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3세기의 로마 교회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세례고백 양식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에게 연관된다는 것과 (성령으로 잉태하사) 사람에게 연관된다는 구절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서로 구별되어 있지만, 이 표현 양식의 두 구조는 원래 하나로 묶여 있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두말 할 것 없이 분명하다. 즉 예수의 실존이 하나님으로부터, 즉 성령에 기초했으며, 그리고 그는 동시에 바로 인간적 방법으로 마리아에게서 출생했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명백한 사실은 1세기의 교회에서 동정녀 출생이 영지주의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예수의 참된 인간성을 징표하는 것으로서 인정되었다는 점이다. 영지주의자들은 구원자가 실제 인간으로 출생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가상적 몸으로 살았거나 아니면 인간과 가상적으로만 연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생각에 따르면 불변의 하나님이 시간 속에서 출생한, 가변적인, 고통을 당하고 죽어야 할 인간과 실제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2세기의 反영지주의 교부들’에 의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이 마리아라는 여자를 통해서 출생했다고 진술되었다. 이 출생 사건에서 동정녀라는 사실은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는 현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별로 강조되지 않는다. 예수 출생이 동정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기보다는 타당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다른 인간들과 같은 방식에 의해 출생하지 않았다는 것은 헬라시대의 사람들에게는 극도로 명백했다는 것이다. 이교도의 신화들은 제우스의 아들들인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의 경우와 같이 중요한 인물이나 영웅들의 신적인 유래를 보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는 삼손(삿 13:5), 예레미야(렘 1:5), 하나님의 종(사 49:5) 처럼, 그 ‘출생’이 선택된 고대 이스라엘의 위인들에게까지 소급되어야만 한다. 동정녀를 통한 메시야의 출생을 이사야가 선포하지 않았던가? 결국 구약성서의 헬라어 번역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다(사 7:14, 칠십인역, 마 1:23 인용).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주장은 이와 달리 그의 완전한 인간성을 제한하는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와야만 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동정녀 출생 전승은 역사성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의심을 받았으며, 이런 전승의 경우에 그에 앞서 발생한 사건이 사실적인 것으로 주장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의심이 그렇게 간단히 폐기되지는 않는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오직 두 신약성서 본문인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바울과 요한은 다소간 차이가 있지만 이에 반대하는 입장을 명확하게 견지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여자에게서 출생했고 율법 아래서 행했다(갈 4:4).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다른 이들과 특별하게 구별된다는 점을 말하고자 했다면, 바울은 예수가 다른 인간들과 같았다는 점을 말고자 했다. 바울이 예수의 기적적인 출생에 대한 표상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는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는 사라를 통한 이삭의 출생과 연관해서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갈 4:23, 27, 29).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예수에게 직접 적용시키는 게 아니라 약속의 상속자인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 의미에서만 적용시키고 있다(갈 4:28). 이러한 언급들은 바울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을 논쟁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일종의 분기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언급이라 할 수 있는 요한복음 1장13절은 기독교인을 가리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증거’ 된 자들이라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말씀의 성육신에 대한 문장(1:14) 바로 앞에 놓여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만이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를 전승하고 있다. 두 전승 중에 누가복음 1:26-38이 시간적으로 앞선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예수가 창조적인 하나님의 영으로 인해 마리아의 몸을 통해 출생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어야만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이 문장은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에 해당한다. 이 본문이 의미하는 바는 이 이야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 대한 일종의 구성적인 윤색과 설명으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해야할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근거임에 틀림없다. 원시 기독교 전승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역사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칭호가 예수의 부활과 세례에 소급됨으로써 다른 본문에서 이에 대한 다른 근거들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다룰 동정녀 출생에 관한 역사는 다른 곳에서 이미 주어진 칭호를 추가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게 틀림없다. 이러한 이야기는 그것이 주어진 실질적 진실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아이티아(aitia, 원인)와 근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목적과 동기라는 점에서 일종의 병원적 전설이라고 (혹은 민담*이라고) 불린다. 이 경우에 이 이야기의 주제라 할 가장 중요한 실질적 사실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 칭호에 대한 가장 오래 된 형식의 전승을 연구한 바에 따르면, 즉 이 전승의 출발점과 그 관심거리를 찾아보려는 연구에 따르면 이 형식이 역사적으로 가장 확실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예수에 대한 다른 칭호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일목요연하게 설정되어 있었다기보다는 초대교회가 예수를 이해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이 과정에서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Legende(전설), 혹은 Sage(민담)이라고 일컫는다. 본문에서 특히 병원(病原)적(ätiologische) 민담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러한 전설과 민담이 그 어떤 원인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예수현상을 사실적인 사건으로만 믿어야지 이렇게 해석하는 것을, 더구나 전설이니 민담이니 하는 것을 불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계시는 이런 역사적 해석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받아들여야할 접근방식이다. 이러한 연구방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대화하거나 믿기 힘든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 전승과정에서 드러나는 진리의 현실성을 찾아내자는 것이다.

