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 벗은 구원 이야기>
가천노라 하는 목사님이 <가면 벗은 구원 이야기>(이하 ‘구원’)라는 책을 대장간에서 내셨소. 작년 8월이오. 출간 즉시 나에게 한 권 보내시고, 간단하게라도 평을 해달라고 하셨소. 책을 평하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래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책을 손에 들었소. 가 목사님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게 없소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오. 대장간은 아주 오래 전 졸저 <믿음으로 본 세상>을 내 출판사요. 개혁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서적을 내는 출판사요. 일단 ‘구원’을 쓰신 가 목사님은 공부를 깊게 하신 분 같소. 인용한 책이나 참고도...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9) [3]
복음주의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한 내용과 완벽한 형태로 듣고, 이해하며,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에 관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을 입으셨다는 점에서 특수하지만 모든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이스라엘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구주이시다.(43) 신학의 과제를 바르트는 위에서 짧지만 정확한 문장으로 진술했소. 신학의 과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의 계약과 평화의 계약이라는 관점에서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해하고 진술하는 ...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8) [2]
신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혹은 뒤집어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안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셨고, 말씀하고 계시며, 말씀하실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이스라엘에서 출발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내용의 선포로서 이 특수성의 제약을 갖는 보편성이다. 이 복음이라는 하나님에 의해서 체결되었고 지탱되었으며 수행되었고 완성된 은총의 계약, 평화의 계약,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우정에 넘치는 교제에 대한 하나님의 좋으신 말...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7) [1]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 속에 돌입해 오셔서 (수용하든 않든) 모든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며, 말씀하실 말씀이다. 이 말씀은 인간을 향한, 인간을 위한,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하나님의 행위는 침묵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 말씀하시는 행위이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그가 행하시는 바를 행하실 수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행동을 통하여 그가 말씀하시는 바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행위가 -그 시발점으로부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이 다양하기는 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것이 아니라 단순...
바르트 신학 이야기(6) [5]
여기서 의미하는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는 저 말씀에 대한 대답으로서 무엇보다도 말씀의 창조행위에 의해서 촉발되며, 실존하고, 현실적이 된다. 이 말씀의 선행이 없이는 본래의 신학, 곧 복음주의 신학이 있을 없다. 물론 신학이 저 말씀을 실제로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다. 신학은 저 말씀의 증인들의 말들을 해석하고, 해명하며, 이해시킨다. 말씀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해석조차 하는 것이 아니다. 저 말씀은 모든 해석에 선행하여 말씀되었고, 수용된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선포되었다. 신학이란 위의 사실을 전제...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5) [8]
신학은 말씀에 대한 수용이자 응답이기 때문에 신학은 겸손하며 자유로운 학문이다. 첫째로 신학은 겸손하다. 왜냐하면 신학의 모든 논리는 말씀에 대한 인간적인 유비(Analogie)에 불과하며 신학의 모든 빛은 인간적인 반사요, 신학의 모든 소산은 인간적인 재생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신학하는 것은 그 어떤 창조의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자와 그것의 창조에 대해서 가능한 성실하게 응답하는 찬송이다. 둘째로 신학은 자유하다. 왜냐하면 신학은 말씀에 의하여 그와 같은 유비, 반성적 숙고 및 재생산, 짧게 말...
