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예수의 부활이 말하고자하는 핵심은 기독교 역사의 단초라 할 역사적 생기(生起)다. 특별히 부활절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의 역사를 형성하는 출발점이다. 그리고 이 출발점은 동시에 이 신앙고백을 유지하는 실질적 기초다. 역사적 근원과 실질적 기초는 여기서 일치하고 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약속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그의 사명을 확증한다는 점에서 십자가에 달린 자의 부활을 통해 이미 주장될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그리고 이를 통해서만 이스라엘에 의해 유기된 예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로, 우리와 모든 세계의 主로 증명되었다. 우선 예수의 부활로부터 언급되어야 할 요점은 예수의 인격에서 기초된 하나님의 육화*다. 성육신 교리는 예수의 부활이 그의 등장과 그의 인격 전체에 소급해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만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결국 예수 부활의 빛 가운데서 그의 죽음은 인류에게 대리적으로 완성된 속죄의 의미를 획득한다. 만약 예수가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지 못했다면 그의 죽음에 그 어떤 구원론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그의 사명을 파손시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그 이외에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확대되어 있는 언급들은 실제적으로 부활절 사건에 근거하고 있다. 즉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으로 들림을 받아 하나님의 권능에 참여했다는 신앙고백 및 예수가 심판하러 재림할 것이라는 기대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귀결이라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육화(肉化, Fleischwerdung)는 성육신(成肉身, Inkarnation)이라는 신학용어에 대한 독일어의 서술적 표현이다. 이는 곧 영원자존하고 무소불위하며 불가시적이고 초자연적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몸이라는 한계 안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며, 여기서 역사적 예수와 하나님의 아이덴티화이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예수의 부활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질적 근본들을 다루어야만 한다. 이것이 파괴되면 기독교 신앙에 연관된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다만 그 부활사건 자체로서만 근본적인 의미를 획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앞서 있었던 예수 등장과의 연관에 속한 문제다. 부활사건에서 예수와 연관된 모든 사건들이 새롭게 기초가 잡히며, 예수 등장, 그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의 전권에 대한 결정적 확신이 전대미문의 방식으로 확고해진다는 점에서 이 연관성이 완전히 새롭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것은 종말의 불빛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지, 신적인 세계심판을 통한 인류사의 단절로서는 아니다. 예수의 부활은 한편으로 그 배경에 따르면 예수의 지상적 등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미래적 관점에서 만물의 변화와 심판의 종말론적 기대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전체적인 연관은 우선 기독교의 신앙적 방식으로, 그리고 예수 부활이라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이 연관은 이러한 사건으로 시작하고 진행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돌아가자. 이러한 사건들이 주장하는 바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죽은 자로부터 예수가 부활했다는 진술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가장 단순하고 일반적인 생각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생명으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표상은 적절하지 않다. 예수 부활의 핵심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생명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르고 새로운 생명으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기독교의 부활희망과 마찬가지로 원시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다.
이에 대한 암시가 “부활하다.” 혹은 “죽은 자로부터 소생하다.”*는 문장의 언어적 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언어 구조에 따르면 일종의 그림말,** 일종의 메타포가 핵심이다. 잠에서 깨어나 일어서는 것처럼 여기서 죽은 자들이 그렇게 유비적으로 다루어진다. 전대미문의, 그리고 죽음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이것은 죽은 자에게 기대되는 미래의 일인데, 그림처럼 잠에서 깬다는 일상적 과정의 유비로서 표상된다.

*독일어 구절은 다음과 같다. auferweckt werden von den Toten. 죽은 자로부터 소생한다는 이 표상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일상적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어떤 사실적 사건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건이다. 예수 스스로 부활한 게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그렇게 새로운 존재로 변형되었다는 것이다.
