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묻히셨으며



사도신경이 예수의 고난을 각각 세목별로 얼마나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에 대한 언급은 예수의 고난이 매우 공개적으로, 그리고 확실한 역사적 불빛 가운데서 전개되었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 사건의 개개 진행과정이 세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묻히셨다고. 이러한 묘사 가운데서 특별히 강조되고 있는 점은 예수의 십자가형이 그를 완전히 죽음에 이르게 했으며, 이 죽음은 매장을 통해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영지주의적 적대자들이 논쟁을 제기한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야말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죽음의 극복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형과 매장에 대한 주도면밀한 논의를 통해서만 이 사도신경 문서가 담고 있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을 따라잡을 수 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이 시점에서 자기표현을 놀라울 정도로 절제하고* 있다. 오직 사건에 대한 일련의 결과만이 명시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예수 죽음에 대한 원시 기독교적 해석은 없다. 사도신경에는 예수가 모든 예언자들의 운명을 감당해야만 했다는 고대사상이 (눅 13:33, 34이하) 개입되지 않았다. 이 신앙고백은 구약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예수 죽음의 神적인 필연성에 대한 일언반구도 없다. 신적인 필연성이라는 사상은 원시 기독교 문서에서 매우 다층다기하게 확산되었던 것인데도 말이다. 원시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의 이해가 속죄로서 표현된다. 성만찬 전승은 ‘많은 이들을 위하여’(막 14:24) 혹은 ‘우리를 위하여’(눅 22:20) 흘린 피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수 죽음의 해석이 우리 죄를 위한 보상금의 지불로서(막 10:45), 제의적 의미에서 속죄제물로서(롬 3:25, 히브리서), 인간과 맺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이 체결되었다는 약속의 제물로서(고전 11:25, 눅 22:20) 설명되고 있다. 이와 같은 예수 죽음에 담긴 신적인 필연성은 구약성서가 인용된 본문들의 증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모든 그림들은 그의 고난이 우리를 대신해서 수행되었다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사상인데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매장을 특별히 강조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사도신경은 원래 세례 받을 때나 예배드릴 때 사용된 고백문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요약적이어야만 했을지 모르지만, 사도신경에 묘사된 예수 고난은 그런 실제적인 차원에서 보더라도 지나치리만큼 담백하게 표현되어 있다. 참된 진리는 어떤 화려한 수식이라기보다는 절제된 서술에 담기는 게 아닐는지.

어떤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리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고자 하는 이는 예수의 체포와 판결이 그의 사신이나 활동에 담겨있는 독특성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한 자신의 마지막 여정에 나섰을 때 복음서에서, 특별히 수난예언에서 제시되어 있듯이 죽음을 직접 모색했다는 주장은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오늘날 주석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의견에 따르면 수난예언들은 예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예언은 후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에게 기대한 사건을 부가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수난사건의 성격이 사실 그대로의, 또한 아무도 예지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 수난예언들이 일언지하에 예수에 의해 진술된 것으로 치부되면 안 된다. 물론 세례요한의 죽음을 경험했으며 유대전통에 있는 예언자들의 수난전통을 알고 있던 예수가 예루살렘 도상에서 다가올 파멸적 종국의 가능성을 내다보았으리라는 가정을(눅 13:32) 무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과정의 의미는 예수가 스스로 희생하려고 미리 계획해 놓았던 목표에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수도인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의 사신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거절도록 촉구한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의도적으로 준비된 예수의 자기희생이 어떻게 이해되어야만 했는가? 어떤 목적으로 이러한 희생이 수행되어야만 했는가? 예수의 죽음이 세상의 죄인들을 용서한다는 사상에 근거해서 이 사건은 예수에 의해 의도적으로 야기된 활동이라는 해석이 복음서에 추가된 것이다.
