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성도의 교제가 근원적으로 성자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의미라면 이것은 내적으로 사죄사건과 연관된다. 왜냐하면 사죄는 기독교적으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특징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사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에 뒤이은 결과이며, 또한 하나님이 지금 함께 한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우리의 완전과 구원, 그리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요구되는 인간존재가 성취된 다음에 따라오는 결과다. 죄가 용서될 때 고려되어야할 문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구원의 현재적 활동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삶을 지향한다. 이에 반해 사도신경이 확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미래의 완전한 구원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사죄는 바로 이러한 구원을 미리 앞서 제시하는 사건이다.
성도의 반열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죄,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상호 연관되어 있다. 이 경우에 사죄는 신앙인이 예수를 통해서 얻게 된 하나님과의 친교에 대한 소극적인 표현이다. 여기서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것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말한다. 또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은 이 하나님과의 친교에 기초한다. 기독교인에게 주어질 적극적인 구원의 몫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한, 사랑의 영에서 나온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사죄는 하나님에게서, 그리고 그로 인해 성취된 자유로운 생명에서 분리된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삶에 대한 자기집착 때문에 하나님과 심층적으로 분리된다. 이 분리는 죽음에 빠짐으로써 결정된다. 자기집착은 개인이 단순히 공동체와 결합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결합이 한편으로는 개인적인 이기주의를 집단적인 이기주의로 대체하며,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과 집단의 모순이라는 특징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모순은 어떤 개인들이 다른 이들과 구별된 자신들만의 특별한 관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전체의 관심을 이용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매우 극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 공동체는 개인의 자기집착이라는 변증법에 떨어져있는 셈이다. 이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드러내는 징표에 근거해서 꾸려가는 공동체에서만 극복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이 징표는 모든 인간적 횡포가 제거된 그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진리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대립이 극복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히 교회사는 인간 실존의 현재적 조건들을 통해서, 그리고 자기집착과 죽음의 형벌을 통해서 주어진 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자기집착으로 인해 죽음의 형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서 누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은 불가분리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양자는 신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도록 중재한다.
이것이 기독교회에서 베풀고 있는 세례의 의미다. 사죄는 고대 기독교에서 세례집례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성도의 교제와 죄의 용서는 매우 구체적인 제도로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세례가 집례되는 경우에 피세례자는 그리스도, 정확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됨으로써 자신의 죄된 본래적 삶에서는 죽고 그리스도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함으로써 발생한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게 된다(롬 6:3 이하). 사도신경은 죄의 용서와 부활의 희망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피세례자가 세례문을 진술함으로써 얻게 될 세례사건의 의미와 능력을 진술하고 있다. 전체 신조에 담긴 실제적인 동인이 여기서 주제화 된다. 사죄와 세례가 명시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는 고대교회의 다른 고백문에서도 역시 이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이처럼 많은 헬라계 세례 신조는 381년의 니케아-콘스탄티노풀 신조 처럼 ‘사죄를 위한 세례’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경우에 세례의 유일회성이 강조된다는 것은 사죄가 유일회적이라는 초기 기독교적 이해와 맞물려 있다. 세례가 베풀어짐으로써 죄의 짐이 결정적으로 해소된다는 주장은 세례가 가능한대로 인생의 마지막으로 자주 연기되는 악습을 초래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늦추어야만 죄가 용서받을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될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세례가 베풀어질 때 피세례자가 실존적으로 확실하게 회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고 심층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거듭해서 죄를 범한 자가 ‘두 번째로 참회할’ 가능성에 대한 주장은 3세기 이래로 실행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곧 예외 규정으로 취급되었다. 더구나 중세기 초 이래로 집행된 유아세례의 관습과 수도사들의 양심에 대한 연구가 시민교육에 끼친 영향으로 인해서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았다. 즉 죄는 세례를 받음으로 해결되었으며, 또한 정기적인 비밀 참회 제도와 연관되어 실행된 거듭된 참회와 그 용서가 결국 신앙생활의 일반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종교개혁과 경건주의는 여전히 이러한 중세기의 참회 중심적인 신앙 활동을 뜻한다. 