**그림말(Bildwort)은 그림을 뜻하는 Bild와 말을 뜻하는 Wort의 합성어로서, 회화적인 언어표현, 혹은 비유적인 진술 등을 가리킨다. 뒤에 나오는 bildhaft나, bildlich, Bildrede라는 단어도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역자는 ‘bild-’를 경우에 따라서 ‘그림식의’나 ‘유비적인’이라고 옮겼다. 판넨베르크의 설명에 따르면 성서의 부활사건은 어떤 사실적 묘사로서 가능하지 않고 회화적인, 유비적인, 메타포적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표상에 담긴 메타포적 구조를 주시한다면 다시 산다는 것을 그 말에 완전히 일치하는 사실적 내용으로 간주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죽은 자가 다시 산다는 것을 완전히 非메타포적으로 언급할 수도 있긴 하다. 이런 경우에는 부활신앙의 그림말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현실성으로의 변화가 핵심적인 문제일 때만, 그것이 언급되어야만 할 경우에 메타포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성을 우리는 사실 알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반복되는 현실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언급하기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지상적 생명으로 신뢰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몸의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고린도전서 15:35-56에서 바울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얻게 되는 육체적 현실성을 어떻게 생각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명시적으로 질문하고 있다. 여기서 그에게는 미래적인 몸이 현재적인 몸과 다르다는 것, 즉 육체적인 몸이 아니라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일종의 ‘영적인 몸’을 입는 것을 의미했다(고전 15:43 이하). 그렇다고 해서 그가 그 어떤 플라톤적인 전통에 근거한 의미로서 형체가 없는 정신적인 것을 주장하고 있지는 않다. 바울의 생각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생명의 창조적 근원이며, 영적인 몸은 이러한 근원과 나뉘어져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우리의 현존에 존재하고 있듯이- 이러한 근원과 연결되어 있어서 어떤 죽음도 이러한 생명을 더 이상 끝장낼 수 없는 생명체다. 불변하는 영적인 몸이 현재의 일시적인 육체적 몸과 갖는 관계를 바울은 극단적 변형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살과 피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썩을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고전 15:50). 다른 한편 각기의 ‘변형’은 바로 죽어야할 현재적 육체와 맞닿아 있다.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합니다.”(고전 15:53). 일시적인 것이 ‘영적인’ 몸으로 변형하는 것은 한편으로 매우 극단적이어서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변형은 현재 우리의 지상적 몸과 맞닿게 되며, 우리의 현재적 현존과 연관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재적 몸 대신에 무언가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만들어져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이러한 주장은 특별히 예수의 부활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기대해야만 할 부활에도 적용된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 양자는 상관관계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기독교인이 희망하는 부활의 기초다. 바울은 이렇게 생각했다. 모든 문제는 기독교인이 그리스도에게 이미 나타난 그 현실성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고.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단지 신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극단적 변형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것은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유일한 보도를 접했을 때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 보도는 부활한 자를 직접 목격한 이에게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부활한 자의 현현에 대한 여타 모든 신약성서의 보도는 그것이 한 형식을 이루어 우리에게 닿기까지 많은 손을 거쳐 왔다. 그러나 바울에게서만, 그리고 부활의 현실성에 대한 그의 언급에서만 우리는 목격자의 고유한 말들을 듣는다. 바울에게 목도된 그리스도의 현현은 지금까지 고려된 모든 사실에 따르면 그것이 일종의 다시 살아난 육체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바울은 부활의 현실성에 대해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변형으로 말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가 경험한 하나의 현실성은 모든 지상적 생명과 완전히 다른 종류에 해당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미래에 대한 기독교의 희망과 부활절 신앙이 말하고 있는 죽은 자의 부활은 때때로 마술의 역사에 관한 고대문서에서 보도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소생이나, 그리고 복음서 기자들이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예컨대 나인성의 청년(눅 7장)이나 나사로(요 11장) 사건에서 예수가 실행한 죽은 자의 소생과 엄밀하게 구분되어야만 한다. 약간 후기의 전설적 보도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일단 불문에 부친다 해도 이 이야기들이 이 사건을 예수의 부활에 대한 증거로서, 그리고 미래에 대한 원시 기독교의 희망으로 간주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다른 의미였다. 예수를 기적적인 구원자로서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는 나사로와 나인성의 청년 사건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이 일시적인 생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핵심이다. 이 사건에서 복음서 기자들은 생명으로 돌아간 자가 나중에 다시 죽으리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일시적인 재생은 예수의 부활에서 이미 나타난,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적용되는 그러한 현실성에 대한 징표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부활을 말하는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명이, 즉 영원하고 어떤 죽음으로도 한정되지 않는 생명이 핵심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 생명은 우리에게 알려진 생명체의 생명형식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하는 그것이다.
