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늘날 기독교 전승을 언급할 때 특별히 자주 논의되는 진술은 아니다. 그 이유는 물론 기독교 신앙이 성령에 대해서 무언가 일반적인 동의에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성령에 대한 현대적인 언급이 어떤 기준에서 볼 때 난해하며,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것에 대해 동의 얻는 일을 방치해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성령이라는 말을 영적인 현실성으로 생각하는 경우에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모든 영적인 것이 기존의 본질적 생명을 진술하고 있는지 아닌지, 또한 영적인 것이 이런 진술만을 위해서 존재하는지 아닌지, 그리고 각기의 물질적인 생명조건과 다른 독립적인 리얼리티가 없이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현존의 기능으로 판단되어야만 하는지 아닌지. 더군다나 이런 방향에서 성령에 대한 진술을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는 하나님의 영을 인간의 영과 문화적 조형물로 바꿔치기하는 것이라고 매도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영을 경험하는가? 세계 속 있는 교회와 그 선포는 우리가 그 안에서 성령과 관계를 맺는 현실성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바는 교회의 현실성이 인간에 의해 조직된 직제와 그 관리라는 사실을, 그리고 종종 너무 지나치게 인간적인 역사를 수반하고 있는 인간적 기구라는 사실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복음이 인간적으로만 선포되는 게 아니며, 성찬식이 인간적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고, 기독교인의 신앙 경험도 역시 인간적으로만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성을 더 많이 드러낼 수 있는 그 무엇이 어딘가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성령의 신적 현실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유별난 종류의 것들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성을 어디서 경험할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럴듯하게 보이는 이러한 유별난 종류의 것들이 교회에서 인간적 조직이나 인간적 태도와만 관계를 맺는 게 아니라 성령의 신적인 현실성과도 관계를 맺는다는 이 주장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에 그 기초가 교회의 권위와 그 선포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어떤 근거에서 이런 주장의 권위를 신뢰할 수 있겠는가? 또한 교회의 자기 영광과 자기숭배 문제에 대한 의혹을 어떻게 막아낼 수 있는가? 교회의 삶을 규정하는 현실성으로서 성령에 대해서 언급하는 신약성서가 그것에 대한 근거라고 한다면, 도대체 바울이나 에베소서가 무엇을 서술하려고 했는지, 어떤 근거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이러한 근거들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증거능력이 되는지 아닌지, 혹은 시대적 한계로서 다루어져야하는지, 아니면 시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볼 때 부활한 그리스도와,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계속 작용하는 그의 현존과 관계를 맺고 있는 영을 우리가 경험한다면, 이렇게 계속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이 어떤 근거에서 주장될 수 있는지, 또한 무슨 근거에서 이러한 현존이 영의 개념을 통해서, 그리고 신적인 영의 개념을 통해서 특징적으로 언급되어야 하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이런 저런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려 한다면, 또한 이해될 수 없는 문제들을 그러한 확증에 떠넘기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어쨌든지 ‘성령’*이라는 진술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것이 어떠한 토대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오직 이럴 때만 이러한 진술이 말장난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앞에서 매우 확실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다.

*성령으로 번역되는 독일어 ‘der Heilige Geist’에서 Geist라는 단어는 생명, 생명력, 활력, 정신, 마음, 영혼 등 여러 가지 뜻을 갖고 있다. 영어로는 spirit, mind, soul 등으로 번역된다. 독일어에 비슷한 뜻의 Seele라는 단어가 있긴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육체와 반대되는 개념인 영혼을 뜻한다고 한다면 Geist는 인격적이고 창조적으로 활동하는 능력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확실하게 구별된다. 따라서 성령이라고 할 때 der Heilige Geist는 말이 되지만 die Heilige Seele는 안된다. 판넨베르크는 이 장에서 성령을 기독교적인 경건주의나 인간론적 실존 차원이 아니라 정통적인 삼위일체론에 근거해서 창조와 사랑의 영으로 설명하고 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조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제한적으로 언급되었던 성령에 관한 항목에다가 일련의 해석적인 진술을 첨가했다. 첫째로 성령은 ‘살리는 자’라고 일컬어지며, 다음으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라는 점이 다층적 관점에서 설명되고, 마지막으로 성령이 예언자들과의 연관에서 언급된다. 성령에 대한 이러한 첫 규정은 사실상 기본적인 것이다. 즉 성령은 생명의 근원이며, 따라서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라고 말이다.
