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미래와 아기 예수의 오심

눅 21:24-33

‘대강절’(Advent)이라는 단어는 독일어의 ‘도래’(Ankunft)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대강절 절기를 매해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죄와 죽음의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축하하는 날로 지킵니다. 대강절 절기는 이런 사건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곧 ‘아드벤트’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문자적 의미에 어울립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이미 발생한 도래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가까이 이르렀음을, 즉 임박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대강절의 운동은 임박한 미래와 관계됩니다. 독일어 단어 Zukunft(미래)는 문자적으로 ‘아드벤트’에 대한 정확한 번역입니다. 여기서는 단지 멀리 떨어지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핵심이 아니라 오히려 오심에서 파악될 수 있는, 그것에 따라 개시되는 미래가 핵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미래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의 미래는 이미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인격에서 이미 개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성탄절을 맞아 구유에 오신 아기를 축하합니다. 왜냐하면 그 아기를 통해서 하나님과 그의 구원이 이미 우리에게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춥고 어두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직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여전히 죄와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기다리며, 또한 그가 우리에게 약속한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립니다. 비록 이것이 인간 의식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고 매년마다 다시 성탄의 광휘에 대한 기다림으로 물러가지만 말이다. 우리가 구세주의 도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개시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구유에 오신 구세주의 도래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미래가 오시기를 주기도문을 통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아기 예수가 누운 구유에 비친 하나님의 빛입니다.
이처럼 이미 구세주가 베들레헴 구유에 오셨다는 사실과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지키는 대강절의 기다림에서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심판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교회는 이 세상에 임할 심판의 미래를 대강절에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강절 두 번째 주일의 특별한 주제였습니다. 이에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설교의 본문은 바로 누가복음 21:24-33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이며, 이로 인해서 인간이 곤란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더 읽어봅시다.

“사람들이 칼날에 쓰러질 것이며 포로가 되어 여러 나라에 잡혀 갈 것이다. 이방인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예루살렘은 그들의 발아래 짓밟힐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해와 달과 별에 징조가 나타날 것이다. 지상에서는 사납게 날뛰는 바다 물결에 놀라 모든 민족이 불안에 떨 것이며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 올 무서운 일을 내다보며 공포에 떨다가 기절하고 말 것이다. 모든 천체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때에 사람들은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런 비유를 들려 주셨다. “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들을 보아라. 나무에 잎이 돋으면 그것을 보아 여름이 벌써 다가온 것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온 줄 알아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이 세대가 없어지기 전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미래에 대한 언급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앞에서 기독교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매우 중요한 단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요구하는 것만을 기다리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너희의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우선 우리 기독교인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은 이 세상이 살기 좋게 늘 발전되어 간다고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도 역시 가능한 대로 궁핍 상태가 완화되도록 진력해야 합니다. 또한 인간의 생활조건이 향상되도록 하는 일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의 평화로운 공생을 철저하게 파괴시키는 죄와 죽음의 세력이 이 세상에서 군림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악이 늘 새롭게 개입하곤 합니다. 공산주의가 와해된 이후 1989년에 많은 사람들은 평화롭고 행복한 미래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를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내전의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런 국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세계가 멸망의 길을 가며, 따라서 우리는 이런 세계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한 징표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은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이 이 세상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 모든 것들은 틀림없이 소멸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세계의 심판을 기대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의 삶을 대대적으로 정화시키고 창조 사건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단지 화장술과 같은 교정이 아니라 심연의 전복과 충격입니다. 이것은 자연의 질서에도 해당됩니다. 즉 해, 달, 그리고 별과 하늘의 능력들 말입니다.
오늘의 이러한 세계가 언제 결정적으로 변화하게 될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예수님 자신도 이것을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대 기독교는 이 세계의 종말을 가까운 미래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 이런 가까운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거듭해서 간직되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시간을 아버지만이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6). 교회는 이 세계가 이렇게 유지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내 때문이라고 간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시는 분이십니다(벧후 3:9).
예수님이 종말의 징표라고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조심해서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징표에서 세계의 종말을 계산해 낼 수 있다는 듯이 곡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화과나무 비유가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의 병행구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은 도둑이 밤중에 침입하듯이 갑자기 임한다고 말입니다(12:39). 그런데 인간은 노아 시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그리고 불현듯이 심판자로 다시 오십니다. 그 분은 번개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하늘을 밝히듯이 그렇게 아주 분명하게 오십니다(17:24).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종말의 징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본문의 바로 앞부분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가 언급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마 기원 후 70년 로마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유대인의 봉기가 제압 당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은 이런 역사적 파국을 현재의 전체 세계가 파멸할 것에 대한 징표로 받아들인 게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계의 위기 가운데서 이미 하나님 나라의 개시와 연결되어 있는 결정적인 마지막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화과나무 비유가 말하려는 의미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아직 잎이 돋지 않은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 줄기에는 물이 오르고, 여름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계의 위기와 파국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가 준비됩니다.
이제 저는 두 번째 요점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이 세상의 멸망은 두려움이나 고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종말로 인해서 신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심판자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이에 대한 신앙은 거듭해서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역사의 파국에서 확고한 용기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이러한 확신이 바로 기독교의 신앙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기독교인은 세계의 종말에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미 오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앞으로 오실 세계 심판자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바로 그분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그를 통해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일치함으로써 죽음이 없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세례를 통해서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을 위해서 세계 심판자가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과 지상(地上)적 생명의 마지막이라는 그 시점에서 바로 서서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가까이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무엇보다도 미래의 세계 심판자가 우리를 자신에게 부르시려고 구유의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이런 생명을 확신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 성탄절이 오지 않았지만 이 대강절 절기에도 역시 베들레헴의 구유에서 우리와 세계의 구원을 발견하기 위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또다시 크리스마스를 향해 달려나갈 수 있습니다. 아멘. (1996. 대강절 두 번째 주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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