐 있었소. 검은 산, 주홍빛 하늘, 은빛의 초승달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았소. 평생 저런 장면을 몇 번이나 볼는지. 오늘이 음력으로 8월3일이니 앞으로 며칠 동안 초승달을 볼 수 있을 거요. 내일 날이 맑으면 저녁 7시 쯤에 꼭 서쪽 하늘을 쳐다보시오.
밤이다
다시 밤이 왔소. 지구에 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소. 밤이 없다면 얼마나 삭막할지, 끔찍하오. 도시는 밤을 점점 잊고 있소. 밤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 같소. 모든 곳에 불을 밝히고, 밤새워 공장을 돌리기도 하오. 서울의 특징은 늦은 밤에도 청소년들이 돌아다닌다는 것이오. 불행한 일이오. 전기를 아예 없애는 게 좋겠소. 어두워지면 자든지, 아니면 호롱불이나 켜놓고 책을 보거나 바느질을 하는 정도면 좋겠소. 우리는 곧 영원한 밤을 맞이하게 되오. 물론 성서적으로 죽음을 영원한 빛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조급증
현대인들의 삶이 얼마나 조급한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으리라 보오. 이 시대 자체가 그걸 강요하오. 개인들이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잘 되지 않소. 그 모든 조급증은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기인하오. 조급하게 살면서 아무리 많은 걸 이룬다고 하더라도 죽음의 문은 피할 수 없소. 그렇게 살아갈수록 죽음의 문까지 이르는 시간은 더 빨리 흐를 것이고, 죽음의 문 앞에 이르면 많이 이룬 것들이 얼마나 불편한가를 깨닫게 될 것이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소. 많이 이루었다는 그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이오. 하나님의 창...
밤바람
오늘 밤에 잠깐 밖에 나갈 일이 있었소. 온몸을 휘감는 밤바람이 얼마나 시원한지 말로 표현하기 힘드오. 수련회 동안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소. 구약시대 사람들이 영과 바람을 ‘루아흐’라는 하나의 단어로 부른 이유를 알만 하오. 이런 바람은 영이 틀림없소. 왜냐하면 나의 몸만이 아니라 영혼 전체를 생생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오. 여름이 가고 있으니 곧 가을바람이 불어 올 것이오. 그 순간을 기대하시오. 바람만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오. 그대의 영혼이 가을바람과 함께 풍요로워지기를 바라겠소.
세상이 거기 있다니!
창조와 종말은 모두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오. 저기 저렇게 세상이 있소. 놀라운 일이오. 나무가 있고, 강이 있고, 바위가 있소. 태양도 있고, 별도 있소. 그게 우리 앞에 있는 건지, 우리 뒤에 있는 건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건지 피조물인 우리는 잘 모르오. 밥도 있고, 술도 있소. 사람도 있고 고양이도 있소. 갖가지 것들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소. 그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이오? 그대는 알고 있소? 궁금하지도 않소? 하기야 아무리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게 세상이오.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