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롬 6:3-8

기독교가 시작한 이후로 기독교인은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지체가 되었습니다. 세례는 물 속에 잠김으로써 베풀어집니다. 강이나 세례 탕에 잠김으로써 말입니다. 세례 사건에는 세례를 받는 사람말고도 세례를 베푸는 집례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세례를 받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은 세례 집례자가 피세례자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풂으로써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로 인해서 이제 피세례자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됩니다. 이는 곧 피세례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세례에서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넘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통해서 우리 생명의 주님이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의미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믿고 있는 그분과 밀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문자 그대로 우리 자신을 비워내야만 우리가 신뢰하는 그분에게 의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의 행위에서 현재적으로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앙의 행위는 늘 거듭되고 강화되어야 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그분에게 단번에 위탁하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는 결단에는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겠다는 사실이 포함됩니다. 세례는 반복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의 전체 인생에서 거듭 거듭 새롭게 각인되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일의 신앙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처럼 신앙과 세례는 상호간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는 왜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바로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은 보다 높고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들어갑니다. 교회의 역사에서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세례를 받도록 했다는 것은 그들이 어린 자녀들의 생명으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고 있는 분의 축복을 애초부터 받게 하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 의하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위탁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울은 왜 그렇게 말하는 겁니까? 그의 생각은 바로 유아세례가 베풀어질 때 좀 당혹스럽게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아세례에서는 이 어린아이들의 생명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에서 죽음에 해당되는 게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을, 즉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하심으로 시작된 영원한 생명의 약속에 참여한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이르는 예수님의 길에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새롭고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사도가 늘 강조했듯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루어 놓으신 일은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예수님과, 그리고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죽음은 경건한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인간을 생명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또한 이로 인해 결국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킨다고 말입니다. “무덤에서 당신의 은총이 선포되며, 죽음의 나라에서 당신의 정의가 드러납니까?”(시 88:12). 시편 기자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만, 이에 대한 답변은 “아니오”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았으며, 자기 생명으로부터도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로부터 살려내셨으며,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죽음에서 그와 하나가 되도록 보증하심으로써 그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가 죽는 순간에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으며 생명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당하게 될 죽음은 세례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제거되었으며, 대신에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예수님과 더불어서 살아갑니다. 이런 일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물 속에 잠기는 사건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과거의 인간은 죽고 대신 우리 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세례를 통해서 앞으로의 죽음이 상징적으로 선취되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진술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으며, “세례를 통해서 그의 죽음 가운데서 미리 장사되었습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아직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 부활은 우리가 여전히 희망하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향해 나아가야 할 미래입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면 또한 우리는 그와 더불어 살게 될 것을 믿습니다.”(9절).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발현하는 새로운 생명의 미래는 이미 지금 여기 지상의 삶에 개입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도가 오늘 본문에서 진술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견인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 생명은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됨으로써 우리에게 보증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의해 규정되도록, 또한 제한적인 생명에서 가능한 최대한으로 확대시켜보려는 자기 모색에 의해 규정되도록 내버려둘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대한 죄의 통치로부터 자유롭다는 생각을 이런 사실과 연결시켰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죽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됨으로써 이제 죽음이 세례를 통해서 이미 선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죽음은 상호 관련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과 같은 장(章)에서 진술하고 있는 대로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지불된 값입니다. 인간은 그 값을 지불해야만 할 존재들입니다. 죄는 왜 죽음을 불러옵니까? 왜냐하면 죄는 우리를 생명의 원천과, 즉 하나님과 분리시키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죄에는 이미 죽음의 씨앗이 담겨 있습니다. 죽음은 죄를 지었기 숙명적으로 받아야 할 난폭한 징벌은 결코 아닙니다. 죽음은 단지 죄의 본질이 전폭적으로 작동하는 것뿐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의 격리, 우리 생명의 원천으로부터의 격리입니다. 죄와 죽음이 상호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에 처해진 우리의 생명은 늘 죄에 연루된 상태로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는 죄의 통제를 받습니다. 우리는 죽어야 그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래에 당하게 될 죽음이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에,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해서 죄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력의 탐욕에 더 이상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제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신뢰함으로써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런 생각을 올바르게 명상해야만 합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죽음이 선취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가운데서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삶의 길은 이제 우리가 받은 세례를 추가적으로 실행해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의 삶에서 여전히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이 죽음은 세례를 통해서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과거의 삶에서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빠져듭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마틴 루터의 핵심 사상입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1529년에 집필된 루터의 대(大)교리문답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마틴 루터는 세례의 능력과 기능에 대해서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그것은 “옛 아담이 죽는 것과 다른 게 아닙니다. ... 그 다음에 새로운 인간이 출현합니다. 이런 양자가 우리 삶을 오랫동안 끌어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삶은 일상적 세례와 다른 게 아닙니다. 한번 시작한 다음에 늘 지속되어야 합니다.”(BSELK 704). 왜냐하면 세례를 통해서 “은총, 영, 그리고 옛 인간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간이 등장함으로써 강해집니다. 따라서 세례는 늘 그렇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옛 인간을 다시 자유롭게 제어해나갈 수 있습니다.”(706).
루터는 세례를 기독교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얻어지는 죄의 용서가 기독교인들의 일상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죄를 통해 상실될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반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런 생각에 빠지게 된다면 세례가 우리의 전체 삶의 길과 연결된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것입니다. 이 세례는 우리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죽음이 선취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한다면 기독교인의 전체 삶은 일종의 참회 사건이라고 할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참회로 끝나는 게 아니라 매일 우리의 전체 삶의 길에서 하나님에게로 방향을 전환한다는 의미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회는 옛 사람을, 즉 죄의 사람을 철저하게 제어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합니까? 따라서 당신이 참회하면서 살아간다면 당신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706). 세례를 통해서 한번 죄를 용서받는다면 “마찬가지로 사죄는 매일, 평생 우리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이것은 옛 사람을 목매다는 것입니다.”(707).
오늘날 개신교에서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세례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 쉽게 망각되어 있습니다. 이 의미는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가 그렇게 강조했던 바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세례가 단지 기독교적인 삶의 시작에 불과한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배 시에 드리는 죄의 고백이 마치 우리가 여전히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못한 이방인인 것처럼 들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함으로써 세례 받은 것을 기억하는 형식에서 그리스도와 연결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옛 사람을, 즉 죄의 사람을 이미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장사지낸 우리의 세례 사건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례에 대한 이런 기억은 일상적으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통해서 이미 들어간 그런 상태보다 훨씬 더 기독교인다운 삶의 단계로 들어갑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연결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지체는 부활의 새로운 생명을 획득하게 되며 지금 이미 그런 생명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아멘. (1998.7.19, 뮌헨, 마태우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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