영에 대해서 성서가 가장 기본적으로 피력하고 있는 사상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낯설어 보인다. 우리는 이 낯설음을 한두 번 불안하게 느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학은 오랫동안, 그리고 여러 차원에서 성령을 매우 좁은 의미로 해석해왔다. 즉 성령이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것의 원리로서, 무엇보다도 초자연적인 신앙의 인식으로서 다루어졌다는 말이다. 기독교 전승이 현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불가해한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기독교가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자기를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신앙적 진리는 이성을 통해서는 결코 밝혀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으로 인해서 성령은 점점 더 무언가 완전히 비밀스러운 능력으로 간주되었다. 이 능력을 통해서 전적으로 불가해한 것이, 즉 모순적인 것이 합리화되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은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고착되었다. 고대나 중세 교회 때는 기독교의 신앙진술이 나름대로 그 내용을 논증해나갔다. 그런데 기독교가 현대에 들어와서 오히려 수세적 입장으로 빠져들었을 때 자신이 논증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에 대한 암시에 근거해서 신앙적 우월성을 주장함으로써 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다. 이런 태도는 기독교 사신이 감당해야할 진리론적 질문 앞에서 사뿐히 벗어나려한 일종의 도피로는 아니었나? 그리고 현대의 비판 사상이 제시하는 질문에 맞서 기독교 전승의 약점을 감추기 위해 기독교의 성령론을 무화과 잎사귀로 사용함으로써 성령론이 불필요하게 되고 그것의 가치가 떨어지게 된 것은 아닌가? 이 경우에 성령의 역할을 교회의 제도적 관심이나 개인주의적 경건성에 대한 관심에 둘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사실상 부수적인 의미다. 전승된 교리에 대한 비판적 질문에 직면해서 일종의 모험적인 자세로 구체적인 논쟁을 벌여나가는 대신에 성령을 바로 이러한 일에 한정시킴으로써 현대의 비판정신으로부터 교묘히 빠져나가는 면역만 키워나갈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적 경건에 대한 경험은 그 경건의 내용을 인간학적으로 명백하게 세워나가는 일과 상관없이 점점 더 그 기초를 상실해가는 초인간적 확신으로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권위적인 방식으로 확신을 주려는 관심과 절대적인 확신을 경건하게 경험하려는 관심이라는 두 동기는 상호작용을 통해 형식적인 권위 신앙으로 빠져들었다. 그러한 관심은 기독교 신앙으로 하여금 인간적으로 믿을만한 근거를 모색하지도 못하게 했다. 이 권위적 신앙이라는 것은 현대적 상황 하에서 더 이상 교회조직의 객관적 힘을 통해 보호받을 수 없으며, 이제는 오히려 그 기초가 유명무실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말하자면 권위적 신앙이라는 것은 주관주의적 자유의지이며, 절대적인, 그리고 의심을 단번에 요절내는 확신의 비합리적 요청으로서 절대적인 권위에 따라오는 이런 저런 문제점들을 간과하게 만든다. 믿는 자로 하여금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라는 강요는 권위적 태도와 광신적인 모습의 잠재적 토양이 되었다. 그 내용은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교환 가능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이제는 이러한 확신에 빠져드는 것이 잘못된 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오직 권위적 신앙에 의해서만 객관적 확신에 만족하게하려는 왜곡된 강요와 참된 신앙적 신뢰에 근거한 확신을 구별해야할 시대가 되었다. 이 신뢰에 터한 확신은 신뢰할만하게 행동하는 고유한 실존이 개입하는 전체적인 것에 놓여 있으나, 그렇다고 신앙의 내용에 대한 이론적 신뢰성을 절대적인 이론적 확신으로 대체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신앙의 내용에 의심의 영역을 허락한다는 것은 아직 완전한 마지막에 도달하지 못한 ‘순례적’ 교회의 실존에 속하는 문제다. 이것은 기독교적 실존의 잠정성에 속한다. 기독교 실존이 견고하게 지켜나가야 할 점은 항상 조건적으로 전승된 것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한 이런 상황을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확신에 빠짐으로써 뛰어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인들이 믿는 바의 내용을 하나님의 미래를 기다리는 미래의 경험에 맡겨둔다는 것은 신앙적 실존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대화의 능력을 갖게 한다. 기독교인은 자기 나름의 주관적인 증거를 통해서 이런 문제를 성령의 역사라는 절대화 속에 숨겨둘 필요가 없다. 오히려 신앙적인 증거가 잠정적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의 미래를 향한 개방성이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의식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다.
