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지옥에 내려가시고


예수의 지옥*行에 대한 논의는 사도신경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추가된 요소라 할 수 있다. 2세기로 소급되는 로마 공동체의 세례고백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언급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4세기의 신앙 고백문에는 예수의 묻히심과 부활 사이에 음부에 내려갔었다는 암시가 확실하게 언급되었다. 이 고백문은 이런 진술을 통해서 예수 죽음의 운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해 보려고 했다. 즉 예수는 육체적인 차원에서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죽음이 의미하고 있는 바의 것,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구원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죽음이란 인간의 실존적 운명이 죄에 의해 상실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지옥(Hölle)은 음부, 하데스, 게헨나 등과 거의 같은 개념이다. 히브리어로는 아바돈, 헬라어로는 아폴레이아, 라틴어로는 페르디찌오로 표기되는 이 지옥은 구약에서 단순히 죽은 사람이 거하는 곳으로(욥 26:6, 시88:11), 랍비문헌에서는 파멸과 징벌의 장소로 이해되었다.

예수 죽음의 이러한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 이미 논의되었다. 예수는 분명히 자기 백성의 종교적 권위에 의해 버려진 자로서 죽었다. 이것은 유대인인 그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했다. 그가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고 위임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임박을 유달리 강하게 선포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임한 이 유기는 그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모든 인간의 죽음에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확증된다. 이 분리는 현존상실과 죄와 인간의 자기폐쇄에 담겨있는 고유한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으로, 자폐적으로 살아감으로써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된다. 죽음은 이것을 폭로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과연 죽으면서 이 사실을 경험하는가? 살아남은 자의 관점에서 볼 때 늘 그렇듯이 인간의 죽음을 그렇게 진부하게 진술하는 것이 바로 충격적인 게 아닐까? 우리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이 결코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다. 기독교 중세기에는 그런 준비가 실행된 적이 있었지만. 오늘날 대개의 사람들은 살아있는 동안에 죽음의 운명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 우리는 병과 죽음을 삭막한 병실 안에 숨겨둔다. 그리고 죽는 자들에게도 인간 죽음의 어두운 심연이 고통과 의식의 혼미로 인해서 거의 숨겨져 있다. 인간에게 임하는 죽음의 이러한 어두운 심연은 죽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제외되는 것으로서 경험되는 바로 그곳에서 의식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도래를 어떻게 알고 있는가라는 기준에 해당되는 문제다. 하나님이 도래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는 중에 그에 의해 제외된다는 사실을 고대 교의학은 지옥의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이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이라고, 그리고 영적인 고통이라고 본 루터의 해석이 실제로 정당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고통은 하나님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선포한 자가 경험해야만 했던 바로 그것이다. 즉 분명히 전권적인 하나님과의 유대적 전승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이 전승에 의해 찔림을 당했다는 말이다.

*양심적 불안(Gewissensnot)이라고 해서 예수가 양심적으로 가책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근본적으로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 혼란스럽게, 혹은 두렵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임박에 기초해서 행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율법에 의해서 처형당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유기 당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뒷부분에서도 양심(Gewissen)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양심은 단순히 자신의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을 뜻한다.

지옥에 대한 표상은 세계 심판에 관한 많은 像들에 그려진 각각의 경우들 중에서 분명히 환상적이다. 여기서 지옥의 고통에 대한 상들을 언급할 가치가 있는가라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결정적인 요인, 즉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일치에서 제외된다는 사실이 지옥 웅덩이라는 전통적 상들에서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옥 표상의 이러한 특징은 신학이 무엇을 고수했는가라는 점에서, 혹은 전율에 관한 무성한 환상에서 무엇을 해방시켜야했는가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하나님의 임박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임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사실상 지옥일지 모른다. 여기서 지옥의 ‘장소’에 대한 질문은 일종의 부적절한, 그리고 우리에게 낡아빠진 사고방식이다. 오늘의 자연경험에 근거한 세계의 시-공적 좌표에서 하늘이나 지옥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물론 양심의 경험에 대한 회화적 묘사만이 문제는 아니다. 루터가 십자가에 달린 자의 양심적 불안을 그의 지옥행에 대한 전승과 연결시켰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의 현재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양심 경험이 지옥표상에 상응하는 유일한 실재일지 모른다는 것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대개의 사람들은 예수에게 특징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각기의 경험에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지옥에 대한 경험도 역시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 이유는 지옥에 대한 경험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임박에 대한 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단순히 무시해버림으로써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또 하나의 개념은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이다. 이 문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예수가 육체적으로 죽임을 당했을 때 자신의 양심(Gewissen)에서 지옥의 현실성을 경험했다는 것은 예수의 운명이 지닌 특별한 부분에 속한다. 양심,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인간의 의식과 지옥경험의 상관성은 인간경험에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등장하는 현상은 아니다. 이 상관성은 인간의 일상적 경험에서 곧바로 드러나지 않고, 오히려 예수 죽음에 담긴 특별한 경험의 상황을 성격화한다.
신학사적 맥락에서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해석이 지금까지 진술된 것과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제 그것을 설명해야겠다. 예수의 지옥행이 예수에게 고통이라기보다는 승리를 뜻한다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지옥행(行)은 승리행(行)으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기독교 예술사에서 자주 제시되었다. 즉 지옥에서 악마를 제압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를 지옥의 웅덩이에서 건져내신 부활의 그리스도로 말이다. 이와 비슷한 견해가 이미 신약성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가 죽은 자의 나라에 내려갔었다는 언급이 유일하게, 명백하게, 그리고 보다 밀접하게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전서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옥에 있는 영들에게도 가셔서 선포하셨습니다. 그 영들은, 옛적에 노아가 방주를 짓고 있는 동안에, 곧 하나님께서 아직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하지 않던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벧전 3:19 이하)라고 한다. 다른 유대 문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언급된 ‘영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같은 편지의 후반부 구절에서 암시된다. 베드로전서 4장6절에서 이르기를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다”고 한다. 예수를 통한 지하세계의 복음 선포는 개종설교를 의미할 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은 자들도 역시 기독교 복음을 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로 살았을 때 예수나 기독교 복음을 만나지 못하고 죽어 지하세계에 가 있는 이들에게도 임박한 심판 앞에서 예수를 통한 구원이 열린다. 기독교 주석학자들은 이미 고대 교회시대에서 주장되었던 이러한 대담무쌍한 사상을 약화시켰다. 그들은 거듭해서 이르기를 하데스에서의 예수 설교는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의로운 자들만을 향했거나, 아니면 일단 육체적으로 살 때 이미 의로운 자들로 판명된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전서는 예수가 회심설교를 행했다는 점에서 이런 주장들을 뛰어넘는다 하겠다. 일종의 우주적 구원이해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그리스도가 아담을, 즉 인간을 지하세계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사상을 완전하게 표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오리겐에서도 발견되며, 기독교 예술품에서 보는대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표현에서도 거의 전제되어있다.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이것을 예수 수난의 진술로 이해한 첫번째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양측의 표상*은 서로 배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들은 일종의 상호적 관계를 갖는다. 양자는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이다. 이 안에 양자가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유기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죽음이 의미하는 하나님의 유기를 견뎌냈기 때문이다. 예수 죽음의 대리적 의미는 죽음을 극복했다는 표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승리의 의미는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에서만 유지하게 했으며, 또한 십자가의 의미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옥행을 부활한 자의 몫으로 돌린다는 것은 함축적이었다. 십자가에 달린 자, 혹은 특히 부활한 자가 지옥에 갔는지 아닌지에 대한 양자택일의 문제는 오늘날 이러한 상(像)들을 사물적인 것으로 판단하려는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문제는 구 개혁주의 교의학과 구 루터교 교의학 사이에서 전개된 첨예한 논쟁점이기도 하다.