특히 이 경건주의는 오늘날까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전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사죄를 세례와 분리하거나 독립시키는 것은 사죄와 부활 희망 사이의 연관을 불확실하게 만든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죄와 사죄가 죽음과 생명에 연관된 문제라는 점이 더 이상 분명하지 않게 되었다. 반면에 초대 기독교에서는 이 문제가 세례 사건과의 연관 가운데서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는 피세례자가 자신의 고유한 삶을 포기해야만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생한 새로운 생명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대 교회는 사죄를 세례 때 이루어지는 유일회적인 사건으로만 한정하지 않았다. 이는 옳은 처사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어떤 한 행위 안에서 상징적으로 선취될 수 있긴 하지만, 기독교인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죽을 수밖에 없는 생명의 전체 과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기독교의 구원을 이해하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죄의 용서가 기독교적 경건성의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보증된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죄와 사죄문제가 부활 희망과 분리되면 그것은 도덕주의라는 좁은 틀에 갇혀버린 경건성의 키워드가 되어버린다. 이 도덕주의는 율법주의와의 투쟁 가운데서 얻어진 기독교의 한 성격을 말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러한 경건성으로 숨어들어감으로써, 자유로워지고 용기를 얻게 되는 그 새로운 삶을 획득하기 보다는 이 경건성에 의지해서 죄책에 대한 경험을 삶의 중심주제로 삼거나 사죄를 그 목표로 삼게 된다. 사죄의 의미는 그 자체로서 홀로 당연하거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죄책문제*에 기울어진 기독교는 성숙한 기준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즉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지 못하고 따라서 사죄의 사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서 오해와 불신을 사게 된다. 이렇게 전승된 도덕성의 당위가 현대의 의식구조에서는 그 효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의 숫자는 오늘날 증가하고 있다. 도덕적 요청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킨 이러한 해석 앞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죄인으로 느끼고 용서받아야 할 필요를 절감하도록 하기 위해서 도덕적 요청과 관련된 증거를 들이밀어야만 하는가? 기독교의 사신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진부한, 그리고 지나친 확신으로 보일 뿐이다. 이러한 해석은 인간의 기본적 생명 문제에 도달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해결책으로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인위적인 문제들만 생산해낸다. 기독교의 도덕주의, 그리고 죄와 용서를 둘러싼 기독교의 경건주의적인 경향은 니이체에 의해서 反생명적인 것이라고 비판받을 것이다. 죄를 용서한다는 기독교의 사신이 적극적인 의미에서 생명과 어떤 관계를 견지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생명의 前도덕적** 기초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데 달려있다.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은 죽음의 불가피성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이 불가피성은 모든 인간의 업적과 사상이 죽음의 형벌에 직면함으로써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 그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죄와 죄책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의 심층적 내용은 죽음의 운명을 배경으로 해서 증명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우리의 현존이 죽음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기집착의 결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풍요롭게 함으로써 현존적 실현을 추구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은 마지막에 봉착하며, 또한 우리 자신은 공허하게 되고 불만스러워진다. 죄는 생명을 추구하고 있는 생명의 원천을 혼란케 하는 것이며 오류에 빠져들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혼란은 각각의 인간이 이웃과 하나님과 분리된 자아를 확장시킴으로써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쓴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며 생명력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생명을 성취하려고 애쓰는 노력을 분쇄시킨다. 이것의 직접적인 결과는 모든 인간의 현존이 죽음의 형벌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죄는 인간 현존의 구성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근본적인 요소로 나타난다. 이 경우에 우선적으로 개인적인 과오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전체 인간의 과오에 담겨있는 우리 현존의 도착된 방향설정이 문제다. 이 전체적인 과오는 이런 저런 잘못된 태도, 그리고 구체적인 죄책에서 온전히 드러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도덕적 관점들은 이러한 구체적인 과오를 외면하고 있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추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오를 근본적으로 피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이 경우에 이러한 과오를 피하는 것이 개인에게 강요되고 있는지 아닌지, 혹은 사회적 태도의 변화를 통해서 추구되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개인들은 이러한 사회적 태도의 부정적 결과로부터 벗어나 있다. 기독교적 전망에서 볼 때 분명하게 잘못된 이러한 태도와 죄책들은 특별히 강조되지도 않고 경시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인간 삶에서 극복되어야 할 전체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간주된다. 이 전체상황이라는 것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서 근원적으로 변화되기에는 인간존재의 구성 속에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그것이다.