바울이 부활 생명에 대한 진술 방식의 표상을 과연 어디서 획득했는가라는 질문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본다면 부활한 예수가 그에게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바울은 이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그러나 정의로운 사람에게만 일어날 사건인데, 그 기대가 형성된 고대의 유대 전통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만 한다. 이 전통은 무엇보다도 소위 묵시문학 문서에서 발견된다. 이 묵시문학은 페르시아 시대의 유대세계에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 그리고 특히 무엇보다도 기원전 마지막 2세기 어간에 기원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발단은 구약성서 이사야 24-26장, 다니엘서가 대표적이다. 부분적으로 이에 해당되는 고대문서가 적지 않다. 그런데 다른 문서들은, 예컨대 상이한 묵시문학 작품집이라 할 에녹書* 같은 것들은 더 이상 구약성서의 경전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이러한 작품들의 어떤 내용들은 그 해석과 편집이라는 점에서 오늘날 여전히 논쟁거리인데, 이것들은 예수 시대의 바리새파 운동에 의해서 논란이 분분했다. 특별히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대한 기대와 연관된 부분에서 특히 심했다.

*묵시문학 문헌인 에녹서는 야렛의 아들이 기록한 여러 위경들 중의 하나다. 거기에는 창세기 5:18-24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에녹이 하늘로 옮겨져서 하늘나라의 비밀들과 하늘에서 미리 예정된 인간사의 과정을 보았다는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이 에녹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적으로, 묵시문학 문헌들은 주로 기원전 2세기 어간에 유대인들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문학 장르다. 악한 옛 시대(과거의 에온)는 곧 멸망하고 선한 새 시대(새로운 에온)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강한 기대가 여기에 자리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는 요한계시록이 대표적이다.

미래에 이루어질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한 묵시론적 기대는 신적인 세계 심판이라는 표상에서 볼 때 이와 유사한 페르시아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부활을 기대하는 유대의 신앙이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교도화되었다는 것이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유대 전승에서 유래한 질문에 답하는 것이, 말하자면 개개인들에게 성취되는 하나님의 의로움이 핵심이다. 하나님의 의로움은 인간의 삶에서 증명되어야 한다. 이런 삶과의 상응이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것은 개개인에게서 성취되는 게 틀림없는데- 일종의 피안적 보상을 요청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초대교회 당시에 죽은 자의 부활은 바울에게 처럼 어디서나 구원의 현실성으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명예를 얻어야 할 이들과, 그리고 심판이나 영원한 징벌을 받아야 할 이들이 통과해야할 문이라고 이해되고 있었다. 이 경우에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변형 사상과 확고하게 연결되었다. 특별히 부활한 의인의 변형은 하늘의 천사와 별을 소유하는 것과 같은 막강한 권세를 획득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고 해석된다. 우리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의 경우를 본 것처럼 변형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물론 초기 기독교 시대의 묵시문학 작품 가운데서, 말하자면 바울과 동시대인들에게서 정확하게 반영되었다.
어쨌든지 예수는 부활을 변형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마가복음 12장25절에서 예수는 부활 후의 삶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의 질문에 답한다. 그들은 하늘의 천사 처럼 될 것이며, 장가도 안가고 시집도 안갈 것이라고. 누가복음 20장36절은 이에 더 보충해서 이렇다. “그들은 더 이상 죽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각각의 모든 경우에 전통적 암시로 표현되고 있는 “천사와 같다.”라는 말은 지상적 인간에 비해 완전히 새로운 실존 방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바울이 ‘영적인 몸’이라고 말할 때 보여준 관점과 비슷하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예수도 철저하게 유대신학의 분명한 전통에서 보는 대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에 담겨있는 생명형식의 표상을 따랐다.
