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의
사도신경 해설

차례

판넨베르크 머리말
역자 후기

1장: 나는 믿습니다.
2장: 하나님을
3장: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를
4장: 예수 그리스도를
5장: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의 주를
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
9장: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10장: 전능하신 아버지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을.
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12장: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인 (기독교적인) 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13장: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14장: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역주 색인


판넨베르크 머리말

이 책 <사도신경 해설>은 1965년부터 마인쯔 대학교와 뮌헨 대학교 신학부에서 여러 번 강의한 내용이다. 이 책의 목적은 오늘도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매 주일 예배 시마다 암송하고 있는 사도신경에 대한 현대적 비판과 해석을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중재시키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을 위해서는 우선 이 사도신경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적절하고 실질적인 방식으로 살펴보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사도신경에서 거론된 신앙의 내용이 오늘의 성서 비평적 관점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를 찾아보아야 하며, 마지막 세 번째로는 이 내용이 현대인들이 이해하는, 그리고 확신하고 있는 현실성과의 관련 속에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숙고되어야 한다.
논제로서 주어진 각 단락의 사도신경 본문은 루터 교회에서 오늘날도 역시 사용되고 있는 루터의 신앙고백문이다. (공동체가 아니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라는 구절은 사도신경의 전체 구조상 세 번째 항목에서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라틴어 원문의 의미에 훨씬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교개혁 전통은 ‘보편적’이라는 구절을 ‘기독교적’이라는 구절로 대체함으로써 이 보편성 문제를 참고 사항쯤으로 취급하고 있다. 교회의 보편성은 에큐메니칼 운동 시대에 더 이상 일종의 종파적 표식으로만 유효한 게 아니라 교회일반의 근간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교회의 특수한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체 인류를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개방성이 그 보편성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예견하고 있는 독일어 사도신경 본문의 통일된 텍스트를 실질적인 이유 때문에 몇 가지, 아니면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바꾸어야만 했다. 이는 곧 고대양식인 ‘지옥에 내려가시고’라는 구절이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시고’ 보다 훨씬 풍부하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사전 지식이 충분한 독자들은 필자가 몇 항목에서 지난날 표현을 수정할지 모른다고 확신하게 될 것이다. 좀더 근본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확실하게 암시된 바 있다. 1964년에 출판된 졸저 <기독론 개요>에서 필자는 당시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배척한 것은 예수의 율법비판에 따른 결과라고 했으며, 예수의 부활은 역으로 율법이 불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는 의미이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원칙적으로) 유대교가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을 내렸었다. 필자는 오늘 이것을 그 당시에는 불가피했던 결과라는 점에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때 내린 이 결론은 독일 프로테스탄티즘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던 생각으로서 율법종교와 유대교의 동일시를 전제했다. 그 이후로 필자는 이 둘 사이를 구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이제 필자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볼 때도 유대 역사의 하나님은 율법을 뛰어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때만 유대적 현상으로서 예수의 등장이 이해될 수 있다. 이 인식이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적 관계를 극복하게 만드는 광범위한 공동 기초를 받아들임으로써 분명히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의 대화를 훨씬 개방적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강의원고를 여러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출판하도록 용기를 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아내에게 먼저 감사한다.