*판넨베르크는 죄 문제를 일종의 경건주의적, 도덕적 기준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반생명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죄에 대한 인식과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결국 죄의 결과인 죽음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생명세계, 즉 부활에 대한 희망에 근거해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런데 기독교 전통은 개인이 실존적 죄책으로부터 벗어나서 도덕적으로 우월하게 살아가는 것을 기독교의 중요한 삶의 내용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곧 생명의 지평을 죄책(Schuldproblematik)의 지평으로 떨어뜨렸다는 말이 된다.

**前도덕적(vormoralisch)이라는 말은 생명문제가 도덕적인 차원 이전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바로 위의 역주에서 설명되고 있듯이 기독교 신앙을 도덕주의가 아니라 종말론적 부활희망에 둔다는 뜻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인 기준으로 선포되지 않는다. 도덕은 목적이라기보다는 결과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구원이 율법의 실행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는 자들에게 열린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알 수 있다.

하나님과의 분리인 죄가 인간현존을 직접 죽음의 형벌로 몰아간다면 사죄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말하자면 사죄는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일치 가운데 있는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강화시켜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해방하는 희망은 확실히 현재의 삶에서 이미 작용하고 있다. 이런 한에서 윤리적 전망은 진실한 것으로 남는다. 인간의 태도 가운데서, 그리고 그 공동의 삶 가운데서 무엇이 변화하는가라는 점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휴머니티의 일들은 윤리적 행위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윤리적 목표를 명확하게 설정하지 않는 한 휴머니티가 현실적으로 성취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다행스럽게도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 행위와 윤리 의식은 이런 점에서 종교적 주제의 핵심인 인간의 휴머니티를 항상 전제하고 있다. 추상적인 도덕주의적 지평이 아니라 바로 이런 지평에 죄와 사죄에 대한 기독교적 진술의 의미와 영향력이 기초되어 있다. 이런 의식은 죄와 사죄가 생명과 죽음에 대한 질문과 어떤 관련성을 맺는지 주시할 수 있을 때만 항시적으로 획득될 수 있다.
죄의 용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의 근원은 바로 이런 질문의 지평에 놓여 있다. 예수가 어떤 사람에게 사죄를 선언했을 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이 사람이 도래하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그래서 죽은 자의 부활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 즉 하나님 통치의 도래를 향한 단호한 방향선회가 바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요구한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것을 선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미래를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해도 좋았다. 그를 살아있는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것은 거기서 극복되었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사신을 받아들이는 자는 이로써 이미 죄를 용서받은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이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는 생명의 미래를 차단하는 과거의 짐으로부터 자유하다. 따라서 사죄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미래에 대한 신뢰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실현될 미래를 현재의 삶으로 끌어오는 불빛이고 미래에 실현될 구원의 여명이다. 이처럼 사죄는 이미 현 상황에서 전개되는 새로운 시작의 자유이며, 또한 과거를 새롭게 인식하는 자유다. 사죄를 통해서 얻게 되는 선물은 현재의 순간을 완전히 긍정할 수 있는 자유이며, 또한 성취된 미래를 확신할 수 있게 하는 자유다.