묵시문학 문서에서 그 골격이 잡혀 있는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희망이 형성됨으로써 바울은 일찍이 예수의 다른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이 없었던, 반면에 자신에게 나타난 그런 특별한 사건이야말로 부활신앙에서 볼 수 있는 현실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따라서 바울은 일단 죽은 자의 부활 가능성을 예수부활의 전제라고 확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고전 15:16). 다른 한편 예수부활 사건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보편적인 기대로 돌아간다. 그것은 그저 그런 기대만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연결된 이들에게도 그들이 미래에 예수에게서 이미 나타난 이런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증한다. 이에 근거해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기독교인들이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점을 진술한 이후로 특별히 기독교적인 부활 희망에 대한 생각을 계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원래 가까운 미래에 기대되었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체된 상태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킨다(살전 4:13 이하). 유대교적인 부활 기대는 모든 이의 부활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유별난 구원에 대한 기대가 아니었다. 이 기대는 한편으로 구원의 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심판의 길이었다. 그러나 부활이 구원의 현실성으로 작용하는 경우에 이것은 모든 이들에게 약속된 것이 아니라 오직 의로운 사람에게만 약속된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의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항상 남아 있었다. 유대 전승에서는 이 질문이 율법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가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준거로 작용했다. 예수의 부활은 신앙을 통해서 예수와 연결되어 있는 이들에게 이미 예수에게 발생한 생명이 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이때 바울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부활에 대한 기대는 이미 구원에 대한 희망이 된다. 특별히 부활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십자가에 달렸다가 부활한 자와의 일치에서 그 기초를 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진리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는 이미 예수 부활의 사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부활의 사신에 대한 신뢰성 문제는 죽은 자가 부활하리라는 기대에 대한 일반적 질문에 달려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기독교의 부활절 전승을 역사적으로 판단하도록 한다. 죽은 자가 죽은 상태로 머물러 있고, 죽음이 완전한 마지막이며, 또한 죽음으로부터 깨어나는 것과 같은 그 무엇이 (어떠한 의미에서도 역시) 일어나지 않거나 한번도 일어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면, 예수부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이 진리론적인 점에서 매우 강한 편견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증거를 보다 정확하게 하려는 노력은 전체적인 차원에서 판단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더 이상 개인들에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다. 역사가에게 주어진 의무와 중요한 과업이 바로 이런 노력에 놓여있다. 모든 인간이 미래에 얻게 될 부활이나 혹은 의로운 자들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기대가 의미심장하게 다루어질 경우에만, 또한 그 부활이 인간 현실성의 현대적 이해와의 연관 속에서 생각될 수 있는 경우에만 기독교의 부활절 사신이 보도하고 있는 그러한 사건의 가능성이 실제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원래부터 폐쇄되어 있지 않은 하나의 가능성을 의식하는 토대에서만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은 역사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오늘날 잘 알려진 인간의 현실성에 대한 요소, 그리고 인간의 자명성에 놓인 조건에서 볼 때 완전히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상은 인간상황의 구성적 조건들과 의미심장한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가?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인간 실존의 육체성이라는 관점으로 아주 강하게 각인된 오늘의 인간론적 통찰에 기초해서 볼 때 인간 상황을 이전 시대보다도 훨씬 진지하게 인간의 자기이해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동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이 갖는 이러한 적극적인 중요성은 물론 비유적이고 메타포적인 성격 가운데서만 확실하다는 조건에서 인정되고 주장될 수 있다.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을 모든 인간의 경험이 닿을 수 없는 인간의 미래에 대한 초자연적 앎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활사건을 인간 경험의 연관에 끼어있는 일종의 이물질로 여기게 된다. 메타포적인 특징 가운데서만 이 부활은 자기를 이해해가는 인간 상황의 표현으로 파악될 수 있다. 우리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현존재에 대한 궁극적 질문을 그림과 메타포 형식에서 인식하게 되며, 또한 어떠한 그림으로 우리가 우리 생명의 의미나 무의미를 표현할 수 있는지 그 길을 찾아가는 문제가 결코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비유적으로 말한다고 해서 말하는 자에게 현실성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부활의 그 낯섦 때문에 일단 비유적 언급을 통해서 거론할 수밖에 없는 그 현실성이 중요하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에게 속한 특징은 고유한 죽음의 불가피성을 안다는 점이다. 그와 똑같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은 자기 현존의 한계를 넘어 인간 운명의 완성에 대해서 드러나게 질문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은 개인적 생명에서 기껏해야 단편적으로 이루어질 뿐인 그것이다. 이 한계를 알아야만 그 운명을 뛰어넘을 수 있다. 이런 앎이 없이는 그것이 전혀 성취될 수 없다. 물론 죽음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은 항상 머릿속으로만 성취될 뿐인데, 이러한 방법으로는 목표도 없고 불안정한 광신 밖에는 아무 것도 나올 게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서 많은 비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의 완성에 대한 질문이 없이는 죽음의 차안에 속한 생명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이에 반해서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의 불빛 가운데서 우리의 지상적 삶은 보다 거대한, 그러나 여전히 비밀 가운데서 은폐된 전체의 단편으로 제시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죽음의 피안에서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즉 우리의 현재적 경험에 숨겨져 있는 현실성의 차원에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은 자신의 인간적 운명을 확인하기 위한 표상을 획득하려고 거듭해서 시도했다. 이 표상은 우리 생명의 유한성에서 결코 그 완성될 수 없는 그것이다.
