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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가 뭐꼬? [8]

  • Jun 1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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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컴퓨터 책상 뒤쪽의 책장에 몇 장의 씨디가 눈에 띄오. 씨디 재킷에 먼지가 뽀얗게 앉았소. 아마 몇 개월은 손도 대지 않은 것 같소. 거기만이 아니오. 그대가 깔끔한 성격이라면 내 서재를 보고 기절을 할지 모르겠구려. 곳곳이 먼지요. 서재 청소는 대개 책상 위의 물건을 정리하고 진공청소기로 방바닥 먼지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이오. 두 주에 한번은 물걸레로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복사기 등을 닦소. 책장은 거의 손을 못 대오. 그러니 구석구석의 먼지가 남아 있을 수밖에 없소. 평소에 내 눈에는 먼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헨리 나우엔의 기도문 [1]

  • Jun 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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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대에게 헨리 나우엔의 기도를 전하오. 오늘 수요성경공부 시간에 참석자들과 함께 읽었소. 나는 언제나 내 영혼의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아직도 상투적인 기도밖에는 드리지 못하오. 죽기 전에 365일 기도문을 쓰는 게 꿈이오. 그 꿈이 이뤄질지 아직 자신이 없소이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구려.(2010년 6월16일, 수요일, 장마를 앞두고 무더위) 오 주님, 나의 하나님이요 내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여, 계속하여 구하오니 제게 변화의 은혜를 주소서. 제게 주님의 자비를 보이시고 제 마음 ...

‘시간’이 뭐꼬? [4]

  • Jun 15, 2010
  • Views 3023

지금 내 책상 위에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소. 그중의 하나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하나님 이야기>요. 정가가 700원이고, 발행연월일이 1973년 12월5일이오. 내가 만으로 스물한 살을 바로 앞에 둔 때요. 한창 감수성이 예민할 신학생 시절이었소. 저 책을 사들고 책상 앞에 앉았던 그 시절이 눈에 선하구려. 37년이 지난 지금 다시 그때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읽어볼 요량으로 내 서재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 어제 꺼내서 먼지를 털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소. 내가 오늘 그대에게 릴케의 책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오. 37년이라는 세...

하나님 나라(35) - 기독교의 통일성과 다양성

  • Jun 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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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빛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의 활동은 잠정적이기 때문에 교회는 계속해서 이런 탐구와 재정식(再定式)의 과업에 종사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조직과 교리적 표현들도 인간이 관계하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성취를 지향하고 있으며, 따라서 잠정적이다. 전통적 권위주의의 붕괴는 교회로 하여금 스스로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를 만나러 가는 도상에 있는 순례자적 공동체라는 사실을 좀더 똑똑히 볼 수 있게 하는 축복이다. 이런 자각이 획일성 없는 새로운 기독교의 일치를 가져올 것이다. 이러한 ...

하나님 나라(34)- 교황제도 [8]

  • Jun 12, 2010
  • Views 4149

교황제도는 기독교의 일치를 위해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일치의 역할을 하려면 교회제도는 권위주의적 구조, 또는 전통의 동일성에 대한 보증, 또는 독단적 사법 권위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로마가톨릭교회에 속한 많은 이들도 교황제도가 기독교 일치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교회제도의 역할을 다시 정리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교황제도의 권위주의적 구조를 변혁해내는 시도가 비록 예비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진전을 보이기도 했다. 이를 위한 것이라면 개신교회도 교황의 대표성을 인...

하나님 나라(33)- 그리스도인의 자유과 교회

  • Jun 11, 2010
  • Views 3156

지난날 기독교의 권위주의적 구조의 중심에는 성직자의 위계질서가 자라했다. 오늘날에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갈등은 오늘의 교회에서 별로 심각하게 불거지지는 않는다. 이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교회 공동체에 속한 신학전문가가 앞으로는 다른 성원들과 완전히 구별되는 별종으로 간주되지 않을 때가 멀지 않아 다가올 것이다. 신학 전문가의 역할은 기독교 전통을 탐구하고 적용하는 일이다. 그러나 성직자의 위계제도는 곤란한 문제이다. 그것은 현대 에큐메니컬 논의에서 두드러지게 되었다. <중략> 성서의 자명성이라는 ...