홍성사에 들린 이야기 [14]
지난 1월17일에 졸저 “설교란 무엇인가”를 출판한 홍성사에 들렸었소. 그대도 기독교 출판사인 홍성사를 알고 있을 거요. 이재철 목사님이 설립하셨는데, 목회의 길로 접어든 뒤로는 부인인 정애주 씨가 운영하고 있소. 작년 4월에 새로운 장소로 옮겨온 것이라 하오. 반 지하 포함해서 3층 건물이었던 것 같소. 주변 환경을 돌아볼 틈이 없이 건물 안으로 그냥 들어갔기 때문에 자세한 구조는 잘 모르겠소. 나는 사장님 집무실이 당연히 햇빛이 잘 드는 1층일 거로 생각하고 올라갔는데 그게 아니었소. 직원이 나를 반 지하로 안내해주었...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4) [1]
신학(Theologie)이란 단어는 ‘로고스’라는 단어를 포함한다. 신학은 무엇보다 하나님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고 확정된 ‘말들’(Logia)이요, ‘논리’(Logik)요, ‘논리체계’(Logistik)이다. ‘로고스’는 일단 ‘말씀’(Wort)으로 보아야 한다. 비록 괴테의 파우스트는 이 말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 말씀이 신학의 자리를 규정하는 요소들 가운데 첫 번째이기는 하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신학 그 자체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의 반응이다. 그러나 신학을 신학답게 하는 것은 이 신학이 듣고 응답해야 할 말씀이지 이 말씀에 ...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
여기서 이해되어야 할 신학의 ‘자리’는 자기내부로부터 제시된 출발점을 말하며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연유하는 출발점이다. 신학은 이 출발점으로부터 성경신학, 역사신학, 조직신학 및 실천신학으로 나가야 한다. 이는 신학이 반드시 걸어야 할 길이다. 군대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신학자가 지켜야 할 초소이다. 신학자는 언제 어떻게 되더라도 대학에서든 지하(카타콤)에서든 이 초소를 반드시 고수해야 한다.(36) 바르트 신학을 가리켜 ‘말씀의 신학’이라고 하오. 신학의 중심을 인간과 문화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옮겨 ...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2) [4] [1]
복음주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이 은혜의 ‘yes’에 대한 응답의 노고요, 인간을 향하신 그의 우정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의 노고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관계한다. 복음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결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니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에로 확정된 존재이다. 만약 ‘신학’이라는 말이 그의 대상이 지니는 이 결정적인 차원, 즉 자유롭게 반응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 감사(euchari...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1) [9]
그대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을 거요. 그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정말 할 말이 많소. 그걸 이 자리에서 풀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아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것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테니 말이오. 나는 당분간 바르트가 말년에 쓴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e Theologie>에서 눈에 뜨이는 구절을 차례대로 그대에게 들려줄 생각이오. 이 책은 이형기 선생을 통해서 번역되었소. <복음주의 신학입문>(크리스찬 다이제스트)이라는 제목이오. 이 제목은 적절치 않소. 우리나라에서 ...
일상에 대해(10) -설거지- [4]
그대는 설거지를 종종 하시오? 나는 종종 하오. 집사람이 두 번 하면, 나는 한 번 정도 하오. 몇 년 전에는 세척기로 할 때가 많았소. 싱크대에 붙박이로 달려 있는 세척기였소. 그릇이 많을 때는 그게 편리하지만 그릇이 적을 때는 오히려 불편하오. 주로 접시를 사용하는 서양은 모르지만 국그릇과 밥그릇이 많은 우리에게는 식기세척기가 한계가 있는 것 같소. 지금은 순전히 손으로 하고 있소. 1983년에 처음 독일로 유학을 갔을 때의 기억이 나오. 그쪽 친구들이 설거지하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소. 그들은 싱크대 안에 물을...
일상에 대해(9) -씻기- [2]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씻기는 일상이 되었소. 매일 샤워나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소. 먼지가 많은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매일 씻지 않을 수 없소. 광부나 미화원, 또는 자동차 수리공, 행상 같은 분들이 그렇소. 하루 종일 땀을 흘리거나 먼지를 뒤집어썼을 테니 당연히 씻는 게 좋소. 옛날에는 씻고 싶어도 환경이 받쳐주지 않았소. 거의 모든 집에는 샤워나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었소. 여름철은 우물가에서 물을 끼얹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겨울철은 겨우 얼굴과 손, 발을 씻는데 급급했소. 나는 ...
일상에 대해(8) -손톱 깎기- [11]
늦둥이 막내딸은 지금 대학교 1학년이오. 한창 세상 물정을 배울 나이요. 가능한대로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도록 맡겨두고 있소. 학기 중에는 격주로, 방학 중에는 매주 금요일에 집에 왔다가 주일 오후에 다시 학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오. 언제부터인가 그 아이가 손톱을 기르고 있소. 손톱에 여러 가지 색깔을 칠하오. 매니큐어를 바르는가 보오. 학생이 손톱 치장을 뭐하러 하니, 하고 물으면 멋있잖아요, 하고 대답하오. 그게 멋있는지는 나는 잘 모르겠는데,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큰 딸은 그런 일이 없...