우리에게 완전히 숨겨져 있는 것에 대한 이러한 표상을 우리는 우리에게 알려진 유비로서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여러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의 문화적 전승에서 볼 때 헬라적 불멸신앙과 성서적 부활희망이 기독교적 종말론의 역사에서 결합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경험하는 기본적 이해에서 상호간 경쟁적인 표현형식을 취하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받아온 영혼 불멸 사상과 달리 오늘날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성서적 사상은 진지하고 적절한 것으로 증명될 수 있다. 보다 진지하다는 이유는 성서적 사유가 죽음의 한계 저편에 놓여 있는 모든 것과의 간격을 잠으로부터 깨어남이라는 메타포적 한계 안에서 생각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직접적인 앎에 대한 모든 요구를 억제하는 일종의 간격이다. 불멸성 교리는 이러한 앎을 주장했었으며, 육체적 한계 앞에서 영적인 경험을 철저하게 독립시킴으로써 이러한 요구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론에서 볼 때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그 언어의 비유적 성격에서 육체성과 영성을 확고하게 일치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보다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일치 없이 우리는 인간적 삶을 더 이상 생각해 볼 수가 없다.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사상은 죽음에 직면해 있는 인간존재가 명쾌하게 자신을 밝혀보려고 할 때 피할 수 없는 질문을, 즉 죽음의 숙명에 대한 질문을 특별한 방식으로 적절하게 제시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불가피한 질문이 자신의 자명성을 획득하려고 고유한 죽음의 진정성에 직면해 있는 이들에게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의 리얼리티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불가피한 질문은 생명의 비밀이 각기의 현재적 인식을 뛰어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게 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은 생명의 현실성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관점에 근거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며, 이럴 경우에만 이 질문은 편견에 의한 오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때 원시 기독교 사도들에게 선교의 근원이 되었던 그 일들이 부활의 기대에 대한 그림말을 통해서 해석되는 것 보다 훨씬 정당하게 해석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 원시 기독교는 이 그림말을 통해서 부활을 묘사해보려고 했다. 또한 이 그림말이 모든 사건들과 관련되어 있는 현실성에 대한 적절한 표현인가를 조사해보아야만 한다.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질문이 불가피하며, 또한 그것이 가능한 지에 대해서 분명히 해야만 한다. 기독교가 출발하게 된 그 역사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역사적 질문은 불가피하다. 또한 우리가 부활한 자의 현재적 현실성을 직접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증언에 근거해서 다시 믿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도 역시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즉 이 근거가 오늘의 기독교인들 입장에서 믿을만 한 것인지 질문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부활한 자의 현실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누가복음에 보도되어 있는 예수의 승천역사에서 잘 드러나 있다. 예수가 사도들 앞에 나타난 얼마간의 시기가 지난 후에 부활한 자는 그의 공동체와 분리되어 재림 시에나 등장하게 된다는 말이다. 아주 초기의 원시 기독교 전승은 부활과 승천을 밀접하게 연결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부활은 가장 초기 증언자들의 경우에 ‘하늘로’, 즉 하나님의 숨겨진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초기 증언자들이, 특히 바울 같은 이들이 누가와 똑같이 생각했다. 즉 부활한 자의 현현인 일련의 사건들이 끝나게 되었다고, 특히 바울에게 현현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제 예수는 종말 시에야 다시 오게 될 것이다. 그 중간 시기에는 부활한 자와 그 어떤 직접적인 조우가 없으며, 사도의 말씀만이 남아있게 된다. 이것이 증언하는 바는 예수가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부활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이 믿을만 하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수는 현재 살아있으며 활동하고 있고, 또한 특별히 그에게 발생한 부활이 선포됨으로써 현재에도 여전히 지속되는 이러한 부활사건의 현실성이 작용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언제나 예수가 그 당시에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보도에 기초되어 있다. 이러한 보도 없이 설교단에서 행해지는 모든 현재적 확증은, 즉 예수는 살아있다는 확증은 감동적인 과장이며 공허한 장광설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보도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예수가 현재도 여전히 부활한 자로서 살아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예수가 죽음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어 묻힌 다음에 곧 제자들에게 생생하게 나타났다는 보도의 신실성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가? 이제 이 보도는 분명한 시간*에 발생했음이 틀림 없는 분명한 사건을, 즉 이미 죽어 무덤에 묻혔던 예수가 현현했으며 빈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러한 주장이 옳은지에 대한 시험은 독자적으로 그리고 배타적으로 역사 연구의 수단에 근거해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소위 한번 일어난 사건에 대한 주장을 시험할 다른 길이 없다. 역사적 연구방법은 그와 비슷한 주장들을 시험해 보는 데서 찾아볼 수 밖에 없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시험에 타당한 관점들이 역사 연구를 위한 도구적 요소로서 증명될지도 모른다.

