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보시오!

요 1:45-51

만약 우리에게 귀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고립될 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곳에서는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데 말입니다. 특히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이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빌립과 나다나엘만 그것에 대해서 언급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풍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는 것은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의 나다나엘의 경우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들었던 것에 대해서 종종 회의적인 상태에 빠집니다. 우리가 직접 본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반박될 수 없는 실제입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와서 직접 보시오!
이 말은 우리 프로테스탄트의 귀에는 거의 불(不)신앙적인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듣는 게, 즉 말씀을 듣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신앙은 듣는 데서 나온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제 갑자기 다른 말씀이 등장합니다. 와서 보시오! 만약 이 말씀이 성서에 있는 게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것을 불신앙적인 외침처럼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 나다나엘처럼 풍문을 듣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합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눈으로 확인해야 하고 들은 것의 현실성을 확증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시각에 무언가 특별한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모든 감각으로 현실성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맛과 냄새로 경험하듯이 접촉을 통해서 아주 특별하게 직접적으로 감각적 현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눈은 특별한 방식으로 대상의 특성을 인식해냅니다. 그 대상이 우리와 어떻게 다른지, 또한 상호 연관되는지 그 원래의 것들을 인식해냅니다. 이 경우에 눈은 다른 감각기관의 수고를 덜어줍니다. 우리는 대상을 봄으로써 일단 그것이 어떤 감촉일는지, 어떤 냄새일는지, 어떤 맛일는지 감을 잡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종 보는 것만으로도 대상을 파악하는 일이 모두 해결됩니다. 나다나엘은 분명히 예수님을 만져보거나 냄새맡기 위해서 예수님에게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를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 복음에서는 본다는 것이 큰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에게 오는 사람은 그 분을 “봅니다”. 여기서 겉모습을 본다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본다는 것은 곧 “이해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바르게 보는 사람은 그 눈앞에 있는 것 그 이상을 봅니다. 그렇지 않다면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시오”라고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바로 핵심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도 보는 것이다”(12:45).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즉 아들로서의 복종이라는 상(像)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면 바로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물론 심연에 이르는 이런 봄이 당연하거나 간단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들은 종종 피상적인 봄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단지 평면적으로만 인식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자들의 경고였습니다. 인간은 눈을 가졌으나 보지 못하고, 귀를 가졌으나 듣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본질적인 것들이 종종 스쳐지나가 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충분할 정도로 세심하게 들여다보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스겔 예언자를 통해서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 사람아, 너는 반역하는 일밖에 모르는 족속 가운데서 살고 있다(겔 12:2). 우리는 종종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실제적인 것하고는 다르게 인식하곤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생기(生起)와 사물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가볍게 취급해버리고 만다는 것이 더 심각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보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 다음 구절에서 공교롭게도 오늘 본문에서 “와서 보시오!”라고 나다나엘에게 요청한 바 있는 빌립에 대해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빌립이 정확하게 직시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시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니 무슨 말이냐?(14:9).
물론 이렇듯 어떤 것을 명확하게 본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것을 통해서 그 외면인 모습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배워야 합니다. 조형예술은 우리를 이렇게 볼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미술이 그렇습니다. 화가는 풍경이나 꽃이나 인간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직 조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식해낼 수 없는 것을 그림으로 형상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표현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을 나다나엘이나 빌립처럼 더 이상 우리의 육체적 눈으로 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외적인 모습을 통해서 전반적으로 파악해낼 수 있을만한 본질적인 이것들을 우리는 여전히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내적인 눈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인 그림이나 아이콘(聖像)들은 이런 내적인 시각을 갖도록 도와줍니다.
나다나엘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눈앞의 현상 그 이상의 것을 보았습니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에게 옴으로써 그가 누구를 직면하게 되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오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은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나다나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스스로 찾아오기 이전에 이미 그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만이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는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생명을 보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분에게 숨길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에게 숨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를 알고 있듯이, 그리고 우리를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우리의 삶을 알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을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고 예수님과 친교를 나누는 사람은 나다나엘과 함께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봅니다. 이런 봄은 이미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서곡은 이렇게 울려납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그런데 이 말씀은 바울이 언급한 다음과 같은 주장과 상반되는 게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고후 5:7).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주는 게 아닐까요?(히 11:1). 요한복음에도 역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고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본 후에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도마에게 부활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 20:29). 이러한 일련의 말씀들은 보는 것보다 믿는 것이 귀중하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이미 개시된 구원의 성취를 본 것에 대한 증언입니다. 이런 봄은 우리에게 미래의 사건으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다나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말씀입니다.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 1:50,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이미 봄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에게서 눈앞에 있는 사실 그 이상을 인식하는 봄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은 이미 예수님에게서 아버지의 아들을 보고 그 아들에게서 아버지를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어떻게 더 큰 일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믿는 자로서 아버지의 영광이 아들에게 반사되는 데서만 그 영광을 봅니다. 우리는 오직 그 영광의 반영(反影)만을 봅니다. 아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나님을 직접 보는 사람은 죽어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그렇게 배웠습니다(출 33:20). 우리의 죽어야 할 눈은 하나님의 영광에서 발산되는 직접적인 빛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이사야가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을 때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첫 반응을 보였습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 (사 6:5). 우리가 이사야의 이런 충격을 함께 느꼈으면 합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뵈면 소멸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하나님의 빛을 굴절시켜 줄 경우에만 우리는 그 빛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아들의 모상(模像)을 통해서만 우리는 아버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거울로 보듯이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고후 3:18). 여기서 우리는 대상을 대충 반사시켜내는 고대의 동(銅)거울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낱말 퍼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즉 모든 것이 성취된 그 미래가 되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확실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3:12). 완전히 명백하게 말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있었을 때 예수님이 그를 알아보신 것처럼 우리도 역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바라보며, 또한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우선 우리가 나다나엘처럼 예수님에게 와서 그를 보고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빌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길을 함께 가야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시나브로 예수님에게서 아버지를 보는 것을 훨씬 잘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이제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천사들의 복음을 들었던 목자들처럼 성탄절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그들과 더불어서 베들레헴으로 갑시다. 누가복음은 목자들이 한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사실을 보자(눅 2:15). (1990, 대강절 두 번째 주일, 뮌헨, 대학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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