정신 주관주의*는 정신을 통해서 고유한 경험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절대적 확신은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는 도저히 도달될 수 없는 바의 그것이다. 이 정신 주관주의는 종교개혁시대의 ‘광신자’와 경건주의 유산에 뿌리하고 있다. 당시에는 외피적 교리의 권위에 맞선 신앙의 내면성이 핵심이었다. 이 경우에는 분명히 정신 주관주의에 나름대로 진리적 요소가 들어있었다. 그렇다고 이 주관주의가 그런 요소 때문에 19세기 독일 이상주의 때까지 현대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루터의 경우에는 주관주의가 별로 큰 역할을 못했다. 왜냐하면 루터는 영을 말씀에 종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신에 대한 외적인 말씀을 통해서만 옳바른 영을 받을 수 있으며, 이 영은 이 사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추가하지 않는다. 루터에게 성서의 말씀과 선포의 말씀은 항상 모든 이들이 이 진리를 볼 수 있는 게 아닐지라도 영의 진리를 그 안에 담고 있다. 이 말씀에서는 사실상 일종의 조명이 일어나며, 이로써 그리스도의 사신인 말씀의 진리가 개개인에게 주어진다. 진리는 영을 내적으로 작동시키며 영에 관한 고착된 선입견을 극복한다. 이런 조명은 말씀으로부터 파생되는 영의 기능이다. 그러나 루터에게 문자로서의 말씀이 진리를 자체적으로 담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말씀에서 보도되고 있는 것이 무언가 부가적인 것으로서 독자의 입장이 덧붙여져야만 할 중성적 역사가 아니라고 본다. 여기서 이 독자의 입장이라는 것은 원래 사신의 내용에서 아무 것도 근거될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부가적인 원리를 통해서, 즉 성령을 통해서 근거되어야만 했던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견해**는 우선 19세기 어간에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난해한 기독교 사신을 풀어낼 수 있는 초자연적 열쇠가 바로 성령이라는 견해로 인해서 이미 말한 대로 성서와 기독교 전승의 깊이에서 영적인 작용이 담고 있는 근원적 넓이가 소실되었으며, 또한 배경으로 물러났다.

*정신 주관주의(Geistessubjektismus)는 기독교 신앙을 매우 주관적인, 개인적, 경건적인 차원으로 몰아갔다. 인간 삶의 전체, 현실성, 역사, 해석의 지평들은 개인의 실존적인 경험 안에서 무의미해지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영성의 통전적 해석이 필요하다고 판넨베르크는 주장한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성서는 그것이 작성될 때부터 이미 성령으로 충만한 것이기 때문에 오늘의 독자가 부가적으로, 즉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다. 한국교회에서는 성령을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주술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성서해석에서도 영해라는 아주 특이하고 독단적인 방법론이 성행하고 있다. 그것을 기독교적인 믿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면서.