예수 공판과정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 게 별로 없다. 예수는 로마인들에 의해 사회적 선동을 일으킬만한 자라고 의심받은 것 같다. 십자가 명패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선동가로서, 메시야 참칭자로서 십자가에 달렸다. 사회를 선동했다는 의혹은 예수가 메시야 칭호를 요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시적으로 물리치고자 했다는 점에서 틀림없이 일종의 비방이었을 것이다. 예수의 공판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유대당국이 이 일에 관여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예수가 빌라도에게 넘겨지기 전에 유대의 고위법정에서 심문받았다는 사실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더구나 충분한 법적 근거도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유대당국이 그 사건에 관여하지 않아야만 잘못된 비난에 맞서 예수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었으며, 당연히 그래야만 했을 것이다. 어떤 동기에서 유대당국은 이 일에 간섭해야한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이유에서 예수는 무고하게 총독의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그렇게 쉬운 게 아니다. 어쩌면 유대 고위층이 두려워 한 점은 만약 이 문제에 간섭하지 않고 내버려둘 경우에 예수에 대한 백성들의 인기가 유대 고위층을 오히려 선동적인 이들이라고 의심할지 모른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또한 다른 이유에서 예수와 유대전승의 옹호자들 사이에 분명한 갈등이 있었다. 예수의 전반적 태도에서 드러난 전권요청*은, 예수가 이를 통해서 율법의 권위를 거부했는데, 예수의 태도를 외관적으로만 판단하고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 사신에 담겨있는 고난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던 모든 유대인들에게 틀림없이 신성모독으로 비쳤을 것이다. 신성모독 개념은 그 당시에 매우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에 율법이 언급하는 신적 권위를 훼손하는 행위는 일거에 무릎이 꿀려져야만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예수가 율법에 전승된 말씀을 산상수훈의 ‘반명제’에서 토로한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말합니다.”라는 주장은 신성모독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마도 유대 고위법정의 중재를 수포로 돌아가게 한, 즉 성전의 영원성을 거절한 예수의 언급과 흡사하다. 더구나 유대 당국이 돌을 던져 예수를 처형한 것이 아니라 그를 로마의 오판**에 내던져 판결을 받게 했다는 것은, 이것은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예수가 죽을만한 죄가 있다는 로마의 확신에 기초하고 있든지, 아니면 유대 당국이 예수 추종자들의 분노를 피해보려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어쨌든지 예수의 공판, 판결, 형집행에 담긴 고유하고 심층적인 동기는 이러한 갈등에서 모색되어야만 한다. 이 동기에서 예수는 자신의 태도 전반의 성격이 갖는 결과로 인해 유대 당국과 적대적 관계에 빠졌다. 이 동기는 정확하게 신성모독이었다. 이런 정황에서 유대당국의 대리자들이 예수를 비난하고 그 공판에 협력했을 때, 그들은 개인적인 혐오감에 근거해서 처신했다가 보다는 오히려 이스라엘 전승과 유대백성의 대표자로서 처신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렇게 처신함으로써 백성의 참된 선택과 소명이라는 명분에 머무르지 않고 더 적극적인 데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고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그들의 합법성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예수 부활을 통해서 자신을 알리려 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예수의 선포는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로 인해서 등장하게 되었으며, 부활절 이전의 모호한 상황 가운데서 예수가 율법에 대한 충분한 존경의 자세를 갖추지 않은 탓에 전통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으로 비칠 수 있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임박에 근거해서 공생애 중에 바리새인이나 제사장 등 유대의 종교당국자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전권적으로 선포했다. 심지어는 모세의 율법까지 상대적으로 평가하면서 자신의 가르침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로 인해서 결국 유대 고위층과의 갈등 속으로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예수가 사회를 선동하려 했다는 로마당국의 판단을 가리킨다. 그 당시 로마의 식민정책은 종교, 문화, 교육 등, 그 지역의 모든 문제를 원주민의 자유판단에 맡길 정도로 유연하고 관용적이었지만, 사회소요에 대해서만큼은 가혹하리만치 준엄했다. 