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간(2)                        

고전 15:45-49

새로운 인간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예컨대 마르크시즘에도 이런 기다림이 있습니다. 마르크스의 희망은 자본주의를 해체하고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을 실현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곧 더 이상 다른 이들과 반목하는, 또는 다른 이들의 희생에 근거해서 자기의 이기적인 관심을 성취하지 않는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추가적으로 질문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입니까? 또는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끝난 뒤 70년의 세월에 대해서 이렇게 질문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희망이었을까요? 지난 70년 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이 매우 분명하게 증명되었습니다. 개인들은 사회주의적 국가에서도 역시 어떤 태도를 결정해야 할 때 여전히 개인적인 관심을 우선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마르크스와 수많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들이 희망한 새로운 사회주의적 인간은 탄생되지 못했습니다. 개인들과 시민들이 더 이상 자기 중심적인 목표로 인해서 분열되거나 억압과 상호간 폭력적인 갈등 가운데 빠져들지 않는 인류 사회가 도래해야한다는 열망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제질서를 해체함으로써 새로운 인간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기적을 바라는 신앙일 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새로운 인간은 이기적인 관심이 지배하는 데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상태를 뜻합니다.
역사 과정을 통해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공산주의의 신앙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미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어떤 새로운 인간도 필요하지 않다는 서양 자유주의의 자기만족이 옳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런 자기 만족은 우리의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한정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으로는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혀 있으며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등을 겪는 이 세상에서 자유를 이기적으로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존경하게 되는 이성적 상태라고 보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이성적 도덕성이 작동되는 상태일지 모릅니다. 즉 도덕적 인간을 새로운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 말입니다. 유럽의 계몽주의는 이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성은 이런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해관계의 갈등과 그것의 억압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여러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늙어 가는 과정과 죽음에 직면해서 고독을 경험한다는 전망도 역시 이런 삶에 속합니다.
우리 인간의 훼손된 삶을 심층적으로 극복하며 새로운 인간을 창출하기 위해서 완전히 다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도덕적 노력은 너무 무기력합니다. 그리고 사회 체제의 변화나 경제 및 정치 체제의 변화도 역시 역부족입니다. 인간의 갱신에는 훨씬 극단적인 변화가 요청됩니다. 성서는 이런 변화를 위해서 죄와 죽음을 극복해야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양자는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기적인 자세로 인해서 이웃이나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고립된 인간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역으로, 모든 이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죽음은 우리의 생명을 이렇게 고립화시킵니다. 우리 생명의 내용은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모색함으로써 성취되는 게 분명히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자기 자신만을 모색하는 것으로 모든 게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은 역시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완성시키는 일에 관계됩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그리고 죽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라서 죄의 힘이 극복되는 길은 다음과 같은 경우뿐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궁극적 미래가 아닐 경우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신 새로운 인간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는 죽음을 극복했기 때문에 새로운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수 없는 하나님과 나누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즉 하나님의 세계로부터 온 인간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표상은 이해하기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이 표상은 공중의 어떤 정기(精氣)와 같은 몸처럼 생각되거나 인지학(人智學)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하나님과 연결된, 하나님 영에 의해서 완전히 포착된 생명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랬던 것처럼 구약성서를 되돌아보아야만 합니다. 바울은 창조의 역사를 인용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자신의 숨을, 자신의 영을 그 코에 불어넣었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생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지막 숨이 끝나게 되면 생명을 잃습니다. 우리는 살아있습니다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도는 이 사실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보도에 따르면 첫 번 인간은,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살아있는 혼’(lebendige Seele)으로 창조되었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것은 영원한 게 아니라 일시적입니다.