구약성서에서 영은 결코 초자연적인 인식의 원천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의 근원이었다. 여기서 영에 대한 표상은 바람, 공기, 그리고 숨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살리는 영으로 작용하는지 매우 인상깊게 묘사하고 있다. 거기서 피조물들은 야웨 창조주에게 의존해 있다고 진술된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께서 주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9, 30). 이와 같은 기본적 관점이 제사문서가 말하는 창조기사의 배경이다. 제사문서는 신적인 영의 태풍이 혼돈을 움직였다고 했다(창 1:2). 그리고 성서 두 번째 장에 있는 보다 오래된 창조기사에 따르면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생명체가 되었다(창 2:7).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 신적인 영의 이러한 일반적인 작용으로부터 탁월한 (카리스마적인) 능력의 작용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영에 적용된다. 즉 여기서는 생명력에 대한 특별한 기준과 하나님의 창조적 영에 속한 특별한 작용을 필요로 하는 아주 탁월하고 비상한 능력과 업적이 핵심이다. 영웅과 예언자의 경우에, 또한 가수와 예술가의 경우에서처럼. 이러한 모든 경우에 인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 이러한 능력의 특별한 작용과 관계된다.
이러한 성서적 사유와 달리 오늘날 우리의 신학이 성령론에 대한 성서적 진술의 넓이로부터 얼마나 먼 곳을 배회하고 있는지 자명하다. 이제 생명의 생물학적 현상을 신학적으로 설명해야할 때가 온 것인지 모른다. 생물학에 의해 연구된 생명현상과의 연관 속에서 모든 생명의 ‘영적인’ 근원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생명현상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영에 대한 언급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만 할지 모르겠다. 따라서 우선 성령을 신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작업이 성서적 전승에 걸맞은 넓이에서 착수될 수도 있다. 물론 생명을 말하는 현대과학 앞에서 이러한 작업을 실행한다는 것이 어렵긴 하다. 생물학은 생명현상을 내재적으로 살아있는 세포의 기능으로 이해한다. 고대 이스라엘은 생명의 근원이 생명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우리가 신적인 영을 생각할 때 바로 이 문제가 핵심이다.
그렇다면 성서와 생물학이 생명현상을 이렇게 명백하게 상반적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어떤 유비를 통해서도 이 둘 사이가 중재될 수 없는 것일까? 생명현상에 대한 현대적 견해에 따른다면 생명체들은 그러한 생물학적인 견해를 뛰어넘는 현실성과 그 어떤 관련성도 없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그 생명체들의 생명실행*을 위해서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분명히 이러한 비의존성이 존재한다. 각기의 유기체는 자기 생명실행을 위해서 일종의 독특한 환경을 필요로 하는데, 그 환경 안에서 유기체가 영양을 공급받고 전개되며 성장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주변 환경은 자체로서 닫혀있는 게 아니다. 환경은 공간적으로 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구성된다.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함으로써 동시에 미래를 위해서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완성시키고 변화시켜나간다. 이런 종류의 환경들이 진화 과정과 연관된다면 무엇보다도 시간적 순간이 중요하다. 따라서 각기 유기체는 그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것을 뛰어넘어 생존해나간다. 인간의 세계 개방성은 모든 생명이 추구하는 이러한 자기초월의 한 새로운 단계만을 형성할 뿐이다. 그리고 모든 영적인 경험의 무아적 본질은 다시 한번 근본적 실질이 분명하게 확장됨으로써 모든 생명체들로 하여금 자기 생명완성의 현재를 오직 자기 초월로서 획득하게 한다. 예술적 영감, 오랫 동안 추구된, 혹은 놀랍도록 우연한 통찰을 통해 갑자기 다가온 깨우침, 개인의 도덕적 의지에서 발현되는 열정 등, 이러한 것에서 모든 생명체의 특별한 현상형식이 보여주는 독특한 자기초월을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적 경험의 가장 높은 형식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는 이것이 바로 모든 생명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즉 모든 생명체는 이러한 생명의 특징들을 극복하는 현실성에 참여함으로써 살아간다는 말이다. 이 현실성은 앞으로의 개방성을 통해서 일종의 결정론적 고정화를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숙고로부터 아마 영적인 것의 본질에 대한 새로운 견해가 열리게 될 것이다. 영은 여기서 인간의 의식이나 자기의식에 대한 주관성으로 이해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 의식은 생명체가 영적 현실성에 참여하는 특별한 단계를 뜻한다. 여기서 영적 현실성은 모든 살아있는 것의 자기초월과 더불어 작용한다. 생명을 이렇게 우선적이고 구체적으로 영의 지평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는 비록 영과 의식에 대한 인습적인 일치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 있긴 하지만 떼이야르 드 샤르뎅에게서 발견된다. 이러한 시도는 영의 지평에서 오직 가능성으로만 제시된 생명에 대한 견해를 단도직입적으로 주장하기 이전에 이런 견해가 교정되어 온 오랜 과정과 이론적이며 경험적으로 관철된 과정을 우선적으로 고찰해야만 한다. 고대 이스라엘이 생명과 영에 대해 가졌던 견해를 생명현상에 대한 근대의 생물학적 연구가 설명하고 있는 조건에서 받아들임으로써 이러한 생명에 대한 견해를 펼쳐나갈 수 있다. 또한 이로써 성령에 대한 신학적 교리의 이해지평**을 제공할 수 있다.