하나님 나라(32)- 선교

  • Jun 10, 2010
  • Views 5020

기독교 선교도 똑같이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이 제거되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기독교의 선교를 광범위하고 맹렬하게 거부하는 현상이 이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거부는 대부분 과거에 많은 선교사들이 행한 권위주의적 방법 탓이다. 그들은 모범과 논증으로 납득시키는 대신 개종을 강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선교적 과제는 에큐메니컬적인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또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

하나님 나라(31)- 신학과 설교

  • Jun 09, 2010
  • Views 4324

사람들이 깊이 생각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경우에 설교는 이미 권위주의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본질적 진리를 새롭게 규정하는(再定式) 시도가 된다. 이런 새로운 규정은 인간 실존의 모든 차원에 놓인 현실성(realilty)에 대한 현대적 경험과 이해의 맥락에서 수행된다. 그것은 특히 새로운 규정에 참여하도록 초청된 공동체의 삶과 관계되어야 한다. 그래서 설교는 공동체의 성원들이 기독교 신앙과 그 현대적 진리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어떤 지침을 제공한다.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기 ...

하나님 나라(30) -신학의 역할 [2]

  • Jun 08, 2010
  • Views 3435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흥미를 보이고 있다. 전문적인 신학자는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교사가 되어서 이 흥미를 유발시켜야 한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가능한 한 기독교 신앙의 어려운 문제들에 관해 독자적이고 성숙한 차원에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모든 판단은 목사나 신학자의 도움 없이도 내려진다. 그러나 직업적인 신학자의 일은 공동체가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성숙한 방법으로 판단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신학자가 한 교구 목사인 경우에 그는 이 책임을 수락함으로써 자기...

하나님 나라(29) -성숙한 신앙 [1]

  • Jun 0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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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흔적을 제거하는 것은 교회생활에서 자주 고통스러운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 지불해야만 할 대가이다. 그런 고통을 통한 변혁은 크게 환영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신앙생활의 영역에서 그런 결과들을 볼 것이다. 설교, 교육, 교리에 대한 태도에서, 그리고 선교활동과 교회질서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에큐메니컬 운동에서, 그리고 타종교와의 관계에서 그런 결과들을 볼 것이다. (판넨베르크, 신학과 하나님의 나라, 135 쪽) 본회퍼는 하나님을 ‘작업...

하나님 나라(28)- 교회비판자들 [3]

  • Jun 05, 2010
  • Views 4352

계몽주의에 의해서 시작된 기독교의 권위주의 구조에 대한 비판은 반드시 기독교 신앙의 심장부와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비판자들이나 옹호자들은 종종 교회의 권위주의 형태를 교회의 실체로 오해한다.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은 그 이외의 모든 권위로부터 해방된다. 인간은 모든 것을 판단할 자유가 있다. 이것은 삶의 정치적 형태만이 아니라 교회 조직과 교리들에도 허용된다. 자유라는 은사와 특권은 교회의 선교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교회의 교리적 결정들, 그리고 성서 문서들, 더 나가서 예수 자신의 ...

옥중서간(17)

  • Jun 04, 2010
  • Views 5601

앞에서 나는 열여섯 번에 걸쳐서 본회퍼의 <옥중서간>에 나오는 글을 그대에게 소개했소. 본회퍼는 자신의 신학을 꽃피우기도 전에 젊은 나이에 히틀러에 의해서 사형을 당했소. 신학의 단초는 제시했지만 열매를 맺지는 못했던 거요. <옥중서간>이라는 게 어떤 체계 있는 신학적 논술이 아니라 신학적 착상에 대한 간단한 메모에 불과하오. 그가 오래 살았다면 세계 신학계에 끼친 영향이 아주 컸을 거요.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한 무력 시도가 성공했거나 2차 세계 대전이 몇 달만 일찍 끝났어도 본회퍼는 살았을 거요. 오늘로 <옥중서간...

6.2 지방선거 결과를 보고 [11]

  • Jun 03, 2010
  • Views 4110

그대는 어제 투표를 하셨소? 투표한 후보자가 당선이 되었소? 나는 어제 아내, 큰 딸과 함께 점심시간에 맞춰 투표를 하고 5분 정도 차를 타고 가는 거리의 국수집에서 비빔국수를 먹었소. 둘째 딸은 부산에서 부재자 신고를 했는데, 학교에 부재자 투표소가 설치되지 않아서 투표를 못했는가 보오. 내가 있는 경북, 대구지역은 온통 한나라 당 텃밭이라오. 그래도 경산 시장은 무소속이 되었고, 시의원에도 무소속이 1등으로 당선되었다오. 전라도나 경상도는 지역정서가 강해서 선거 결과에 별로 큰 신경을 쓸 게 없소이다. 의식이 있는...