*사도신경은 예수의 부활이 ‘사흘 만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러한 날자는 고린도전서 15장4절에서 예수는 ‘성경말씀에 따라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바울의 증거에 근거하고 있다(행 10:40 참조). 이 말씀에 대한 암시는 항상 거듭해서 예수의 부활에 관해 전승된 날자가 구약성경의 분명한 구절과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추정하게 만든다. 우선적으로 호세아 6장2절이 이에 해당된다. “이틀 뒤에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시고, 사흘 만에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니, 우리가 주 앞에서 살 것이다.” 이 말은 유대세계에서 역시 죽은 자의 종말론적인 부활로 해석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의 부활절 전승에 밀접하게 적용되었다. 예수가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전승은 원시 기독교가 말씀을 증거하는 데 영향력을 끼쳤다. 이 영향력이 첫 기독교인들의 부활절 경험에서 역사적 동기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제거해버릴 필요는 없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 동기라는 것은 ‘말씀’의 전망 가운데서 그렇게 읽혀야만 하는 그것이었다. 이 경우에 특별히 예수의 빈 무덤이 발견된 그 시점을 생각했다는 것이다.(판넨베르크 주)

판단하는 자의 전체 세계 및 자기 경험이 그의 역사적 판단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경험이 끼치는 영향은 판단되는 사건이, 즉 다른 이들에 의해 주장된 사건이 평범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더욱 확대되기 마련이다. 어쨌든지 여러 종류의 역사가들은 현실성의 한 像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할 수 있으며, 그리고 나름대로 이런 상을 통해서 학문적 전망을 -물리학으로부터 인간론과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받아들일 수 있다. 역사적 판단의 가능성을 둘러싼 이러한 전이해가 개별적인 경우에 그것을 다루어야 할 역사가의 판단을 자주 앞서서 규정하고 한정한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서와 같이 일종의 특별한 질문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미 원시 기독교의 경우에도 일상적 사건이 문제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예수의 부활은 마지막의 돌입으로서, 곧 모든 인간에게 임할 하나님 통치의 종말론적 현실성의 개시로 이해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더 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원시 기독교는 예수의 부활이 우선적으로 종말적 현실성의 단독적 개입이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이런 경험은 묵시문학적 종말에 대한 기대의 지평을 심층적으로 변형시켰다.
역사적으로 판단하는 어떤 사람이 예수의 부활과 같은 사건을 현실적인 것이라고 실제로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 이외의 역사적 사건에서는 동일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그리고 현재 세계의 극단적 변형에 관계되어 있는 종말적 현실성의 개입을 고려할 수 있는가? 그는 이러한 종말적 현실성이 선취적으로 직감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우리의 이 세계 중심에서 이미 충만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을 가능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가?
과거의 사건을 비판적으로 보도하는 역사가는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고려하면 왜 안 되는가? 모든 사물의 마지막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사상이 또 하나의 다른 차원에서 진지한 것이라고 확증되었다면, 그 사상이 현실성에 대한 역사가의 의식으로 작용해서는 왜 안 된다는 말인가? 물리학적인, 생물학적인, 사회학적인, 심리학적인 일들의 경우에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현실성이,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메타포에서만 언급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그 고유성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비밀로 남아있을 경우일지라도, 선취적으로 감지될 수 있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숙고할만한 사실로 주장해서는 왜 안 되는가? 그 본질상 이미 충만하고 완전하게 관철될 수 있는 그것만이 발생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의 일상적 현실성은 현실성에 대한 비밀이 벗겨진 상(像) 보다는 훨씬 다층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종류의 가능성들을 고려하는 역사가에게는 자연과학과 갈등관계에 빠질지 모른다는 항변이 종종 제기된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항변을 자연과학자들에게서는 아주 드믈게, 물리학자들에게서는 최소한으로, 그리고 신학자나 역사가들에게서는 자주 듣게 된다. 그들에게는 자연과학의 교의학적 입장이 항상 광범위하게 입력되어 있다. 이 입장이 그들에게 거의 필요하지 않은데도 말이다.