*생명실행(Lenensvollzug)은 생명체가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실행하는 모든 것들을 뜻한다. 식물들의 탄소동화작용, 동물들의 숨쉬기와 먹기, 모든 동식물의 진화과정,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술과 문화활동도 역시 이에 해당한다. 결국 모든 생명체는 궁극적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서 미래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판넨베르크에 의하면 생명체가 보여주는 이런 생명실행의 차원에서 성령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성령론적 생명이해를 통해서 현대 생물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판넨베르크가 생각하는 성령론의 지평은 성서적 생명 이해와 현대의 생물학적 생명 이해를 결합하는 데 있다. 성서는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능력을 성령이라고 하며, 현대 물리학과 생물학은 그것을 진화적 과정이라고 한다. 성령은 생명으로 하여금 자기를 초월해 나가게 하는 능력이며, 또한 진화 역시 물질이 자기를 초월해나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성령과 생물학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과 영에 대한 고대 이스라엘의 시각과 연관해서 생각해보아야 할 요점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분명히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한다고 보았던 이스라엘의 기대가 무엇을 뜻하는가라는 점이다. 이사야 11:2에 따르면 메시야는 영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영이 끊임없이 메시야에게서 부여되며, 또한 메시야에게 그 토대를 둔다. 제2이사야는 왕에게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백성에게도 약속하기를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주어진다고 했다(사 42:1, 44:3). 에스겔의 경우에도 비슷하다(겔 36:27). 스가랴는 마지막 밤 환상에서 하나님의 영이 모든 백성들에게 임하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병거처럼 야웨의 루아흐(영)를 전체 대지를 넘어 하늘의 네 방향으로 몰고간다(슥 6:1-8). 요엘 선지자는 ‘모든 육체’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는 사실을 마지막 때의 사건으로 확실하게 약속했다(욜 3:1 이하). 원시 기독교에서 누가는 오순절 사건을 통해서 이러한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증언한다(행 2:17 이하). 여기서 거론된 구약성서 말씀에서 하나님의 영은 생명력으로 이해되었지, 그 어떤 다른 어떤 방식으로는 결코 획득될 수 없는 인식의 원천으로 이해되지는 않았다. 확실히 지혜와 인식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만 보증된다. 이때 작용하는 것은 기상천외하거나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언급되는 것이 모든 생명 현상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각기의 생명현상에는 그것 나름대로 하나님의 영이 특별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영의 미래적, 종말적 작용이 현재적 작용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을 이렇게 보았다. 마지막 때 영이 주어질 것이며, 그 영은 인간에게 토대를 두고 있다고. 즉 영은 완전히, 그리고 부족함 없이 인간에게 주어진다고. 종말 시의 생명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재적 생명과는 다르다. 그 생명은 강력한 생명과 상관되어 있다. 인간은 현재의 생명 안에서 생명의 근원, 즉 하나님의 영과 연결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생명에 담겨 있는 각기의 근원은 피상적이다. 근원과 떨어져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영에 의해 작동될 수 있긴 하지만 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영원하게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영이 인간에게 내면적으로 주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영을 생명력으로 파악하는 구약성서의 견해를 통해서 우리는 원시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예수에게 나타난 부활의 새로운 생명 현실성* 과 영 사이에 놓여있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그 부활의 생명 현실성을 희망하고 있으며, 예수와 연결되어 있기만 하다면 지금 당장 누구나 그 생명 현실성에 참여한다고 생각했다. 영이 모든 생명의 근원인 것처럼 새로운 생명의 근원은 죽은 자의 부활로부터 발생한다. 바울이 성령을 가리켜 예수를 부활하게 한 영이라고 언급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롬 1:4, 8:2, 11). 이 언급에는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님의 영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원리는 생명으로 하여금 부활에 이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부활과의 연관 가운데 머물러 있게한다. 