일상에 대해(7) -병-
그대는 크게 아픈 적이 있었소? 감기 몸살 뭐 이런 거 말고 위기를 느낄 정도로 아픈 거 말이오. 이런 병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잘 모를 거요. 나도 그렇게 아픈 적이 없어서 깊이 있게 말할 입장은 아니오. 병은 대개 유전적인 요인이 크다 하오. 이런 거로만 보면 나는 운이 좋은 게 아니오. 어머님은 40세에 뇌암으로 돌아가셨고(어머님 나이), 아버님은 70세에 강으로 물놀이 가셨다가 심장경색이 와서 돌아가셨소. 내가 7,8년 전 건강검진을 받을 때 심장의 한쪽 부분에서 전파 장애가 보인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소. 심전도 검...
일상에 대해(6) -먹기- [1]
우리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기요. 우리가 살아 있으려면 무언가를 먹어야 하오. 먹지 않고도 살아갈 방법이 있겠소? 영양주사를 맞으면 상당 기간은 버텨낼 수 있을 거요. 그러나 그게 계속될 수는 없소. 입으로 먹고 위에서 소화시킨 뒤 작은창자와 큰창자를 통해서 영양을 흡수한 뒤에 찌꺼기를 항문으로 배출하는 방식으로 우리는 살고 있소. 요즘은 위 내시경 검사와 대장 내시경 검사가 건강검진에서 거의 필수 코스가 되고 있소. 먹고 소화시키고 배설하는 문제가 우리의 건강에 결정적인 것이라는 뜻인가 보오. 우리의...
일상에 대해(5) -걷기- [7]
이 세상에서 두 발로 걷는 동물은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의 후손인 인간밖에 없소. 침팬지, 고릴라, 원숭이 등은 그저 잠시 흉내만 낼 뿐이오. 사람은 태어나서 보통 한 돌이 되면서 걷기 능력이 생기오. 한 사람의 행동 발달에서 이 순간보다 더 소중한 순간은 없을 거요. 세상을 밑에서만 보다가 위에서 보게 되는 순간이니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소. 현대인은 걷기를 귀찮아하오. 웬만하면 차를 타고 다니오. 옛날에는 아이들도 주로 걸어서 학교에 다녔소. 시골에서는 하루에 한 두 시간을 걷는 건 예사였소. 지금은 짧은 거...
일상에 대해(4) -숨쉬기- [3]
우리가 죽지 않는 한 대충 5초에 한번은 숨을 쉬오. 숨을 쉬지 않고도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면 편하지 않겠소? 태아들은 숨을 쉬지 않고 사오. 탯줄을 통해서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오. 원리로만 본다면 숨을 쉬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길이 있소. 깨끗한 피를 공급해주기만 하면 되오. 우리가 숨을 쉬는 이유는 피에 산소를 공급하려는 것이오. 앞으로 언젠가 과학 기술이 크게 발달해서 약 한 알로 일주일 동안 몸 안의 피에 산소 공급이 이뤄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오. 숨은 입과 허파로만 쉬는 건 아니오. 우리의 피부가 숨을 ...
일상에 대해(3) -보기와 듣기- [2]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보고 듣소.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들은 예외요.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인식하오. 우리 비장애인들은 보고 듣는 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별 것이 아닐 수도 있소. 보고 듣는 것이 제한적인지는 여기서 설명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명백한 사실이오. 오히려 거꾸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소.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기 때문에 더 근원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소. 우리의 시각과 청각은 철저하게 상대적인 감각 기능이오. 상대적이라 하더라도 보고 듣는 행위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일상에 대해(2) -돈- [5]
그대는 돈에 대한 어제의 내 글이 안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소.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는 소리라고 말이오. 거꾸로 돈의 맛이 얼마나 달콤한지 모르는 소리라고 말이오. 다는 모르지만 대충은 알고 있소. 교회도 돈이 없으면 할 일을 못하는 마당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소. 대구성서아카데미도 재정이 뒷받침되면 사무실과 상근 일꾼을 둘 수도 있고, 샘터교회도 규모 있게 예배와 각종 모임이 가능한 공간 마련도 가능하오. 가난한 아카데미, 가난한 샘터교회이니 옹색한 살림살이를 피할 수 없소. 그래도 아쉬울 것도 없고, 미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