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길
요 12:20-26

교회는 매년 봄기운이 만연한 이 절기에 우리 주님이 가신 고난의 길을 생각합니다. 온 세상의 만물들이 새로운 생명으로 약동하기 시작하는 이 시기에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길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고난과 죽음이 예고되었으며, 우리가 복음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은 생애의 마지막 날들을 바로 그 거룩한 도시에서 보내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도하고 있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무리들이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세계 곳곳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유대의 순례객들은 무리들이 어울려서 환호하고 있는 이 예언자를 보려고 했습니다.
이런 축제 분위기는 분명히 봄을 맞는 우리의 기분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축제의 순간에 그들을 향하여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분적으로는 기이하고, 부분적으로는 냉정한 태도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때가 이르렀으니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이 곧 예수 자신의 죽음에 대한 언급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언급할 때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만 이 사태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할 때 당시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대상은 다니엘 예언자가 예언했듯이 이 땅과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마지막 때 하늘의 구름을 타고 이 세상에 오실 분을 가리켰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고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얻는다는 이 선포에서 바로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을 언급했다는 사실을 유추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광은 일단 명예와 빛나는 광휘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환호했던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땅의 영광과는 정반대로 거의 모멸적인 사건이라 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는 길을 생각했습니다.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아버지는 예수님에 의해서 영광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의 핵심입니다. 바로 이 핵심적 진술은 밀알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뒤이어 생명을 잃는 것과 얻는 것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해명됩니다. 밀알에 대한 말씀은 비유입니다. 밀알은 땅에 심겨져 죽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생명이 거기서 발생됩니다. 우리는 종자 씨앗에 대한 이런 말씀에서 신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거두게 된 열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의 차원에서만 인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상황에서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한다는 밀알에 대한 말씀은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길도 역시 의미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입니다. 죽음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밀알은 죽음을 관통해나갑니다.
이 말씀이 여기서 비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는 암호문으로 표현된, 또한 가장 강한 형식으로 표현된 그 다음의 문장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놀라자빠질 수밖에 없는 가르침입니다. 도저히 우리가 가깝게 느끼기 힘든 언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우리의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러한 생명을 감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던가요? 이 생명은 창조자의 손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아버지처럼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이런 마당에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이런 생명을 미워해야만 합니까?
생명을 잃고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본문은 특별히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에 대한 초기 기독교의 전승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의 병행구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연관되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기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서 알렸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친구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근심 어린 마음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뜯어말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이런 일이 주님에게 일어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 문장을 마태복음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들에게서도 생명이 보존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엄하게 꾸짖으시면서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뜻만을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생각은 생명을 보존하는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생명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에게서 무언가 다른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이 준엄한 대답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까? 이것을 미루어 헤아리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일은 공생애 시초에 예수님 자신에게 일어났었던 광야에서의 유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구의 입을 통해서 이런 유혹이 자기에게 다시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노여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선포와 활동으로 인해서 어떤 원수들이 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 원수는 예수님의 선포와 활동이 성공적이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선포한 임박한 하나님의 통치가 그의 활동에서 이미 개시되었다는 사실을 언어도단의 불손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신성모독으로 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는 비난이 그의 적들에게서 나왔습니다(요 10:33). 그리고 이런 신성모독으로 인해 그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핵심적으로 선포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맹세해도 신성모독을 벗어나는 데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통치가 가까이 임함으로써 예수님의 활동에서 그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선포가 지속될 때까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자리에,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 통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았다고 말이다. 예수님이 악마를 축출하고 이로 인해 그가 전한 복음 사신(使信)의 신뢰성이 획득된 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차이가 그대로 유지되어야만 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이 차이는 창조자에 맞서 있는 피조물에게 어울리는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차이를 유지했을까요? 예수님의 적들은 예수님의 태도를 보고 그가 하나님 행세를 한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사신의 선포를 포기해야만 이런 갈등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임재와 그 통치를 선포해야 할 사명에 순종하지 않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말씀의 배경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다.” 자기의 생명을 최고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즉 하나님과의 일치를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사명에 신실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처럼 오래 살 수 있었겠지만 참된 생명을 잃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이 세상의’ 경계선 끝으로 끌고 갔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명령을 굳게 붙잡았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닥칠 모험을 감수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생명을 이처럼 “끝으로 몰고 가는 것”은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핵심은 세계도피나 신경증적인 자기증오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지상의 생명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순종해야만 할 하나님과 그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를 선포하고, 또한 인간이 이런 하나님의 요구에 마음을 여는 바로 그곳에 임하시는 복되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특별한 사명이 관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복음 사신을 선포하라는 명령에 늘 순종적이었기 때문에 죽음이 그를 영원한 하나님과 갈라놓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바로 그 죽음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변용(變容)을 의미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순종을 궁극적으로 확증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말하는 새로운 생명은 아버지를 향한 예수님의 순종에서 관철되고 보증된 영원한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한 이러한 변용을 의미합니다. 이 영원한 하나님은 모든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 자체입니다.
이 땅에서 유지되는 자기 생명을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잃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의 순간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발생합니다. 이 땅의 생명을 하나님에 대한 순종보다 낮은 순위로 돌려놓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그분의 뒤를 따르는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자기의 생명을 우선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집중한다고 해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십자가의 죽음을 당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뒤따른다는 것은 물론 순교자의 죽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부인하는 값을 치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은 교회의 역사에서 늘 반복되긴 했습니다만,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뒤따른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의 동료를 떠나아야만 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예수님과 더불어서 유랑생활을 하기 위해서 그를 따랐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원칙적인 점에서 그리스도를 뒤따름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맡겨진 특별한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감당해야 할 그 특별한 명령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각각 다릅니다. 이런 특별한 명령은 바로 자기의 직업에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는 것에 자기의 삶을 기울이는 것에 있습니다. 이 명령은 가족의 행복과 아이들과 손자들을 위한 어머니들의 희생에도 들어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명령이 늘 유별난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것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견지하면 우리의 삶을 보존하고 확대 재생산하느라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을 뒤따르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설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그의 부르심이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일도 역시 여기에 속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설정하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셨던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확증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에게 순종함으로써 그에게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일치시킴으로써 지키실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1996.3.17. 그래펠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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