생명에 대한 이러한 성서의 통찰은 오늘의 생물학을 통해서도 역시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생명은 우리에게 무언가 궁극적으로 비밀 가득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명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그 생명의 유지도 역시 우리에게는 아주 값비싼, 그러나 마지막에 다시 주어지는 낯선 선물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숨은 우리를 살아있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호흡을 끝냄으로써 그 숨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이러한 상(像)은 생명을 아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생명과 다른 한 생명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 생명에는 하나님의 생명의 영이 단지 덧없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생명은 완전히 생명의 영을 통해서 통전되었으며, 또한 그 영과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영적인 생명, 영적인 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과 결코 나누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하나님처럼 결코 죽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연결은 결정적인 요소입니다. 그래서 시편 73편의 기도는 이렇습니다. “나의 몸과 혼은 시들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영원히 나의 바위이시며 나의 편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생명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유지하고 확장시키느라고 걱정을 한 순간도 쉬지 않습니다. 이렇듯 자기 모색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과 분리됩니다. 죽음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나누인 것이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사건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달리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며, 하나님에게 복종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자기의 편지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새로운 인간이라고 진술했습니다. 로마서 5장이 바로 그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그의 모양을 지니기” 위해서 우리가 그와 연결되었다고 말입니다. 아담을 넘어섬으로써, 즉 오늘 우리 모두가 살아가고 있는 그런 인간을 넘어섬으로써 죽음이 극복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발생했으며, 이로써 우리에게도 역시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서 죽음 없이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의 토대가 주어졌습니다. 가까이 임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라는 사명에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하나님과의 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한 주님의 생명에서 우리는 이제 그의 십자가 죽음이 그를 하나님과 분리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자기의 그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죽음을 당신의 죽음과 결합시켰으며, 그래서 우리도 역시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 게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실이 세례에서 발생합니다. 세례는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미래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합시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예수님의 부활에서 예수님과 완전히 결합된다는 사실을 희망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피력합니다. 우리가 첫 아담의 상(像)을, 즉 죄와 죽음의 인간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오는 하늘의 인간이라는 상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상과 동일한 형태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인간인 예수님은 새로운 인간성의 시작이며 마지막입니다. 이 인간성은 바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일치를 기념하는 식사에 참여합니다. 이는 곧 그의 죽음을 기억하며, 또한 그가 다시 오신다는 사실을 희망하는 가운데 준비한 성만찬입니다. 따라서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됨으로써 신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생명의 끝과 이 세상의 끝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교회가 읽어야 할 누가복음서의 성서일과는 이 세상과 우리 삶이 길을 잘못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희망은 이 세상을 향상시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향상시킨다는 것은 이런 저런 많은 처방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이 세상에 대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이 책임감은 모든 피조물 중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창조 시에 인간에게 부여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위탁을 잘못 가르치는 교회는 기독교인의 믿음과 희망이 이런 삶의 피안을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인인 우리가 차안에서, 즉 차안적 업무와 산만한 생각에서 허우적거림으로써 잘못 살아가는 잘못입니다. 이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허무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세상의 무상(無常)과 사람들의 두려움이라는 사태 앞에서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런 일이 나타나기 시작하면 똑바로 서서 여러분의 머리를 드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눅 21:28). 기독교 희망의 피안은 이 세상의 불충분성에 대한 값싼 위로가 결코 아니며, 이 세상의 삶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영원한 생명의 피안에 대한 신앙은 우리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 세상의 삶을 지탱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 삶의 무상성을 대담하게 마주 대하며, 숙고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예배의 부름으로 낭독한 요헨 클레퍼(Jochen Klepper)의 강림절 노래는 이미 지나간 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날을 향해 나가야 할 세상의 밤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설교가 끝난 뒤 함께 부르게 될 게오르크 바이셀(Georg Weißel)의 노래는 세상의 왕이 오실 준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노래합니다. 이 왕은 구원과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바로 새로운 인간이 오십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 새로운 인간은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우리를 위해서 죽음을 극복하신 분입니다. 이런 왕의 오심은 마지막 날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에, 그리고 베들레헴의 아기와 더불어 현재 이미 그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아멘. (1986.9.7, 대강절 둘째 주일,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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