옥중서간(16) [2]

  • Jun 02, 2010
  • Views 6264

여기서 종교적 방법론이 문제는 아니다. 종교적 행위는 부분적인 것이다. 신앙은 전체적인 것, 즉 생명 행위(Lebensakt)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종교로 사람을 부른 것이 아니라 삶(생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런 삶은 어떤 것일까? 이런 삶은 이 세상에서 신의 무능력에 동참하는 것이 아닐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오늘은 다음의 것만 추가하겠다. 신에 관해서 ‘비종교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는 세상의 무신성(無神性)을 은폐시키는 게 아니라 차라리 폭로하고, 바로 그것 때문에 놀라운 빛이 세상을 비추도록 신에 대해서...

옥중서간(15)

  • Jun 01, 2010
  • Views 3879

따라서 인간은 사실 신을 상실한 세계 안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세계의 무신성(無神性)을 종교적으로 숨기거나 신성화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세속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며, 바로 거기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세속적으로’ 살아도 된다. 즉 잘못된 종교적 억압이나 구속에서 해방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정한 형식에서 종교적이거나 종교적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을, 즉 죄인이라든가 회개한 자라든가 성도라는 식으로 자기를 규정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

천당방문기(8) [1]

  • Jun 01, 2010
  • Views 3440

박 장로가 처음에 천당에 온 날이었소. 천당 관리소에 갔는가 보오.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등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소. 이 세상에서 하던 주민등록과 비슷한 절차요. 기록 카드를 한참 들여다보던 박 장로는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가 머뭇거리면서 사무를 보는 천사에게 물어봤소. “장로 직책은 어디에 써야 하나요?” 다음은 천사의 대답이오. “장로가 무언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충 이름만 적으세요.” 박 장로는 자기가 못 올 데를 왔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소. 아니 천당 관리 천사가 장로직을 모르다니...

천당방문기(7) [2]

  • May 30, 2010
  • Views 3510

최 목사는 정말 모범적인 목회자였다오. 모든 것을 다 바쳐 목회일념으로 살았소. 다른 목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격이 출중하고 목회 열정도 뜨거웠소. 그런 분 같으면 교회에 다닐 맛이 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소. 65세에 조기 은퇴하고, 목회자가 없는 오지 교회에 가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어 천당에 온 사람이오. 내가 그를 천당의 한 숲길에서 산책하다가 만났을 때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소. 정말 뜻밖이었소. 세상에서 목회할 때는 그렇게 생기가 넘치고 평화로웠던 표정이 거기서는 의기소침해 보였다는 게 말이...

옥중서간(14) [6]

  • May 29, 2010
  • Views 5701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신 앞에서 인식한다. 신 자신이 우리를 강요하여 이런 인식을 하게 한다. 이렇게 성인이 된 세상은 우리로 신 앞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막 15:34)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계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에 ...

옥중서간(13)

  • May 28, 2010
  • Views 3515

대략 13세기에 시작된 인간의 자율성 운동은 지금 최고조에 달했다. 인간은 이제 모든 중요한 문제에서 ‘신이라는 작업가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 처리하는 것을 배웠다. 이것은 과학과 예술과 윤리의 문제에서 아주 명확한 사실이 되고 말았다. 백 년 전부터 그것은 가속도를 내면서 종교적인 문제에도 적용되었다. 만사가 ‘신’ 없이도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마치 과학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영역에서 신은 끊임없이 그 활동 범위를 억제당하고 있으며 지반을 잃고 있다. <중략> 성인이 된 세계를 ...

옥중서간(12)

  • May 27, 2010
  • Views 4799

나는 바이체커의 <물리학의 세계상>을 아직도 탐독하고 있다. 신을 우리의 불완전한 인식의 보충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졌다. 즉 인식의 한계가 부단히 확대되면서 항상 신이 옆으로 내밀리고, 거기에 따라서 후퇴를 거듭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지 않는 것에서가 아니라 인식하는 것에서 신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신은 미해결의 문제에서가 아니라 해결된 문제에서 우리를 붙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신과 과학적 인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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