현재의 지상적 생명과 달리 부활한 자의 생명은 생명의 창조적인 근원인 영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이것은 마지막 때 하나님의 영이 인간에게 머문다는 이스라엘-유대적 기대와 놀랍게 상응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44절 이하에서 부활생명의 독특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영적인 몸(소마 프뉴마티콘)이라고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고 함축적인 형식화였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어설프고 애매모호한 표현방식은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사유된 생명은 모든 생명의 신적 근원과 연결되었으며, 따라서 죽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고, 무상하지 않게 되며 죽지 않게 된다(고전 15:52 이하). 첫 사람인 아담이 산 영이 되었다는 말과 같이 두 번째의 마지막 사람인 아담은 ‘살아있는 혼’(lebendige Seele)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생명을 일으키는 영이다(고전 15:45). 부활의 현실성과 성령은 서로 불가분리로 연관되어 있다.

*생명현실성(Lebenswirklichkeit)은 말 그대로 생명의 리얼리티를 말한다. 현재의 인간은 모든 생명체들을 포함해서 아직 생명현실성을 완전하게 획득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엇이 궁극적인 생명인지 아직 모른다. 그것은 종말이 이르러야 완성될 세계다. 이는 곧 구원의 완성을 뜻하기도 한다. 물론 부활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이러한 생명의 세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희망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곧 생명현실성을 이미 완료해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생명지향적인 모든 인간행위에 대해서 종말론적인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세계가 미래로 여전히 개방되어 있으며 현재적으로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신학은 생명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타학문과 대화를 계속해 나가야 한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것은 새롭고, 무상하지 않은 생명의 세계를 말한다. 이것이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은 그를 통해서 인간에게 현재한다. 그러므로 바울이 함축적인 의미에서 언급한 영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그리스도와 연결되며, 또한 기독론적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점들이 요한의 경우에도 매우 비슷하다(요 14:26, 16:31 이하). 부활한 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그리고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새로운 생명 현실성과의 상관에서만 하나님의 영은 적절하게 언급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그리스도와 영은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부활한 자와 생명연관을 맺고 있는 곳에 영이 존재한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 대한 사신을 믿는 모든 이는 특별한 방식으로 죽음을 뛰어넘는 미래적 부활을 믿는 자에게 그 부활을 보증해주는 영을 이미 받은 셈이다. 왜냐하면 영이 예수를 이미 부활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 ”(롬 8:11). 영은 부활한 예수에 대한 사신을 통해서, 그리고 이 사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기독교인들과 함께 한다. 부활한 자에 대한 사신을 받아들이는 자는, 그리고 예수에게서 이미 발생한 현실성이 예수와 연결된 모든 이에게서 처럼 자신에게도 역시 주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자는 이 사신과 함께 이미 성령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생명을 이미 확신한다. 그는 그의 확신 가운데서 더 이상 죽음의 운명에 떨어지지 않고 이미 그 고유한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그는 그외의 모든 인간적 현존의 보편적인 죽음이 몰고오는 파괴성으로부터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한다. 죽음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의문에 빠뜨린다. 인간 생명의 모든 준거와 가치들은 죽음의 파괴성에 직면해서 무화(無化)된다는 말이다. 오직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에 대한 희망만이 이러한 무화로부터 자유롭다. 생명의 연약성에 직면해서도 특별히 기독교적인 즐거움이 가능한 근거가 바로 이 안에 있다. 이는 흡사 기독교가 자신이 서야할 고유한 자리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태도를 하나님이 행하시는 사랑의 작용에 내맡길 수 있도록 토대가 잡힌 특별한 가능성과 같다. 따라서 영은 미래에 주어질 구원의 첫 선물이며(롬 8:23), 새로운 생명에 대한 즐거운 예감, 즉 미래적인 것에 대한 희망과 신실한 신뢰 가운데서 선취(先取)적으로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즐거운 예감이다. 영은 죽음의 파괴성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현존 가운데 이미 임재한다.
