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 배신(2) [3]
2009년 6월25일 배신(2) 그들이 듣고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까 하고 그 기회를 찾더라.(14:11) 가룟 유다와 대제사장들은 거래를 맺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돈을 주기로 했습니다. 어제 묵상에서 잠시 거론한 것처럼 가룟 유다가 실제로 돈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위 구절도 그걸 전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양쪽의 거래가 맞아떨어졌고, 그 결과로 돈이 오갔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벌어진 이 흥정의 결과는 바로 앞에서 나온 ...
6월24일 배신(1) [5]
2009년 6월24일 배신(1) 열둘 중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14:10)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처음 등장은 제자 임명이 이루어진 막 3:19절입니다. 거기서 그는 이미 “예수를 판 자더라.”는 판단을 받았습니다. 이제 14:10절과 막 14:43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모든 구절이 예수님을 팔았다는 사실과 연관됩니다. 마태복음 27:3절 이하는 유다가 자기 행위를 후회하고 목매달아 죽었다는 이야기를 첨가합니다. 물론 마태복음만의 독립 전승입니다. 가룟 유다는 누군가요? 그에 관한 정보는 ...
6월23일 고귀한 낭비(10) [3]
2009년 6월23일 고귀한 낭비(1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4:9)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에 관한 이야기의 결론이 바로 위 구절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인의 일도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은 복음과 이 여인의 행위가 일치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정도의 수준에서 제자들의 행위를 인정한 적이 있을까요? 제 기억으로는 없습니다. 복음과 이 여인의 행위가 일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복음이 무슨...
6월22일 고귀한 낭비(9) [2]
2009년 6월22일 고귀한 낭비(9)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14:8) 위 구절에서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대목이 어렵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시고 장례 운운하신 것인지, 아니면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복음서 기자의 관점인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이런 역사 비평적인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어느 쪽이든지 이 여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6월21일 고귀한 낭비(8)
2009년 6월21일 고귀한 낭비(8)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14:7)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책망한 사람의 논리는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훨씬 가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위 구절에서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제자들과 늘 함께 하지만 주님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암시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는 말씀이 ...
6월20일 고귀한 낭비(7) [2]
2009년 6월20일 고귀한 낭비(7)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4:6) 어제 묵상에서 마지막으로 말씀드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한 초월이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초월은 내재와 대립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내재하면서 동시에 초월한다는 기독교의 신론에 근거해서 본다 하더라도 초월 개념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을 초월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고귀한 낭비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
6월19일 고귀한 낭비(6) [2]
2009년 6월19일 고귀한 낭비(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14:6) 앞 구절에서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을 어떤 사람이 딱하다는 듯이 책망했습니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도울 일이지, 하고 말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도 자기의 생각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은 그 사람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의 행위를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대접을 받거나 관심을 끌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한 게 아닙니다. “내게...
6월18일 고귀한 낭비(5) [3]
2009년 6월18일 고귀한 낭비(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14:5)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 붓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의 논리는 표면적으로 합리적이고 도덕적입니다.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게 좋다고 말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을 오늘의 화폐 가지로 환산하면 2천 내지 3천만 원입니다. 이렇게 비싼 향유를 그냥 쏟아버린다는 건 그런 합리적 휴머니스트들에게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이들의 ...
6월17일 고귀한 낭비(4) [8]
2009년 6월17일 고귀한 낭비(4) 어떤 사람이 화를 내어 서로 말하되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14:4) 한 여자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그 자리에 있던 어떤 사람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향유를 왜 허비하는가?” 이 사람의 주장은 틀린 게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합리적입니다. 우리의 합리적인 생각은 이 세상에서 가치론적으로 작동됩니다. 가능한 대로 가치 있는 것에 자기의 삶을 투자하려는 생각입니다. 시간도 돈도, 그리고 열정도 역시 그렇습니다.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가치가 없는 일에...
6월16일 고귀한 낭비(3) [4]
2009년 6월16일 고귀한 낭비(3)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14:3) 미국의 루터교 신학자 마르바 던이 쓴 <고귀한 시간 낭비>가 있습니다. 예배에 관한 책입니다. 그녀는 미국의 대형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소위 ‘열린 예배’의 경박성을 비판했습니다. 복음찬송은 하나님을 찬양한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신학적 깊이가 있는 음악과 예전을 통한 예배를 회복해...
