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희망                        

히 10:22,23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특별히 세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택한 본문 말씀은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피로 뿌림을 받아서 우리의 몸이 맑은 물로 씻김을 받았다는 이 증언은 곧 세례에 대한 서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합니다. 세례의 물은 우리의 죄를 씻어냅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만들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고 여기 계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게 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다는 것도 역시 세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듯이 세례는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하나로 만듭니다. 세례와 죽음은 상호 간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따르면(막 10:38) 예수님은 자신이 받아야만 할 세례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세례를 받을 때 완전히 물 속에 잠겼습니다. 세례 받는 사람이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서 매장된다는 사실을 아주 특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물에 잠김으로써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발생한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대한 신앙고백은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듯이 희망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제 세례에서 일어나는 똑같은 일이 발생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그가 고백하는 예수님과 연결됩니다. 징표 행위로서의 세례는 신앙고백을 언어로 진술하게 합니다. 즉 우리의 생명을 예수님에게 양도하는 것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양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고백과 세례는 기독교 역사에서 초기부터 서로 공속(共屬)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 신앙고백을 암송하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세례 받은 자로 자리 매김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식탁인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세례보다 훨씬 역사가 깊습니다. 예수님에게로 소급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습니다.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신앙을 고백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누가복음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이 모든 기독교 신앙고백의 근원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제 신앙고백은 그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특별한 의미를 획득했습니다. 즉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식적 논쟁을 통해서 한쪽 편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과의 일치로부터 우리를 어긋나게 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런 세력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합니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자기를 양도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기서 이 문제는 핍박의 시대에만 해당되는 예외적 상황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기독교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늘 믿음 때문에 억울한 재판을 당하거나, 그래서 개인적인 삶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처럼 평화스러워 보이는 이 시대에도 역시 우리가 어떤 점에서 예수를 편들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선택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신도 모르게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공공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성격이 점차 희석되면서 신앙의 만성적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예수님을 편드는 일은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이러한 신앙 고백을 언급하실 때의 핵심은 교리가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예수님과 연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연대성에 덧붙여 약속하시기를 앞으로 인간에게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면죄된다고 하셨습니다. 신앙고백은 상호적 연대성에 토대를 놓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편드는 용기를 가진 이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은 하나님의 미래가 임할 때 구원과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세례에 상응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즉 그분의 십자가와 하나 되게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앞으로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적 신앙고백의 근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세례에서도 역시 예수님의 인격과 하나되는 게 핵심입니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적 희망의 근거입니다. 더구나 세례를 받는 자가 진술하거나 또는 그를 대신해서 공동체가 진술하는 사도신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피력하는 신앙고백이며,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동의한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연관될까요? 인격적인 면에서 예수님의 편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 아버지 하나님과 성령을 진술하고 있는 사도신경과 어떤 관계일까요? 이것은 물론 순수하게 교리적인 문제입니다. 이 문제는 예수님의 편에 선다는 신앙고백의 본래적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까?
이 문제를 명백히 하려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신앙고백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핵심적으로 진술하고 있는 내용은 신앙고백이 우리를 구원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입으로’ 예수님을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받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바울에 의하면 고백의 내용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입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가 예수님을 부활한 분으로 고백하게 된 기도의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올림을 받은 하나님의 자리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다음을 의미했습니다. 부활한 분에 대한 교회의 기도 초청에 응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부활절 이후에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주장은 실제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있는 기준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예언자로 숭배하는 사람은 교회가 말하고 있는, 즉 살아있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분을 고백하는 게 결코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다는 것은 당연히 그가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 두 부분을 이렇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입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믿는다면,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로부터 부활시키셨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바울에 의하면 예수님을 일컫는 ‘주’라는 단어의 특징은 그 단어 이상의 진술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라는 사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관건은 교회가 예수님을 주라고, 또한 살아있는 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전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죽어있는 한 분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의 이 진술은 곧 기독교의 핵심 내용을 담은 사도신경 역사의 단초입니다. 후에 부가된 모든 내용은 바로 이와 똑같은 기능이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부활을 암시하고 있는 이 진술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가 주(主)로 부르는 그분이, 따라서 교회가 신앙을 고백하는 그분이 누구인가가 언급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특성들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신앙고백에도 역시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인격으로 고백한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신앙고백의 모든 진술은 우리가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가 누구에게 신앙을 고백하는지 말로 진술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의 역사에서 그 다음 단계가 여전히 신약성서에 있습니다. 즉 요한일서에 이런 고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요일 4:2). 여기서는 두 가지 사실이 언급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교회가 주라고 부르는 예수님은 영원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인간의 형태를 갖고 나사렛 예수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가 영원히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주라고 부를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즉 그는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으며,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시어 다시 하나님에게로 올림을 받았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에게 신앙을 고백하지 않은 채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며 천지의 창조자이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부활 이후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은 성령과 교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절과 승천 이후로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교회에 의해서 선포된 바로 그분에 대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기억합니다. 이미 바울에 의하면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기도하라는 교회의 초청에 응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말입니다.
교회와 아무런 상관없이 예수님의 편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도 했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배제한 채 일종의 신화론적 형태를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교회는 나사렛 출신의 평범한 인간의 자리에 영원한 아들의 표상을 정립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아들은 모든 인간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도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도 믿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면 영원부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와 성령과 영원히 일치해 있습니다.
교회와 더불어서 예수님에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예수님이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런 발전된 신앙 형태는 니케아 신앙고백과 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우리는 오늘 예배 시간에 함께 고백했습니다.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이 사도신경의 내용을 적지 않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대에 걸맞은 신앙고백문을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진술을 포기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런 시도가 자주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서는 교회가 고백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즉 부활했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을 더 이상 진술하지 않는다는 결과를 빚을 뿐입니다. 신앙고백의 언어에 있는 교훈적인 내용은 자체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언어들은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고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고대 신앙고백의 진술들은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대체되면 안 됩니다. 그 신앙고백을 확증하는 것은 기독교인의 신앙고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세속 시대의 영에 대항해서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세계에 도전하지 않고 단지 세계에 적응하려는 것은 결코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이미 히브리서는 이렇게 주의를 환기시킨 적이 있었습니다. “동요하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세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물과 예수님의 피로 죄에서 깨끗해지고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은 다음의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자기만을 모색하는 노력으로부터 죽었으며, 또한 이러한 자기 모색에 의해서 작동되는 세계로부터 죽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적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의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세상을 따르지 마시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은 이런 생명을 뛰어넘는 희망을 전혀 제공하지 못합니다. 반면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새로운 생명을 향한 희망의 불빛은 이미 우리의 현재적 생명을 비추었습니다. 이 희망은 여기서의 생명을 변화시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세례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이 신앙고백을 드릴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동요하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 그 분은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1992.1.26,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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