1972년 정월
뮌헨에서
볼파르트 판넨베르크



역자 후기

내가 이곳 하양(읍)에서 살기 시작한 게 2년 가까이 됐다. 이곳에 오기 전에도 현풍(면)에서 십여 년간 살았기 때문에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사는 맛을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이곳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여전히 시골 풍경이다. 시골에서 사는 재미는 산과 들, 강과 숲을 곁에 둘 수 있다는 점이다. 농촌 풍경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층 아파트 때문에 마음이 쓰이지만 그래도 약간만 눈을 돌리면 멀리 팔공산을 바라볼 수 있고, 가까이는 환성산을 손에 넣을듯하여 늘 마음이 넉넉해진다. 차로 십여 분이면 족히 환성산 숲에 다다를 수 있다. 아직은 사람의 떼가 덜 묻은 청초한 숲이다.
언젠가 가족과 함께 그 숲속을 걸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저 꽃은 왜 저기 저렇게 피어있는 걸까? 이 숲속의 이 나무들은 왜 그런 형상을 하고 있는 걸까? 이 나무를 타고 오르는 다람쥐는 이 시간에 왜 저런 달음박질을 하는 걸까? 그것들을 보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이 경험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산은 무엇이고 강은 무엇이며 별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인가? 이 지구라는 별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상은, 그리고 우주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현상은 도대체 무슨 근원과 미래를 갖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은 우리가 인간적 조건 안에서 살아가는 한 떼어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생각해보라. 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존재와 시간과 생명과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어찌 모른 척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에게 이런 것 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것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다. 철학, 예술, 문학, 물리학, 교육, 정치, 그리고 심지어 에베레스트 등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행위는 이러한 궁극적인 것에 터하고 있다. 그 무엇보다도 종교는 이런 것에 더욱 철저하게 다가가려는 인간행위다. 사도신경의 전승사에 참여한 이들도 역시 이런 토대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세층의 구조로 짜여있다. 하나님, 예수, 성령이라는 삼위일체론적인 구조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 그는 우선 세상을 창조한 분으로 진술된다. 우리가 아는 한 이 세상의 창조보다 더 위대한 사건은 없다. 창조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에게도 역시 인간의 구체적인 몸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간의 몸과 연관된 현실성을 이해해야한다. 그 예수는 로마의 정치 사회 구조에 의해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정치 사회적 현실을 제외한 기독교 신앙은 추상으로 흐를 수 있다. 죽었던 그에게서 발생한 부활은 전무후무한, 유일무이한 궁극적 생명 사건이다. 우리는 생명의 세계와 현실을 귀하게 여긴다. 사도신경은 종말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한다. 이것은 종교적인 관심거리만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죽는다. 죽음을 향한다는 것은 현재의 삶이 잠정적이고 미완적이라는 뜻이다. 이런 전제에서 벗어나는 생명체는 아무 것도 없다. 생명체만이 아니라 물질도 사라지고 지구와 태양도 결국 사라진다. 따라서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사업가나 노동자, 선생이나 의사 등 모든 인간은 자신의 종말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종말적 현실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야 한다.
그렇다. 사도신경은 세계관이다. 기독교적으로 각인된 세계관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준거로 생각한다면 그 사도신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핵심을 붙들어야 한다. 그것은 곧 세계이며 그 세계적 현실이다. 이 세계에는 인간과 모든 동물과 식물, 산과 강과 사막과 바람과 하늘, 그리고 하늘에 속한 수많은 별들이 포함된다. 이 세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그리고 나와 이웃과 온 세계 사람의 운명을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다”라는 판넨베르크의 말처럼 이 세상, 그 만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을 이해해야 한다. 이 문제는 자신의 신앙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선교적 차원에서도 역시 중차대하다. 이런 노력이 바로 이 책에 오롯이 담겨있다.
역자가 볼 때 이 책은 인문학적인 방법론으로 사도신경을 해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일반에 대한 설명서들은 대개가 도그마틱하게(독단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세계현실의 진리론적 바탕에서 서술된다는 특징을 보인다. 말하자면 관념적인 기독교 교리를 실질(實質)적인 언어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 책은 낯설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이 책에서 열광주의적 맹신이 아니라 깨어있는 정신으로 세계와 정정당당하게 대화해나가는 기독교의 근본신앙을 기쁨으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역자는 이 책을 번역하면서 번역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다시 한 번 절감했다. 독일어의 언어개념과 그 구조를 따라잡는다는 것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은 우리에게 아예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졌다. 특히 조동사, 전치사, 구와 절, 그리고 독일어 특유의 언어변형 등을 한글 식으로 처리하는 게 힘들었다. 신학적인 글을 완전히 의역으로 처리해 버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단은 우리말로 어색하지 않는 한에서 독일어 문장이 드러내보이고자 한 그 의도를 살려보려고 했다.
이 책이 원래 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였기 때문에 평신도들이 따라잡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 같아서, 또한 판넨베르크의 독특한 신학적 착상에 대해 별로 이해가 없는 이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역자가 적절하게 본문의 중간 중간에 역주를 달았다. 대충 80개 정도의 항목이다. 책읽기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으면 좋겠다.

1999.10.
하양에서 환성산을 바라보며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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