자연과학은 주어진 것에 대한 법칙을 확정하고 묘사하고자 한다. 자연과학은 무엇이 원래 주어진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무엇이 아닌지를 판결하지는 않는다. 결국은 사건에 대해서 무엇이 고려될 수 있는지, 그리고 되어야만 하는지 찾아내고자 한다. 미래의 지평은 자연과학에 의해서는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 과거를 참작해서 현재에 알려진 자연법칙으로부터 지구와 우주의 전역사가 추론되어야 하며, 이러한 추론은 적당하고 경험적인 근거를 통해서 강화되거나 부정된다. 그러나 역으로 이러한 방법만으로는 어떤 다른 숨겨진 개개 사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한 그 무엇이 실행될 수 없다. 이전에 충분히 확증된 가설이 반대에 봉착하게 된다면 여기서 결국 믿고 있는 것에 대한 의혹이 일어난다. 이것은 전승된 주장을 역사적으로 연구함으로써만 결정될 수 있는 문제다. 그 어떤 하나의 개체 사건이 그 이외에도 타당한 자연법칙을 깨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말하자면 자연법칙의 개념을, 그것의 보편성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이것 보다는 오히려 다음과 같은 사실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 즉 잘 알려진 자연법칙의 효능에 관계없이 개개의 경우에 더불어 발생하는 미지의 요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낯설어 보이는 사건이 실제로 발생한다고 말이다. 물론 이에 근거해서 볼 때 그 주장된 사건은 그 이외의 진행과 닮아 가면 갈수록 훨씬 무게가 떨어진다. 따라서 매우 짧은 순간이 통과된 후에 얻게 될 신체의 소생은 그럴 개연성이 거의 없다 하겠다. 그러나 예수부활의 경우에는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판단을 위한 거점이 주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는 그 목표가 인간적 경험에서는 절대 가능하지 않은 영역에서 메타포로서만, 혹은 경험적으로 아직 완전히 상환될 수도 제어될 수도 없는 다른 형식의 언어로서만 언급될 수 있는 어떤 한 사건이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은 예수부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결정할 수 있는 궁극적 법정이 될 수 없다. 자연과학이 만능이라는 입장은 오늘날 지배적인 현실성 이해가 고전 물리학이 말하는 세계상을 통해서, 특별히 자연법칙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통해서 결정적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거듭해서 강력하게 제기된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은 그 양식을 통해서 자연의 현실성을 빠짐없이 진술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정한 전망 하에서만, 즉 법칙이라는 전망 하에서만 진술될 뿐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오늘날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고려하는 현실성 모델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모델은 우연성에 대한 전망을 자연의 법칙성, 그리고 생명, 인간, 자연과학의 역사성과 묶어낼 수 있고, 더구나 자연과학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비교될 수 있는 보편성을 요청할 수 있다. 이로써 자연과학의 보편화된, 그리고 단순화된 결과를 교의학적인 입장에서 현실성의 기본서술로서 받아들이며, 또한 모든 사건의 동형식화에 대한 표상을 창출해내려는 경향은 당연하다. 이 동형식화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나 의외의 것에 대한 어떤 공간도 허락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이런 자연과학의 만능주의적 입장을 피하는 것은 가능하며 또한 진지하게 생각해볼만한 일이다.