*이것은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두 가지 표상을 가리킨다. 하나는 예수를 승리자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난자로 그린다. 판넨베르크는 이 두 전승이 배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예수 죽음에 대한 해석 안에서 연관된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의 지옥행은 성서에 근거한 보편적 개념이 아니라, 5세기 초의 아크빌레이아 신조에 등장하는 구절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앞서 판넨베르크는 4세기의 신앙고백에 그 암시가 들어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지 이 개념은 세계구원을 선포하는 기독교가 그 구원의 보편성을 확대시킬 수 있는 신학적 의미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인들이 거리낄 필요가 없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우리말 사도신경에는 예수의 지옥행에 대한 구절이 생략되어 있다.

원시 기독교가 회심설교로 행한 선교설교의 像에서 지옥에 대한 예수의 승리를 묘사하고 있는 베드로전서의 사상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발생한 대리의 우주적 영향력을, 그리고 이로써 중재된 구원의 보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주 제기되었다. 우선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언제 계시되었는지, 예수 안에서만 실행될 수 있는 구원이 인간에게 언제 드러났는지. 그렇다면 예수 등장 이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기독교 복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많은 이들은 어떻게 되는지?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는 들었지만 복음선포를 책임진 기독교인의 잘못으로 인해서 그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 모든 사람들은 멸망에 빠지는가? 그들은 예수를 통해 인류에게 열려진 하나님의 임박 앞에서 영원히 제외되고 마는가?
이 절박한 질문들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은 답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질문들은 신앙고백에서 언급된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양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이 양식을 신앙고백에 포함시킴으로써 이러한 질문에 답변하려고 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이 양식은 신약성서의 근원과 더불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인류를 위해 예수에게서 발생한 일은 예수와 또한 그에 관한 사신과 결코 접촉해본 적이 없는 인간들, 혹은 예수와 그의 역사의 진리성을 결코 한 번도 실제적으로 깨닫지 못한 인간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사람들의 생명은, 이 생명은 그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것인데, 역시 예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연결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곧 예수가 그의 팔복 말씀에서 언급한 이들에게 해당되는 게 틀림없다. 이들은 예수와의 만남과 전혀 상관없이, 오직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상태 때문에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다. 이 하나님의 임박과 그의 나라가 예수에 의해 선포되었다. 예수를 결코 알지 못하던 이들도 역시 그들이나 우리가 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인류와 인류역사를 통해서 예수와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된다. 이 하나님은 바로 예수가 선포한 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의미하는 바는 그들에게 구원 아니면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구원받는다고 확실하게 보장할 수는 없다. 명시적으로 예수와 일치해 있는 이에게만 구원은 보증된다. 그리고 이 일치에서 예수와 더불어 죽음을 극복한다는 희망이 보증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나머지 사람들 역시, 예수 이전에 이미 죽은 이들 역시 그에게 나타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구원 신앙의 이러한 보편주의에서 죽음의 나라를 극복한다는 기독교의 신앙고백과 예수 그리스도의 지옥행에 대한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의미를 아는 이는 오늘날 사도신경의 이 항목이 그렇게도 많은 이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되었다는 것을, 또한 이로 인해 이 항목이 그렇게도 자주 거부되었다는 사실을 유감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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