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복종
히 5:7-9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복종이라는 가치를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종이라는 것을 맹목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맹목적인 복종은 지난날 군대에서 요구되던 그런 복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복종은 이런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자유로운 판단과 결단에 근거해서 기꺼이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조직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 조직의 법에 복종할 필요가 있듯이 시민으로서 우리도 역시 이 나라의 감독 기관과 지도 기관에 복종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정부의 지도자들이 하는 말을 들어야 한다고, 즉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인간보다 하나님에게 훨씬 분명하게 복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대 법정이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기 말라고 명령했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행 5:29).
오늘 우리들은 인간의 질서와 권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기인한다는 사실과 또한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복종 안에서 유효하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데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이 두 사실이 아주 또렷했습니다. 즉 율법과 의로움의 기초는 하나님의 권위에 기인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취해야 할 태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왕들이나 그 이외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살아가지 못했을 때 예언자들은 그들을 가혹할 정도로 비판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임했다는 예수님의 선포도 역시 이런 전통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시오”(마 6:33).
신약성서에 보도되고 있는 예수님의 전체 사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하나님에게 복종했다고 말입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대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다”고 말입니다.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복종은 첫 사람인 아담의 불복종과 대비되는 상(象)입니다(롬 5:19).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복종하여 죽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5:10 이하).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복종에 대한 오늘의 본문도 역시 특별히 그의 죽음과 연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복종이라는 개념의 뉘앙스가 약간 색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복종을 ‘배웠다’고 말입니다(히 5:8). 예수님이 원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표현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도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기 살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에게 큰 소리와 눈물로 기도하고 간구하셨다고 합니다(5:7). 이것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 26:39). 그가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는 이 잔은 고난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두려움 가운데서 그것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렇게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것은 분명히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겠다는 것입니다. 복종은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즉 요한이 “다 이루었다.”고(요 19:20) 보도하고 있듯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학습되어야만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의 복종은 특별히 예수님이 어떻게 고난과 죽음의 길을 따랐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에서는 이와 달리 예수님이 가신 길, 그 전체가 복종의 길입니다. 이 복종은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점에서 매우 극단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과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왜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행위였는가 하는 점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이런 명령은 갑자기 뜨거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게 아니었습니다. 고난을 향한 예수님의 길을 단절된 것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흡사 고난으로 진행된 그 이전의 역사가 없이 하나님이 제멋대로 요구한 희생으로 간주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걸어오신 전체 삶과 연관해서 볼 때 그의 고난과 죽음은 그가 받은 사명에 의한 당연한 귀결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신 것처럼 보일 수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전체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복종의 징표입니다. 이 사명은 곧 하나님의 통치가 가까이 이르렀으니까 모든 관심사를 오직 하나님의 미래에 맡기고 살아갈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관심사를 하나님의 부르심에 맡기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이런 선포의 사명에 충실함으로써 그 자신 스스로 하나님에게 복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는 이런 선포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서 이미 현재의 현실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이 사명은 자기 민족의 권력자들과 큰 갈등을 빚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에 그의 요청은 엄청난 월권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중재하는 자로 자처했다는 점에서 그럴 만도 합니다. 이런 갈등은 결국 로마 당국의 사법적 조치를 불러옴으로써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선포를 포기하고 목수라는 현장 노동자로 돌아갔다면 이런 죽음의 운명을 벗어나서 자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그러셨다면 하나님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해야하는 자신의 사명에 복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받은 이런 사명에 복종하는 사람이라면 갈등을 피해가지 말아야 하며, 결국 이로 인해서 당해야만 하는 고난과 죽음을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복종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를 반대하는 큰 세력이 억압해 들어오고, 결국 그로 인해서 생명을 담보해야만 할 경우였는데도 하나님에게서 받은 위탁을 방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일치라는 구원으로 이끌어내고, 그래서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던졌습니다.
이 사건이 곧 예수님을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간 예수님의 복종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 나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7).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핵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져야 한다는 요구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요구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소명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흡사 예수님이 갈등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과 똑같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이 요청은 제자들이 주님의 운명과 똑같은 것을 그대로 감당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고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으려다가 순교자처럼 죽어야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처럼 실제로 십자가로 죽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운명의 결과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특별한 사명에 충실해야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고수해야만 합니다. 비록 세상이 우리의 신앙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말하거나 이질적이라거나 더 나아가서 완고하고 편협하다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기독교 신앙 때문에 우리를 피하는 일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별한 사명이 무엇인지, 완전히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질문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사명도 역시 오직 한번뿐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도 역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한번뿐인 사명은 예수님을 모든 사람들과 구별합니다. 하나님의 임박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예수님의 사명은 예수님을 우리 기독교인들과도 구별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로서 완전히 홀로 자기의 길을 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명에 투철함으로써 예수님은 적대감이나 비방과의 갈등을 겪게 되었으며, 결국 고독과 고통과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에 여전히 진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으로 인한 결과를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은 그와 연결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으며, 또한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복음 선포와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를 모든 것보다 우선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르는 사람에게는 그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현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성만찬에 참여한 제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으며, 그리고 오늘도 교회의 성찬식으로 우리를 초청하는 예수님의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에게 이와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보존하려고 자신의 사명을 거절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가까이 임했다는 사실을 선포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구원은 더 이상 그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현재화할 수 없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값으로 치르고 자기의 사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그는 단지 제자들만이 아니라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듯이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자가 되셨습니다.” 그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은 곧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따라서 자신의 생명을 가까이 임한 하나님의 통치에 맡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즉 하나님의 통치가 현재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이런 구원을 소유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통해서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이를 통해서 하나님과 일치하며 영원한 생명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과거의 현존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됩니다.
(1998.3.29, 뮌헨, 마태우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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