하나님의 미래와 영의 관계로 인해서 생명은 영 안에서 예언자적 성격을 갖는다. 영이 활동하는 곳에서는 새로운 생명과 함께 인간의 운명이 미래적으로 성취된다는 암시를 통해서 모든 것이 충만하다. 이에 따라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영이 예언과 관계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다. 영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언급된’ 그런 정체를 갖는다. 이 경우에 무엇보다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중요하다. 이로써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행한 역사와 상관된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행한 언급에서 미래적으로 계시되는 신적인 영의 현실성이 선취적으로, 즉 예수에게서 이런 일이 발생하기 오래 전에 작용했다. 예언자들이 완성된 미래에 대해서 증거하는 동안 영은 그들을 통하여 말했다. 원시 기독교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도 역시 이에 상응한 문제들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영 안에 실행되는 모든 기독교적인 언행은 일종의 예언적 관계에 속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영의 창조적 작용도 역시 이미 미래로부터 다가오는 모든 현재적 생명의 근원이라고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영은 모든 피조물에게 그들의 미래를 제공하며, 이를 통해서 만물을 살아가게 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영은 기독교인들에게서 활동한다. 즉 자기를 믿는 자들과 함께 하겠다는 예수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신뢰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임하는 영의 현존은 예수에게 현현한 생명 현실성이 기독교인들에게 계시된다는 신뢰 가운데서 확실하다. 역시 신앙과 희망을 통해서 영은 이미 지금 기독교인에게 현재한다. 영이 예수와 그의 죽음을 극복하는 생명과 연결된다는 확신이다. 이는 곧 이론적 의미로서의 확신이 아니라 신뢰에 대한 확신이다. 예수와의 일치를 통해서 영은 하나님과의 일치를 준비한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갈 4:6, 롬 8:14). 예수에게서 현현하고 능력적으로 증명된 영이 바로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영은 예수와 연결됨으로써 하나님과 연결된다. 영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것처럼, 예수에게 참여함으로써, 그리고 예수에 관한 사신을 중재함으로써 믿는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 영은 따라서 예수의 사명에 걸맞은 사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어 세상에 내보낸다.
영은 하나님의 현재적 현실성이며 예수의 하나님이 현재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그 나라는 다가오고 있으며, 예수의 사명 가운데서 이미 우리에게 다가왔다. 예수는 하나님을 도래하는 하나님이라고, 도래하는 나라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했다. 이는 하나님이 만물을 자신의 미래로 돌려놓았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미래는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이미 현재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미래는 그들 제자들에게 현재를 무한정으로 규정하는 능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예수의 공동체는 부활한 자의 현현을 하나님의 미래가 시작된 것으로서, 또한 하나님 나라의 서막으로서 경험했다. 역사의 진행도 역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현재가 이와 같은 한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쳤다. 도래하는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서 인간 세상으로 왔다. 구체적인 단 한 번의 역사 속으로. 그러나 그는 진행되는 역사 속에 있는 자신의 공동체를 공허하게 내버려두거나 고립시키지 않았다. 예수의 하나님은 우리가 영을 경험함으로써 교회에 현재한다. 창조자는 영과 더불어 이미 그가 허락한 생명의 숨결을 통해서 피조물에게 현재한다. 그런데 현존하는 것들의 미래적 완성에 대한 영감이 몰아적으로 경험됨으로써 신적인 영이 피조물 가운데 현재하게 되었다. 이는 곧 예언자적 영감이 보여주고 있는 분명한 확신이며 또한 약속된 미래의 현재화를 위한 예수의 생애와 활동 가운데서 집중화된 것이다. 이러한 중에 하나님의 영은 과거의 역사를 중재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에 현재한다. 이 역사는 곧 예수의 역사이며, 우리로 하여금 다가오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충만해짐으로써 그 선포가 한 때 그 사건이 되었던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게 한다. 