예수는 원래 그런 사회혁명적인 메시야 사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지만, 로마는 이 문제에서 만큼은 과민할 정도로 반응했기 때문에 이런 오판을 내린 게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당시 유대 지도층이 어느 정도의 무게로 예수의 공판에 관여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유대인 모두에게 하나님 살해라는 짐을 지우므로 불거진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인의 적대감으로 인해서 거의 2천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공정하게 논의되고 있지 못한 상태다.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의 적대감이라는 끔찍스러운 역사는 우선 이방인 교회가 유대인들을 예수공판에 참여한 인류의 대표자들로서 인식한 게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는 구별하여 예수 죽음의 책임을 그들에게만 돌렸다는 오류에 기인했다. 매우 비기독교적인 마음으로 유대인들에게 책임을 돌림으로써 비유대적 인간들이 죄책에서 벗어나고자했다. 이로 인해서 바울이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했던 하나님의 선민인 유대인과 기독교인들과의 연대성이 파괴되었다. 예수의 십자가에 근거해서 유대백성들과의 연대성을 파괴해버림으로써 유대인을 향한 기독교의 적대감을 결정적으로 사전 준비한 셈이다. 또한 이러한 적대감은 하나님이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 자신의 이스라엘 백성을 최종적으로 유기했으며, 아브라함의 선택을 그들에게서 빼앗아서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에게 위임했다는 비성서적 이해에서 드러났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관계를 이처럼 오랫동안 짓누르고 있던 이러한 주장은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WCC) 제1차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권고안이 채택됨으로써 교정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회는 “십자가 처형 사건의 책임을 오늘날 유대인들에게 부과하면 안 된다. 그 책임은 인류 전체에게 해당되는 것이지 한 종족이나 한 사회의 문제가 아니다.” 비슷한 의미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문은 유대민족과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했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에 의해 비난받고 쫓겨난 이들’이라는 주장을 반대한다는 입장이었다.
오늘날 예수의 십자가로 인해서 유대인과의 연대성이 훼손되었다는 주장만이 교정되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그 십자가는 사실 에베소서 2:14-16에 따르면 유대인과 이방인을 화해시켰다. 오늘날 기독교인과 유대인의 대화를 위해서 유대인들이 역사적 시공을 초월해서 그 당시 행정 당국자들의 행위와 일치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에 근거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유대 당국이 그 추종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라도 이 수난 사건을 아무 구별 없이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에게, 또한 오늘의 유대인들에게 짐을 지을 수 없다.” 물론 이 문장은 예수 수난의 책임을 개인적인 관점에서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은 따라서 그 당시 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없는 개인들과 유대인의 후손들에게 예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고 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이해에 기초하고 있는 질문, 즉 유대민중의 이름으로 예수공판에 관여한 유대정권이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행동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이것이 바로 결정적인 요인이다. 한편으로 좀더 정확하게 지적한다면 그 당시 유대정권이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유대민중의 공식적 대표자들로서 예수공판에 관여했다는 사실에 관련된 문제는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그를 재판한 이들만이 아니라 전체 민중과 또한 그들을 뛰어넘어 전체 인류에게 해당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궁극적으로 말해서 이 사건이 로마의 대리자인 빌라도의 관여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뛰어넘어 로마정권의 국가적 통치에까지 이르는 것과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판결의 합법성만이 아니라 선민의 이름으로 판결을 내린 유대 재판관들의 적법성도 역시 부정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결론이 나온다. 즉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유대민중과, 또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인류와 상관이 없다면 결국 예수를 재판한 이들의 적법성은 이스라엘의 권위적인 상속자의 주장으로, 그리고 이에 근거해서 예수를 초월하는 유대민중들의 본질적인 전승의 주장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고. 유대민중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과 연결되어 증명된다. 