6월15일 고귀한 낭비(2) [2]
2009년 6월15일 고귀한 낭비(2)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14:3) 한 여자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도 나옵니다. 마가복음 이야기와 가장 가까운 것은 마태복음 26:6-13절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거의 똑같은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2:1-8절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약간 차이가 납니다. 예수님이 들어간 집의 주인이 마가복음에는 나병환자 시몬인...
6월14일 고귀한 낭비(1) [2]
2009년 6월14일 고귀한 낭비(1)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14:3)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일 흉계를 꾸민다는 말은(막 14:1,2) 수난설화의 단순한 도입부에 불과합니다. 실제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14:3-9절에 나오는 한 여인에 관한 것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할 때 값진 향유 한 옥합을 들고 등장합니다. 그녀는 향유가 ...
6월13일 수난설화(5) [1]
2009년 6월13일 수난설화(5)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14:2) 복음서는 예수님이 유대교의 권력자들에 의해서 수난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다고 일관되게 전합니다. 여기서 수난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일부러 수난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 귀결이 바로 수난입니다. 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이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그 대답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권력과 충돌한다는 것입니다. 권력의 속성은 힘의 ...
6월12일 수난설화(4) [2]
2009년 6월12일 수난설화(4)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14: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처치하고 싶었지만 때가 좋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과 무교절을 바로 앞두고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고대 유대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이때 경건한 유대인들과 세계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그 종교적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듭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에 이어지는 절기로, 이때 유대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었습니다....
6월11일 수난설화(3) [2]
2009년 6월11일 수난설화(3)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14:1) 수난설화의 시작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일 방도를 구한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성전 청결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이미 그런 생각을 굳힌 인물들입니다.(막 11:18)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과 가장 심각하게 대척점에 섰던 이들은 물론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런 보도는 복음서가 기록되던 시대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감안해서 읽어야합니다.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이...
6월10일 수난설화(2) [2]
2009년 6월10일 수난설화(2)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14:1) ‘수난설화’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특히 설화라는 단어가 그렇습니다. 창조설화라는 말도 있고, 기적설화라는 말도 있습니다. 홍수설화도 있습니다. 일정한 형식의 이야기를 가리켜 설화라고 합니다. 설화가 불편하면 ‘이야기’라고 바꿔 불러도 괜찮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중에서 가장 분명하게 일치하는 내용과 형식을 갖춘 게 바로 수난설...
6월9일 수난설화(1)
2009년 6월9일 수난설화(1)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14:1) 네 복음서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대목이 이제 마가복음 14장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인 ‘수난설화’가 그것입니다. 출가, 광야의 시험, 갈릴리로부터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와 예루살렘에 이르는 과정에서 행한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들이 바로 이 수난설화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서에서 비슷한 내용과 구조로 되어 있는 수난의 정점은 십자가 처형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
6월8일 깨어 있으라(5) [8]
2009년 6월8일 깨어 있으라(5)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13:37) 우리는 지난 몇 번에 걸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깨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졸릴 때 아무리 정신 차려야지 하고 마음먹어도 잘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쉽게 풀어보지요. 젊은 시절에 무협소설이나 탐정소설을 읽으면서 밤을 새워보지 않는 분들이 별로 없을 겁니다. 그런 소설이 독자...
6월7일 깨어 있으라(4) [2]
2009년 6월7일 깨어 있으라(4)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13:36) 마지막 때의 비유가 긴박하게 흘러갑니다. 집주인이 ‘홀연히’ 와서 종들이 잠들어 있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재림도 그처럼 홀연하게 일어난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초기 기독교는 주님이 속히 재림하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재림에 대한 기대가 허물어지면서 그들의 신앙도 역동성을 잃었습니다. 위의 비유는 이런 상황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 ...
6월6일 깨어 있으라(3) [4]
2009년 6월6일 깨어 있으라(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13:35) 예수님의 비유가 계속됩니다. 종들이 깨어 있어야 할 이유는 집 주인이 언제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지 제자들이 모른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도 그들과 똑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으나 언제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 때를 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32절은 그 날과 그 때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