동정녀 출생은 일종의 전설과 관계된다. 이 경우에 전승된 본문 자체가 전통적으로 전설이 출현하게 되는 동기와 정확하게 부합하고 있기 때문에 전설적인 관련성이 명약관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문제를 다룰 경우에 근본적으로 동정녀 출생의 역사를 부활 전승들과 구별하고 있는데, 이 두 부분은 자주 비교되곤 했던 것이다. 칼 바르트는 이 두 기적 이야기를 예수 역사의 입구와 출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곁길로 빠져드는 꼴이다. 물론 부활 전승의 전설적 요소들에 대해서도 역시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부활전승에는 동정녀 출생에서처럼 전체 전승이 유래될 수도 있는 그런 전설적 동기가 어떤 식으로라도 밝혀질 수는 없다. 부활전승의 발전은 그것이 여러 차원에서 접근될 수 있는 전설적 확장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인 면에서 역사적 근거에서만 이해된다. 이 역사적 근거는 그 전승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는 그것이다.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은 전체적인 면에서 볼 때 가장 오래된 전승본문에 명시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설명하려는 동기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기독교가 말하는 부활신앙의 근원에 대해서는 아무리 날카로운 비평가라 하더라도 이와 비슷한 논증을 시도하지 않았다. 부활전승에는 이러한 설명이 결코 첨가되지 않았다. 이것은 양 전통의 형식과 전승의 전례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과연 기독교 사신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각기의 전승에 내재한 근본적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원시 기독교의 사신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멀리까지 전파된 게 틀림없다. 더구나 이러한 동정녀 출생이라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복음의 핵심에 근거하지 않은 그리스도 사신은 애초부터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다. 여기서 핵심문제는 전체 기독교 선포의 실질적 근거다. 그러나 동정녀 출생의 역사는 이와 달리 상대적인 주변적 현상일 뿐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부활절 전승은 기독교 선포의 실질적 기초이지만 동정녀 출생 전승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거들기 위한 종속변수이다. 이는 곧 초대교회의 관심이 온전히 부활에 달려 있었지 동정녀 출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이 전설의 동기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 정확하게 접근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히 다음과 같다. 이 전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이 그 뿌리를 여전히 유대적 영역에 두고 있기 때문에, 정확히 말해서 헬라 사상으로 각인된 유대 기독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전설에 관계된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최초로 제시하고 설명한 이들이 이 칭호에 담긴 오래된 의미에 대해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됨은 결코 초자연적 출생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즉 예수의 동정녀 출생을 언급했던 첫 번째 사람들이 이를 통해서 분명하게 의도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신학적 동기는 예수가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또한 요한의 세례 이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동정녀 출생 이야기의 전설적 성격에 대해 지금까지 언급된 이 모든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 담긴 그것의 진리순간*을 보아야만 한다.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이 신학적 동기는 바로 예수의 부활에서도 역시 타당했다. 왜냐하면 이 신학적 동기가 부활 이전의 사신에 대한 확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학적 동기와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는 그의 고유한 인격체에 관계된 확증, 따라서 이 인격체의 근원으로 소급되고 있는 일종의 확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Wahrheitsmoment(진리순간)이라는 말은 예수의 본질이 원시 기독교 신자들에게 드러나고 인식되는 그 순간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비록 전설적 성격의 지평에 놓여 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부활한 메시야라는 인식과 고백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앙에서 여전히 진리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동기는 이미 앞서 언급한대로 원시 기독교에서 예수의 선재성에 대한 사상으로 연결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은 예수가 하나님과 일치한다는 점을 확증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가 그의 사명에서, 그리고 그의 인격체에서 그가 인간적으로 출생했지만 하나님의 영원성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선재성이라는 생각은 후에 선재적인 하나님의 아들이 성육신되었다는 표상 구조에서 동정녀 출생과 연결되었다. 성육신 사상은 기독교인들이 부활절 신앙에 근거해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현재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했는가라는 점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성육신 신앙은 예수의 사신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는 도래하는 하나님의 현재를 자신의 고유한 등장에서, 즉 자신의 말과 행위에서 표명했기 때문이다. 