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누스 플레비트
눅 19:41-44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다 보면 깎아지른 것 같은 키드론 계곡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도시를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좀 더 내려가면 벽으로 둘러쳐진 예루살렘을 조망하기에 적당한 장소가 나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비슷한 높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장소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도미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 주님이 우셨다) 교회당이 서 있습니다. 기독교의 첫 교회당이라 할 이 교회 건물이 기원 후 5세기에 이곳에 건축된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서술하고 있는 그 장면을 바로 이 장소에서 매우 리얼하게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에서 경험할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눈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 거의 보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표현이 두 군데 있지만, 웃으셨다는 표현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결코 웃지 않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복음서 기자들이 보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을 이 땅에 내려온 신인(神人), 즉 인자(人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인의 웃음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감에서 나오는 게 결코 아니며, 또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터뜨리는 감정 표현도 아닙니다. 앞으로 세계를 심판할 분이 사람과 세계에 대해서 웃었다는 것은 시편 2편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의미일지 모르겠습니다. “하늘 옥좌에 앉으신 야훼, 가소로워 웃으시다가”(시 2:4). 야훼는 원수를 가소롭게 여겼습니다. 이것은 야훼 심판의 박장대소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예수님이 우셨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은 왜 우셨습니까?
1.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우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했다거나 죄책감 때문에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닭이 세 번 울었을 때 자기 선생님을 배신했다는 후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 때문이 아니라 자기 민족을 위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사랑의 표현이며, 면박 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의 말씀은 냉혹한 분노에서 나온 게 아니라 절망적인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사랑했지만 멸망의 길을 가고 있는 민족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민족의 멸망을 바꿀 도리가 없었습니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4절).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예루살렘에만 해당됩니까? 그의 백성인 우리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요? 아마 오늘의 기독교에도 분명히 해당될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에게 임하게 될 구원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원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2. 예수님은 그가 선포한 구원을 자기 민족이 거절했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본문에 분명히 이렇게 진술되어 있습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42). 우리는 평화의 길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평화’라는 단어를 주로 정치적인 의미로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 해석은 곁길로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정치적 평화를 선포한 분으로 오해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과 평화와 행복을 구분하면 안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구체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로마의 식민 지배 세력과 평화스럽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적대자들이 원한 것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서 죽는 게 전체 민족이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입니다. 요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이것은 제사장 가야바의 진술이었습니다. 무엇이 평화의 길입니까? 혁명을 막아보려는 정치적 억압과 예방 조치가 그것입니까? 젤롯당 당원들이 시도했던 해방투쟁입니까? 적대자들로 하여금 평화가 깨지는 경우에 당하게 될 결과를 꿰뚫어보고 충격을 받게 하기 위해서 군비를 확충하는 것입니까? 또는 이와 반대로 군축입니까? 이미 획득하고 있는 평화마저도 훼손될 수 있는 모험을 수반한 일방적인 군축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使信)은 이런 모든 전략과 엇갈립니다. 예수님은 자기 민족이 다른 방식으로 평화를 얻기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야말로 하나님의 민족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참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민족은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으로 돌아서는 일이 그들이 가야할 평화의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평화의 길이 그들에게 은폐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까?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私)적인 삶이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공(公)적인 삶에서도 전혀 다른 토대를 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정서에 영합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단지 일상에 필요한 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그리고 지속적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는 정치적 슬로건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생명의 중심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점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독교 정당들도 이런 사실만이 우리가 평화를 얻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예수님의 눈물이 우리에게도 역시 해당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는 무엇이 평화의 길인지 알고 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교회는 정치적 평화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토대를 둔 평화는 최소한 우리 기독교의 고유한 삶에서 구체화되고 있습니까? 뿌리 깊은 기독교의 분리를 극복하는 일에 우리가 무력하다는 사실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 되기 원하시는 우리의 주님에게 돌아서는 일이 관건인 곳에서 우리가 얼마나 타성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아주 명백하게 증명하는 징표가 아닌가요? 교회가 분리되어있다는 사실은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현상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일치를 열망함으로써,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열망함으로써 일어납니다. 일치는 곧 우리 안에 있는 분열을 극복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바로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존재와 비존재, 그리고 그리스도 교회로서의 존재와 비존재가 결정된다는 사실을 실제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교회는 분열의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이미 충분하게 깨끗해진 걸까요? 그렇다면 분열은 이미 극복되었을지 모릅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으로, 즉 예수님과 그 예수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행위로 돌아서는 일만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오직 그래야만 기독교는 주님을 믿고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한 징표와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일치를 위한 징표와 도구 말입니다. “오늘 네가 평화의 길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42).
3. 예수님은 그가 사랑하는 민족이 멸망당할 것을 내다보시고 우셨습니다. “이제 네 원수들이 돌아가며 진을 쳐서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쳐들어 와 너를 쳐부수고 너의 성안에 사는 백성을 모조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리고 네 성안에 있는 돌은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얹혀 있지 못할 것이다. 너는 하느님께서 구원하러 오신 때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3,44). 이 말씀에서 우리 기독교는 예루살렘이 기원 후 70년 로마에 의해서 정복당한 사실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에 대한 비슷한 예언이 복음서에 몇 군데 더 있습니다. 이 예언이 과연 예수님과 직접 연관되어 있는지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성전과 도시가 멸망하리라는 예언을 말씀하시면 안 된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그 도시와 민족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운명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달려 있다고 분명하게 생각했습니다. 옳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이 예수님의 복음 사신에 귀를 기울였다면 순교적 방식을 택한 젤롯당의 망상을 따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젤롯당은 하나님의 나라를 폭력으로, 즉 로마의 억압으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킴으로써 견인해내려고 했습니다.
근대 세계는 종교와 정치, 그리고 하나님 신앙과 전체 국민의 역사적 운명 사이에 있는 이런 연관성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사적인 문제일지 모른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면 국민들은 이데올로기에 귀속됩니다. 또한 국가에 대한 예수님의 복음사신이 배척당하면 국민들은 결국 나라를 대파국으로 몰아가는 젤롯당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4. 예수님의 눈물에는 자신의 사랑이 인간적으로 무력하다는 사실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기의 죽은 친구 나사로 때문에 베다니에 왔을 때도 이런 이유에서 울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갖게 되는 인간적 무력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이런 무력감의 순간은 영이 예수에게 임하여 자기 친구를 다시 살릴 수 있는 능력으로 가득 찼을 때 순식간에 극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전에 가졌던 무력감은 그런 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의 핵심도 결국 자기연민이 아닙니다. 또한 죽음의 힘 앞에서 말문이 막히는 현상도 아닙니다. 그것은 곧 보복하지 않는 사랑의 무력감, 즉 사랑의 행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무력감입니다. 위대한 사랑과 높은 뜻의 노력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이들의 고루한 적대행위와 무감각 앞에서 파괴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무력감을 단숨에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무력감의 고통은 감람산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예수님을 체념에 빠지게 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사랑이 무력하다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마지막 무력감에 이르기까지, 즉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에게 생명을 가져온 다른 사랑이 그에게 왔습니다. 예수님 스스로 생명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 사랑의 무력감은 곧 파괴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능력에 대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배척당함으로써 무력감에 빠지는 곳에서도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누가 그 사랑의 능력을 훼손시킬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의 무력감은 곧 사랑의 능력을 드러내는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즉 강압적이지 않는, 그러나 생명을 변화시키는 그윽한 능력의 징표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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