이 하나님은 재판관들이 예수를 정죄한 것과는 달리 그를 부활시킨 분이며, 예수가 이미 앞서 그 하나님을 도래할 나라의 하나님으로 선포한 분이다. 유대인도 역시 부활절 사건의 불빛에서 예수에게 한때 내려졌던 판결을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민중의 합법적 대리행위가 아닌 것으로 교정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러한 교정이 명시적으로 기독교 부활절 신앙의 기초에서 발생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는 유대전승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는 건 아니다. 이 경우에 예수에 대한 유대적 판결을 교정할 가능성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지, 어떤 개인을 예수에 대한 판결의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문제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이러한 판단에는 예수의 죽음에 담긴 대리적 의미가 이미 전제되어있다. 이 대리적 의미는 앞서 발생한 모든 것들이 부활 사건에 대한 전망에서 새로운 각도로 제시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 스스로 예수의 요청에서 자신을 알렸다. 이 예수는 모세의 권위에 맞서 있었기 때문에 율법적인 유대인들에게는 신성모독자처럼 보일 수 있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예수의 수난에 관여한 이들의 입장이 뒤바뀐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나님이 스스로 예수에게 자신을 계시했다. 이 예수를 신성모독자로서 판결한 그 사람들이 신성모독자로 드러나게 된다. 이처럼 예수는 엄밀한 의미에서 그들을 위해서, 그들을 대신해서, 즉 재판관들이 판결을 통해서 덮어씌운 신성모독의 죄 때문에 죽었다. 재판관들이 고립된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민중의 당국자로 처신함으로써 예수가 당한 십자가의 죽음이 갖는 대리적 능력이 그들 집단을 뛰어넘어 전체 민중에게, 더욱이 전체 인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유대민중들이 하나님 앞에서 전체 인류를 대신하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에 대해 기독교가 주장하는 실질적 기초는 이런 상황에서 이해되어야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예수 부활로 인해서 빌라도와 그를 통한 로마의 관여가 완연히 드러났으며, 또한 로마를 통해 당시 세계에 구체화된 정치 세력이 예수의 죽음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 경우에 예수의 사신과 정치 세력의 요구 사이에 있는 갈등이 그 배경으로 놓여있다. 사실 이러한 갈등은 예수가 유대인들로 하여금 로마의 식민 통치 권력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는 이유에서 내려진 정죄가 어떻게 자신의 논리성을 주장했는가 하는 방식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가 도래할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에 대한 그 통치의 전권을 선포함으로써 로마 제국주의의 정신적 근본이 허물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다음 세기에 걸쳐서 기독교인들이 로마 황제들에게 신성한 경배와 희생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지평의 사실이다. 예수가 배타적으로 이해한 하나님의 권세는 인간의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정치적 통치 질서의 명령을 거부한다. 이러한 날카로운 충돌은 콘스탄틴 황제 이후로 황제의 통치를 하나님 통치의 지상적 모형으로 이해하려는 고대의 기독교 전통을 통해서 유화되었다. 그러나 원래는 이와 달리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권세와 정치적 권세가 전반적으로 날카롭게 충돌한다. 예수 부활이 신적인 통치방식이라는 점이 분명해짐으로써, 이런 경향이 변증적 관심에서 나온 기독교 전승에 의해 일찌기 억압되었을지라도 그에 대한 판결행위는 바로 존엄의 죄(crimen laesae majestatis)에 해당된다. 로마의 대리자는 이 존엄 때문에 예수를 자칭, 혹은 거짓 선동가라고 처형했다. 사실은 여기서 손상된 존엄은 하나님의 존엄이지 더 이상 로마 황제의 존엄은 아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시키고자 한 정치적 통치가 그 경향을 드러내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정치적 통치가 절대적인 구속력을 독점하려는 모든 곳에서 작동하는 경향이다. 동시에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이라는 불빛에서 분명해진 것은 인간이 이러한 정치적 통치의 요구를 양심적인 차원에서까지 의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일 세대 기독교인들이 황제제의를 반대함으로써 확증했던 것처럼 말이다.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서 개개인은 사회가 요구하는 절대적 구속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통치가 항상 유죄판결을 받는 것만도 아니다. 정치적 통치는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린 자를 다시 살림으로써 정치적 판결을 허물어뜨린 그 권위에 굴복 당하게 되며, 이 굴복을 받아들인다는 조건 하에서 자유로워진다. 