영의 현재가 미래적인 것에 대한 직접적인 영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의 과거를 통해서 기독교 공동체에 중재되었기 때문에 영은 공동체의 중심에서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부여된다. 바로 이 믿음과 희망을 통해서. 왜냐하면 기독교 공동체가 되돌아보아야 할 예수의 역사 가운데서 이미 발생한 하나님의 미래가 지금 우리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은 다가오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도래한 하나님의 현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영의 현재는 믿는 자의 믿음과 희망 가운데서가 아니라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랑* 가운데서 충만해지고 완전해진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뛰어넘는 믿음의 용기를 움켜잡는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것을 희망하도록 견인된다면 사랑은 예수 이래로 기독교 안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창조적 사랑이다. 즉 그것은 니이체가 자기 스스로 기독교적인 사랑의 특성을 진술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매우 아름답게 서술한 용서하는 덕이다. 사랑은 사랑받는 자의 특권에 의존되지 않는 방식으로 창조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무엇을 사랑할는지 스스로 창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를 향한 창조적 사랑이다. 도움을 받은 이 사람은 원래 사마리아인의 이웃은 아니었지만 그의 도움을 통해서 이웃이 된 것이다(눅 10:36 이하). 그러나 이러한 사랑은 사랑하는 자의 행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그 사랑 안에서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초월하는 경험을 한다. 사랑은 이러한 몰아적 경향을 영적 생명의 다른 형식, 그리고 일종의 인식을 통한 감동, 예술가적 영감과 공유한다. 사랑의 탁월성은 이 경우에 사랑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초월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도록 고양시킨다는 데 있다. 사랑하는 자는 신적인 사랑의 창조적 다이나믹에 참여한다. 창조적 사랑으로서 하나님은 그에 의해 완성된 세계라 할 이미 창조된 세계의 미래를 향하며 현재한다. 그러나 신적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 발생한 것처럼 하나님의 미래가 도래할 것이라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에서도 충만하게 된다. 따라서 사랑의 사건은 하나님이 오셨다는 과거이며 동시에 오실 것이라는 미래이고, 또한 과거와 미래에서 도출되는 생동적인 현재다. 사랑은 사랑이신 하나님 스스로 영의 활동에 현재한다는 사실을 뜻한다. 따라서 고대 기독교에서 성령은 하나님의 현실성과 일치됨으로써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 된 자로 인식될 수 있었다. 부활한 자에 의해 유출되는, 그리고 기독교의 사신에 의해 중재된 영에서 바로 그 하나님은 현재한다. 예수는 그 하나님을 도래할 나라의 아버지라고 선포했으며, 그 하나님은 예수의 이러한 증거를 통해서 ‘아들’로서 현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니케아 신조가 언급하고 있는 영에 대한 내용을 확대 해석한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영이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하나의 본질을 이루고 있으며, 더불어 기도를 받고 경외를 받는다고 했다. 아버지, 아들, 영의 세 형태는 신적인 사랑 가운데서 불가분리로 연결되어 있다. 도래하는 하나님의 미래는 사랑의 영을 통해서 현재한다. 이 영은 예수의 활동과 역사를 통한 신적 본질의 완성으로서 사람들과 친근하며 그 곁에 머물러 있다.

*사도 바울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증거하고 있으며, 요한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 4:8)이라고 증거하고 있듯이 성령은 바로 사랑으로 현재한다. 믿음과 희망은 아직 잠정적인 세계 안에서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께 내맡기는 신뢰의 태도라고 한다면, 사랑은 하나님과 현재적으로 일치하는 경험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삼위일체론적인 면에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이 오늘날 사랑으로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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