사죄를 통해서 자유가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의미는 인간이 자기 스스로는 자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해서 획득한 자기 확장이 더 이상의 조치 없이도 현재적으로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 곳에서만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기 해방의 과업이 이루어진 곳에서도 역시 전제된다. 해방*을 통한 자기해방, 즉 자유를 침해하는 모든 연결고리를 해체함으로써 얻게 되는 자기해방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 이미 자유로울 경우에만,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실행하기 위한 외적 상황이 나빠서 그것이 방해받을 경우에만 의미심장한 요구가 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유 할 수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성향과 욕망을 모두 소진시켜버리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이 바로 자유를 확장시키는 권리라고 간주될지 모르며, 또한 자기를 확장시킬 수 있는 여러 상이한 관심들이 모두 타당한 것으로 다루어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경험이 가르쳐주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다. 서로 다른 인간들이 자기를 확장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상호간 충돌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런 요청들이 기대한 만큼의 만족이 아니라 단지 대용품만을 획득하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을 진실하게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강탈해간다고 말이다. 만약 인간이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 길이 오류라고 한다면 -그리고 이것이 죄라는 낱말을 가리킨다면- 그 길들은 분명히 참된 자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참된 자유는 사람들에게 우선 선물로서 주어지는 게 틀림없으며, 순간적인 상상의 필요성이나 자기에게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는 달리 외부로부터 열려야만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인 상황에 대한 거대담론만이 아니라, 이미 전체 근대에서 다루어진 질문이다. 즉 인간이 스스로에게서 이미 자유로운지 아닌지, 혹은 그가 참된 자유에 참여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서 해방되어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이다. 참된 자유에 참여하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죄의 용서를 진술할 때 고백되는 사실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에게서 자유한 게 아니라 우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참된 자유에 도달한다는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에 담겨있는 핵심 내용이다. 해방하는 약속의 내용으로서 종교개혁은 죄의 용서를 제시했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칭의론은 우선 죄의 용서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는 약속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인간이 자유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 자유는 우리 자신의 피안에서 (extra nos)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그의 계시 가운데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자기를 위해 인간을 해방시키는 자유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자유가 주어진다는 칭의론의 중심 테제를 통해서 인간은 스스로에게서 이미 자유하다는, 당시에 이미 활동적 경향을 보였던 근대적 자명성과 대립적인 입장에 섰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개혁이 이런 상반된 이해를 통해서 근대의 자유론과 무조건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칭의 신앙이 말하고자하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사회적으로 인가된 이념적 세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신장시키려는 가장 강력한 충격으로 작용했다. 이를 통해서 이 확신은 정치적 자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으며, 동시에 기독교 전통과 전투적인 교회가 무조건적으로 요청했던 권위주의에 대한 계몽주의의 전통비판에서도 역시 획기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 경우에 나름대로 여전히 전통과 연결되어 있는 칭의 신앙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종파투쟁을 불거지게 한 인식, 즉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의 확신으로 대체됨으로써, 이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곧 이성의 자기 확신에 속한 기초를 말하는데,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결국 인간의 단순한 투사로서 나타났으며, 또한 이로 인해서 인간에게 이미 주어진 신적 현실성에 내재한 자유의 근거가 그 토대를 상실하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 근거는 인간을 우선적으로 자유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로써 자유의 원리는 결국 절대적인 진리 없이 임의적인 것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해방에서 종교적 토대가 제거된다면 자유는 개인의 자유의지와 더불어 붕괴될 것이며, 또한 자유가 외부적 구조로만 생각되기 때문에 이미 소유했다고 추정되는 자유와 더불어 붕괴될 것이다. 더구나 무절제한 자유방임적 방종은 틀림없이 자유의 원리를 불확실하게 만들 것이다. 이와 달리 사죄를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확신하는 데서 나오는 자유의 토대는 최소한 우리의 문화환경 가운데서 자유로운 사회를 지속시키는데 요긴한 효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 효소는 그 종교적 근원이 살아 있는 한 세속적 현상 형식을 통해서 여전히 지속적으로 작용하게 되는 그것이다.