왜냐하면 이런 차원에 근거해서 예수의 십자가형이 갖는 대리적 기능이 언급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치가인 빌라도는 하나님과 맞서 예수를 판결함으로써 예수가 짊어져야만 했던 존엄의 죄에 대한 징벌을 받았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판결을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불의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에서 지적된 바와 같다. 이런 입장에 따르면 대리의 동기는 물론 예수의 부활을 통해서 담판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모든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대리와의 유비를 통해서 그 적합성이 획득된다. 이 대리는 예수의 부활이라는 시각에서 예수가 유대 재판관들과 맺는 관계에서 읽혀져야만 하는 그것이다. 어떤 한 사람이 이미 실효되어버린 징벌을 감당하는 경우에는 이 대리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 오히려 이를 통해서 훨씬 심각한 파멸이 초래될지 모른다. 왜냐하면 분명한 징벌이 보상되지 않고, 또한 그 죄책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리적 의미는 예수 공판 과정에서 있었던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예수의 사신에 따라서 모든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의 사신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제시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이들을 위한 그의 죽음은 신성모독의 징벌을 감수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 징벌을 제거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大사죄일에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명령에 따라서 민중들의 죄를 짊어져야할 숫염소를 광야 길로 내보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세상의 죄를 없이할 어린양의 길로 내보냈다. 기독교 전통은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면서 이 사실을 노래했다.
이러한 숙고를 통해서 전제되는 바는 인간 사이에서도 대리 같은 어떤 것이 주어질 수 있으며, 특별히 인간적 죄책의 영역에서도 역시 대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교회의 대리론*은 16,17세기의 소치니주의자**들 이래 꾸준하게 비판을 받았고 논쟁거리가 되었다. 여기서는 특별히 도덕적 죄책에 대한 대리 가능성이 문제가 되었다. 일종의 금전적 과실은 나에게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지불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종의 도덕적 과실은, 그것과 관계된 자가 갚지 않을 경우에 결국 갚지 않은 것이 된다.”(D.F. 슈트라우스). 파우스토 소치니는 하나님이 죄 있는 자 때문에 죄 없는 자를 벌주었다는 것은, 특히 죄 있는 자들이 죄 없는 자의 권한 밑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불의하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증은 신성모독이라는 비난 앞에서 예수의 ‘죄 없음’이 부활을 통해서 결정되고 증명되었기 때문에 바로 앞서 제시된 사상적 과정과 비교해볼 때 빈곤하다. 특별히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 역시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 개념은 소치니주의적 비판에 근거하고 있는 그것이다. 인간 현존의 사회적 성격에는 모든 개인이 다소간 외부의 것들과 연관된 책임감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이 기초하고 있다. 개인은 자신의 행동에서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에 연루되어 있으며, 또한 다른 이들의 행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처럼 사회적 삶에서는 대리가 바로 일종의 보편적 현상이다. 이미 직업적인 면에서의 노동구조는 대리적 성격을 갖는다. 직업을 가진 자는 그 안에서 그가 봉사하는 전체와 상대하는 것이며, 그는 아주 특별한 행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특별한 행위는 다른 이들도 역시 나름대로 호의를 베풀고 있는 바의 그것이다. 개인이나 부분적 집단에 속해있는 선한 자와 악한 자의 입장이 전체를 대리해서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주 분명한 시대에서 경험된다. 이것은 독일 국민들에게 특히 동독인들의 망명을 통해서, 그리고 독일의 분단을 통해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분단은 완전히 다른 기준에 놓여있는 독일 국민의 한 부분으로 하여금 전쟁의 결과를 짊어지게 했다. 전체로서의 한 공동사회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개개의 구성원들을 대표하는, 혹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전체 사회를 대표하는 한 부분과 상관된다. 윤리적 책임감의 개인주의는 인간 삶이 갖는 현실성과의 연관을 배제하지 않는 한 이러한 연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반대로 인간의 공동삶에 대한 대리가 일반적 의미를 갖는다는 전제 가운데서만 예수가 당한 죽음의 대리적 의미가 의미심장하게 논의될 수 있다. 인간의 공동 삶에 있는 대리의 보편적 현상 없이는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에 대한 기독교적 교리는 무의미한 주장이 될 수도 있다.