성육신 신앙은 하나님이 현재적으로 예수와 함께 한다는 확신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최종적인 형태를 이룬 형식이다. 이 경우에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인간됨과 육신입음에 대한 신앙은 예수의 출생 역사에 담겨있는 고유한 목표와도 상응한다. 이처럼 성육신적 신앙고백은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성육신 사상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전승이 근원적으로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설명과 모순되며, 또한 이 신학적 동기가 이러한 전설의 출현에 근거한다는 설명과 모순된다. 즉 예수가 하나님에 의해 마리아로부터 출생했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면, 그는 선재성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그 이전에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의 선재성이라는 의미에서 그가 하나님이라는 설명, 그리고 그의 동정녀 출생에 대한 표상을 통해 이러한 선재성과 모순된다는 설명이 각각으로 제기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갈등 가운데서 선재성 사상에 보다 큰 실질적 무게를 두어야만 한다. 만약 예수가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활이 부활절 이전의 사명을 보증한다는 의미이며, 또한 이 사명이 예수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신적인 권능을 기초하고 있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의 세례나 공생애의 출발, 그리고 그런 것들의 시작과 특별하게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인간성을 처음부터 구별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의미인 예수의 부활은 그의 출생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선재성 사상에서 표명되고 있듯이 하나님의 영원성과 관계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오늘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정황에서 어떻게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는 내용을 예배의 고유한 신앙고백으로서 아뢸 수가 있는가? 지금까지 숙고한 모든 것은 이 문장이 더 이상 우리의 신앙고백일 수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오늘의 기독교인은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유래하고 있는 그 의도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일까? 출생 설화에 있는 이 표현의 의도가 하나님의 영원한 본질 가운데서 예수의 아들됨이 담지하고 있는 선재성 사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늘의 기독교인은 이 의도들을 보다 확실하게 구분해낼 수 있다. 이러한 의도에서 이 고백양식이 신앙고백으로 수용된 것이다. 우선적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실제로 역사적 인물인 나사렛 예수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했다. 하나님은 인간적 조건 하에서 인간적으로 위장한 것이 아니다. 즉 자기 의지에 따라서 다시 내던져버릴 수도 있는 그런 위장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이러한 인간과,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과 궁극적으로 결합하였다. 여기에 두 번째 요소가 속한다. 이는 예수가 자기 역사의 어떤 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간성 가운데서 처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통치를 중재하는 자였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동정녀 출생이라는 양식은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와, 그리고 이 인간과, 또한 이 인간을 통한 인류와 하나님의 결합이 갖는 궁극성을 말한다 하겠다. 대개의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이러한 의도에 대해서 예수의 동정녀 출생이 갖는 역사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적으로 무언가 다른 표현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는 우리가 신앙고백을 어디서 어떻게 드러내야 할는지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물려받은 표현이 우리의 선택이 아닐지라도 이러한 신학적 의도에서 충분히 조화를 이룬다. 이 조화는 이 신앙고백이 교회의 신앙적 표현으로서 초기 기독교인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에까지 대물림 했다는 사실을 정당화한다. 다른 대안을 찾아보려보려는 것은 단순히 이러한 형식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전체 신앙고백을 훼손시키게 될지 모른다.* 이 신앙고백은 역사를 통해서 고전적인 형식으로 이어져온 기독교 일치의 징표이며, 또한 이 신앙고백에는 오늘의 교회가 대체해버릴 수 없는 예배적 기능이 기초하고 있다.

*이 문장의 독일어 원문은 다음과 같다. Die Alternative wäre ja nicht eine Änderung nur dieser Formulierung, sondern damit des ganzen Bekenntnisses überhaupt. 판넨베르크의 신학이 기독교 전통과 단단히 연대해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정녀 출생문제가 새로운 현실성 안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어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방식으로 신앙고백을 하려고 한다면 이는 단순히 형식의 변화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신앙고백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판넨베르크가 말한대로 예수의 인간성과 선재성을 동시에 드러내고자 하는 동정녀 출생의 신학적 의도를 분명히 인식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체 기독교의 일치를 위한 소중한 신앙고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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