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드높이
눅 22:14-23

우리가 예배드리러 나올 때 무엇을 찾습니까? 아마 이 문제는 모든 이들에게 제 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올바르게 드린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양시키는 일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일상의 염려와 진부성을 뛰어넘는 일말입니다. 이것은 곧 죽게 될 우리 생명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에게로 고양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양은 영원한 분을 찬양하고 그분에게 기도를 드림으로써 실현됩니다.
성만찬 예전문에서 초청의 말씀은 분명히 다음과 같습니다. 마음을 드높이(sursum corda).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십시오. 이제 우리 회중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높였습니다. 이런 요청과 회중의 대답은 찬양으로 울려 퍼집니다. 이 찬양은 개별적으로 나뉘어졌던 우리 마음이 한 분 하나님께 고양되는 순간이며 수단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만찬 예식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찬양은, 특히 함께 부르는 찬양은 우리가 고양되는 것입니다. 목청을 다하여 모두 함께 힘껏 부르는 노래는 우리를 개인적인 자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물론 오용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고조된 감정과 일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게 하고 부추기는 수단으로 오용되었으며, 지금도 그렇습니다. 일치를 이루는 이런 감정에서 늘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의 찬양에서는 거기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더불어서 영원을 향해 고양되는 게 관건입니다. 이것은 이미 예배를 시작하면서 부른 찬양에서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 이제 예배의 전체 사건이 찬양을 통해서 성만찬으로 초대하는 말씀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드높이!
위대한 독일의 한 사상가는 종교의 본질을 가리켜 하나님을 향해 고양(高揚)되는 것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우리의 유한한 현존을 영원이라는 사상으로 고양시키는 것 말입니다. 예배는 이러한 종교적 고양의 총괄 개념입니다. 또한 예배는 찬양의 중재를 통해서 고양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고양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결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닙니다. 이런 지상의 삶은 수르숨 코르다(마음을 드높이)에서 받아들여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매일 새롭게 해 주신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일어납니다. 하나님에 고양되는 것은 감사의 형식으로 성취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인 주님께 감사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현존을 감사하며, 우리에게 주신 창조의 선물을 감사합니다. 이 창조를 우리는 즐거워하며, 그 창조의 선물로부터 우리의 생명이 영양을 공급받습니다. 우리의 현존은 여러 차원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며, 억압받고 있으며, 더욱이 훼손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은 감사의 마음을 갖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벗어납니다. 감사함으로써 창조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풍성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갖고 있는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찬양은 우리가 모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는 그 분에 대한 기림입니다. 그리고 창조자를 찬양함으로써 우리의 감사는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뛰어넘어 전체 창조에 이르기까지 확대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이 우리의 예배를 통해서 드리는 감사는 아들의 오심이라는 사건에도 특별한 방식으로 해당됩니다. 그 아들은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두려움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습니다. 그 불안이 곧 죄의 원천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이끌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어 영원한 하나님과 일치하게 하셨으며 우리의 죽음을 극복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명과 고난을 통해서,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일치될 수 있도록 우리를 고양시키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게 고양됨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합니다.
감사와 기억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때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감사를 기억할만한 동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우리가 차라리 망각되기를 바라는 혐오스러운 기억도 있고, 우리를 충격과 수치심으로 몰아가는 기억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서 벌어진 사건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새롭게 회복해 보려는 기억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예배에서 일어나는 기억은 감사의 동기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게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감사를 통해서 규정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모든 분리가 극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예배는 옛날부터 감사의 마음을 아뢰는 것, 즉 성찬식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특징들이 비록 로마 가톨릭 미사의 핵심이긴 하지만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받아들이기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거나, 또는 우리가 참여하는 성만찬 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모든 값을 치렀다는 명분으로, 인간의 감사하는 행위를 예배의 중심에 자리 매김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은 적절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아룀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행동하십니다. 이 구원은 모든 감사의 출처이기도 하고, 우리가 감사하는 목표이기도 합니다. 거꾸로 하나님의 행위는 감사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우리에게 수용될 것이며 획득될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의 말을 통해서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서 하나님에게 고양되는데, 이 감사의 말은 분명히 성만찬 제정을 기억하는 행위입니다. 이 성만찬은 우리 주님이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신 예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식사에 대해서 설명하신 다음에 빵을 들어서 감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나누어주심으로써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곧 유대인들이 식탁 앞에서 드리는 기도를 예수님이 드린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식탁 앞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고서는 결코 음식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그 기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세상의 왕이신 주님이시여, 우리의 찬양을 받으소서. 당신은 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자라게 하셨나이다.” 이런 찬양의 형식에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은총으로 주신 창조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기독교 예배는 이미 예수님이 드리신 감사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그를 기억하며 그의 식탁 자리에 참여하는 매 순간 마다 그렇습니다. 바로 여기서 창조에 대한 감사의 말이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에 대한 감사로 확대됩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이런 회상을, 즉 이런 ‘기억’을 간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식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눅 22:19). 바울은 이 말씀에 첨가하여 이렇게 진술합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시오.” 예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성만찬에,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는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성만찬 예식과 성만찬의 일치라는 징표에 현재 함으로써 성만찬적 특징이 된 것입니다. 이 성만찬은 곧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를 담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마지막 식탁에서 이렇게 부가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여 나누는 빵에서, 또한 우리가 그를 기억하며 마시는 잔에서 인격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게 된다는 보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그의 죽음을 기억함으로써 우리의 식탁에 현존하십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역사를 기억하는 일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이 구원 행위는 예수님의 역사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억은 전체 예배를 관통합니다. 그것이 단지 성만찬 예식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귀를 기울이는 성경봉독은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 대한 기억을 제공합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를 이끌어 들이는 설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영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사신(使信)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영을 통해서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약속대로 이 식탁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의 인간적 현존에 보내시고, 또한 아버지가 보내신 목적대로 예수가 자기 생명을 내어주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영을 통해서 우리에게 같은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기 생명을 내어주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이러한 기억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고양되는 매개 수단입니다. 우리가 찬양하고, 성서를 읽고 그 말씀을 들으며, 설교를 듣고, 기도하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마음을 높은 데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에게 두었습니다.
(1996.2.25, 뮌헨, 대학예배)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