*해방을 통한 자기해방(Selbstbefreiung durch Emanzipation)이라는 말은 어떤 정치, 사회적인 의미의 해방(Emanzipation)을 통해서 인간존재의 자유로운 상태라 할 자기해방(Selbstbefreiung)에 이른다는 말인데, 판넨베르크는 인간의 자기해방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정치, 사회적인 조건이 바뀐다고 해서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죄사건이 그 핵심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자유하지 않다면 삶의 영역이 아무리 확장된다고 하더라도 자유와 해방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근본적인 자유는 하나님이 용서를 선포함으로써 주어진다. 오늘 우리는 현대인의 삶에서 정치, 사회적 해방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여전히 자유하지 못한 현실을 발견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자유에 이르는 길이 바로 사죄라는 말은 인문학적으로도 역시 설득력이 있다.

사죄에 대한 기독교의 신앙고백을 옳게 해석했다면 이것은 곧 참된 자유에 대한 보증이며, 또한 이로써 확보된 인간의 휴머니티에 대한 신뢰다. 이것은 신앙에 터한 자유가 인간에게서 물러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인간 자신을 향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다. 물론 어떤 죄에 대한 고백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틈을 의미한다. 이것은 확실히 이 의미의 한 측면일 뿐이다. 죄의 고백은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그것에 대해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현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고백이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의 죄의식*은 자기 부정이거나 反생명적인 표현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자기 왜곡 앞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분명히 죄의 고백은 자유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는 책임적인 자유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책임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자신과 일체가 된다. 따라서 자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러나 어떤 생명계**에 대해서, 그리고 그에게 발생하거나 간과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가라는 기준에서 측정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고립된 개체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인류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생명계 안에 있는 과오에 대한 죄책을 다른 이들에게서 찾는 것만이 아니라 그 죄책과 책임감을 스스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이 안에서 그는 자기의 생명 영역과 일치하며, 또한 자신을 향한 개혁의 과업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분명히 죄의 고백은 용서를 통해서 극복되어야할 부자유를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부자유는 오히려 자기의 죄와 공동책임을 배제하고 거절하는 데서 나타난다. 자기의 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이것이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의심하는 경우가 아닌한 용서에 대한 확신에서 가능할 뿐이며, 또한 이 인식은 죄의 용서로 인해 드러날 그 자유가 무엇인지 매우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죄의식(Sündenbewußtsein)은 일종의 숙명주의와 강하게 연결된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죄(원죄, 혹은 유전죄)에 묶여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행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거나 억압하고 있는 이러한 죄 이해는 교리사적인 면에서 볼 때 콘스탄틴 이후로 교황과 로마 황제가 유럽을 지배하던 중세기에 민중들을 반개혁적이거나 반혁명적으로 길들이는 데 매우 유용한 도그마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너희들은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다. 그러니 황제나 교황이나 귀족들의 잘못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큰 소리 치지 마라.” 이런 식이었다. 이런 점에서 맑스나 니이체 등이 기독교를 반동적이라고, 혹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빠져있다고 비판할 여지가 있다하겠다. 판넨베르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기독교의 죄론(사죄)이 일종의 도덕주의이거나 죄책에 의한 부자유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해방 지향적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생명계(Lebenskreis)는 함께 생명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주변 환경 일체를, 말하자면 인간사회, 국가, 인간 종, 자연에 이르는 모든 생명권을 뜻한다. 기독교의 죄고백이 바로 이런 생명계에 대한 책임의식이라고 하는 판넨베르크의 지적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붕괴되는 오늘날, 그리고 유기적 세계관이 다시 요청되는 오늘날 교회가 새겨들어야 할 신학적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