이것은 역사가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역사가는 과거를 판단할 때 원래부터 통상적이고 파악될만한 사물의 과정에 상응하는 그런 가능성들만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말이다. 역사가는 전승된 그 어떤 것도 점검받지 않은 채로 취급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다시 살아나게 될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의심하는 기준은 무엇보다도 유별나 보인다. 이러한 주장들은 고대문학에서 별로 특별한 것은 아니다. 표상적 형식에서 동일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성서 이외에서도 발견된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종류의 보도는 전설적인 특색을 매우 두드러지게 보인다. 따라서 원시 기독교의 전승들이 전설적 출현의 어떤 흔적을, 혹은 최소한 전설적 형태를 담고 있는지 연구해 보아야만 한다. 더 나아가 부활한 자가 현현했을 때 아주 분명한 정신 병리학적인 의미의 환각을 암시하는 흔적이 이 보도에 들어있는지 물어야 한다. 모든 이러한 질문은 분명히 숙고될 만하다. 그렇지만 역사가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반적인 사건의 규칙을 통해서는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발생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입장을 보여야만 한다. 특히 인간 현존의 어떤 독특한 현실성에 대한 질문이 오직 종말론적 像들 가운데서만 잠정적으로 답변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는 이는 이 현실성이 그에 의해 연구된 사건에서도 역시 관찰될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신약성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상이한 전승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그중에 한 가지만을 취사선택해서 설명할 수는 없다. 대신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상황을 요약해보도록 하자. 예수부활에 대한 전승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설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하게 전설형태를 보이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이 부활전승은 그 판단이 궁극적으로 논쟁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전제에 반대하고 있다. 특히 부활 현현보도나 혹은 예수의 빈무덤에 대한 전승을 언급할 때 분명하다. 더욱이 지금까지 부활한 자의 현현을 환각으로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너졌다.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하거나 빈약하다. 이러한 상태에서 과연 어떤 사건이 예수에게 일어난 부활 전승의 토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기독교의 근원을 이해할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기독교의 출현에 대해 질문하고자한다면, 다시 말해서 기독교 일 세대들이 무엇을 믿었는가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초기 역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들을 오늘의 관점에서 질문해야한다면 부활절 문제에 직면해야만 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바는 이 부활절에 관한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시도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 예수 부활의 원시 기독교 전승에 대한 모든 비판적 시각을 거친 다음에 얻게 되는 종말론적 희망의 언어를 통해서 이 사건이 진술된다면 이러한 진술은 이를 부정하려는 모든 주장을 가장 명쾌하게 극복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판단은 확실하게 지지받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판단에 대한 반론이 제기될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실질적 진실은 이에 대한 모든 논의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게 아니며,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 전승을 세밀하게 검토하게 되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이 정당화될 수 있다. 이럴 경우에 앞서 언급한대로 예수부활에 관한 명제는 항상 역사적 요청을 함축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명제가 어떤 분명한 과거의 사건을 주장하고 또한 이러한 주장으로 역사적인 후속질문과 검증에 자신을 내맡기기 때문이다. 이 명제는 이러한 검증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역사적 명제라는 특징을 가질 수 있다. 실제적인 것에 대한 최종적이며 명명백백한 결정은 물론 이런 데 묶여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으로 판단해야할 경우에 예수의 부활 이외에서는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수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주장은 특별한 기준에서 생각할 때 논쟁적인 문제로 남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주장이 현실성 이해에 대한 근본적 질문에 매우 다층적으로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 부활에 대한 이러한 계속적인 논쟁이 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기독교인은 그 문제에 대해서 한두 번 놀란 게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궁극적 미래가 예수에게 나타난 새로운 생명을 분명히 하나님의 새로운 인간성에 담겨있는 보편적 현실성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예수의 부활이 모든 여타의 인간적 현실성과 동형을 이룬다는 의미에서 편입되어야 할 모든 보편적 경험지평은 우선 만물의 종말론적 성취를 통해서 기초된다. 이로써 기독교는 신앙에 관한 기본적 언급이 세계와 서로 논쟁을 벌여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부정되거나 그 기초가 붕괴되어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기독교를 믿을만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그런 논증이 전혀 시도되지 않는다면,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은 무책임한 주관주의나 맹목적 권위에 근거한 신앙을 주장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이렇게 취약한 기초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실질이 온전할 수 없다. 오히려 예수가 부활했다는 주장 안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역사적 요구는 불편부당한 검증이 실행되는 경우에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성과의 관계에서도 역시 지지받을 수 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미래와 지금의 이 세상 사이에 놓인 간극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우리의 現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리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全시대에 걸쳐 성육신 신앙으로 이 사실을 주장했다.

*판넨베르크는 예수부활 사건이 더 이상 논쟁의 여지를 허락하지 않는, 이미 결정되어 버린 사실적 역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에 이르기까지 그런 역사적 판단과 논쟁을 필요로 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실제로 예수부활의 사실성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부활체험은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이들의 부활신앙에 터해 있는 오늘의 기독교는 끊임없이 진리와 현실성과 계시 논쟁에 참여해야 한다. 말하자면 부활사실에 대한 진리론적 해석 작업이다. 이를 통해 개방된 미래와 역사 가운데서 진리론적 근거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종말에 발생하게 될 ‘죽은 자의 보편적 부활’이 선취된 사건이다. 오늘의 기독교 신학은 이를 역사적으로 논증해나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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