*대리론(Stellvertretungslehre)은 말 그대로 예수가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징벌을 받았다는 의미다. 일명 대속론(代贖論)이라고도 한다. 판넨베르크는 도덕적 죄책에 대한 개인주의적 개념에 근거해서 이를 비판하는 학자들의 논리가 매우 빈약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오늘 인간 삶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이런 대리적 기능과 효과가 확실하다는 것이다. 결국 예수는 인류 전체를 대신해서 신성모독의 징벌을 받았지만 부활을 통해서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셈이다. 기독교의 대속론은 예수를 통해 인류의 구원이 가능한 토대를 제공한다.
**이탈리아의 법률가였던 소치니(L. Socini, 1525-1562)와 그의 조카 파우스토 소치니(F. Socini, 1539-1604)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반대했다. 이들의 주장에 동조한 이들을 가리켜 소치니주의자라고 하며, 오늘의 유니테리안주의가 이와 맥을 같이 한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은 우선 위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임한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다음과 같이 발전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모든 인류를 위한 대리자로 선택되었으며, 더욱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빌라도가 관여했다는 것은 예수 죽음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대리적 의미를 띠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에 담긴 보편타당성은 물론 모든 인간이 자기 삶 가운데서 각기 하나님에게 적대적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 그 하나님은 자신의 재판관들을 통해서 예수를 판결함으로써 드러나는 분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의 보편적 죄성을 모든 인간을 위한 예수 죽음의 구원론적 의미에 담긴 조건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모두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두가 신성모독의 현존적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즉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의 주도적 역할로 인해서 예수가 신성모독자로 판결을 받았다는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예수는 유대 민중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위해서 신성모독의 징벌을 대리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죄의 보편성은 구원의 보편성을 가능하게 한다(롬 11:32, 3:21 이하).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그의 백성들에 의해 예수가 버림받음으로써 세계가 용서받게 된다,(롬 11:15) 이것은 바울에게서 일종의 보편적 주장으로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작용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었다. 왜냐하면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거절함으로써 율법의 세력이 제거되었으며, 또한 율법 없이 예수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사신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능력이 의미하는 명백한 사실은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죽지 말아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 능력은 이제부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혼자 죽으면 안 되고 오히려 죽음 가운데서 예수의 죽음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인간적 죽음이 예수의 죽음과 일치한다는 것은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에 담긴 기본적인 내용이다. 예수가 우리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에게 임하는 죽음의 성격이 바뀐다. 예수와의 일치에서 절망은 사라지게 되었으며, 이미 예수의 부활에서 드러난 생명을 통해 극복되었다. 신성모독자, 즉 하나님과의 모든 일치가 차단된 자의 죽음을 예수는 확실하게 물리쳤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이 생명의 신적 근원으로부터 차단된다는 확증이 바로 죽음이라고 한다면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이러한 분리는 죽음이 불러오는 궁극적인 가혹성이다. 예수의 죽음 이래로 예수와 일치하고 그에 대한 신뢰 가운데서 살고 죽는 자는 어느 누구도 이렇게 죽을 필요가 없다. 예수가 하나님의 확증을 받게 된 그의 죽음과 일치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의 절망을 벗어나서 그 희망을 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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