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서 오신 귀한 분

눅 2:8-20

기독교 절기 중에서 성탄절은 매우 특별하기 때문에 그 어떤 것으로 인해서 유보되거나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성탄 장식으로 반짝이는 네온등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대강절 화환에 담겨 빛나고 있는 촛불이 희미해질 수는 없습니다. 성탄절이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단지 성탄목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화려한 빛의 분위기 때문일까요?
고대 기독교에서 성탄절은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함으로써 세계가 변화되었다는 의미의 축제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한 해의 전환점으로서 태양이 새로 태어난다고 여겨졌던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지킨 데서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기독교 이전에도 사람들은 로마의 달력에 따라서 그 날을 축제의 절기로 지켰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구유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핏줄과 연결되셨다는 뜻인데, 고대 기독교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참된 태양으로, 즉 가시적 태양에서 참된 모상과 비유를 갖고 있는 구원의 태양으로 생각했습니다. 태양이 천체의 순환을 지배하고 있듯이 거룩한 로고스인 하나님의 아들이 전(全)우주를 통치한다고 말입니다. “모든 세계 순환을 유지시키는 분이 마리아의 자궁에 계십니다.” 그분은 이제 신적인 사랑의 깊이에서 한편으로는 거룩한 능력과 영광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구유의 아기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이런 사건에서 알려집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서로 다른 세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성탄절 절기의 특별한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성탄절은 최근에 점점 더 가족 중심의 축제로 변하고 있습니다. 구유의 아기를 중심으로 모여든 성(聖)가족 안에서 모든 인간 가족이 참된 가족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의 불빛을 통해서 고양될 수 있습니다. 이 불빛은 구유에 누인 아기의 얼굴에서 반사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 장식을 한다, 선물을 산다 해서 지난 몇 주간에 걸쳐 떠들썩했던 그 소란스러움으로부터 격리되는 이 고요는 성탄 축제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탄은 현대 기독교에서도 역시 세계 전환의 축제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이 세계 전환은 이 아기의 탄생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기(生起)가 되게 합니다. 이것은 한 해의 소요로부터 하나님의 안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며, 증오와 논란과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하나님의 평화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평화는 마지막 때 임하게 될 구원의 미래로서 인간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이 세계 전환은 이미 이 아기와 더불어서, 그리고 이 아기의 탄생으로 인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평화가 이미 현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세계가 여전히 전쟁의 외침과 인간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열함과 잔혹함으로 채워져 있지만 말입니다. 구유에 둘러선 성 가족은 하나님의 평화가 개시되는 장소입니다. 매년마다 반복해서 모든 가족이 거기서 한 빛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구유의 아기는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실입니다만,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징표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생명으로부터 발생하는 생명의 기적은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아기와 더불어 시작됩니다. 이런 아기와 더불어 이제 보다 심원한 의미에서 새로운 생명이 개시됩니다. 즉 하나님과 그렇게 오랫동안 분리되지 않은, 죽음의 밤에 떨어져버리지 않은 생명이 말입니다. 이 아기가 살아가는 길은 십자가와 죽음의 길만은 아닙니다. 이 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부활절로 이어집니다. 이 예수님의 부활은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을 향한 약속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약속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 몸이 변화되고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늘 푸른’ 성탄목이 원래 이 아기의 탄생으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구유의 아기가 야기하는 구원의 미래는 비밀 가득한 방식으로 이미 베들레헴의 외양간에 펼쳐진 장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은 이미 성탄 전야에 하나님의 명성과 영광을 찬양하고 있으며, 목자들에게 땅의 평화가 임했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늙은 시메온은 이 아기에게서 구원이 시작된다고 예언합니다. 이 구원은 “민족들에게 계시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광이 임하게 될 빛”으로서 하나님이 모든 민족들 앞에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이 아기의 탄생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인간들은 하나님 없이 자기 자신만을 모색하거나 자기의 생명을 성취해보려다가 세계의 잘못된 유혹에 빠져서 결국 죽음의 밤에 떨어져 버린 이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런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아기를 통해서 모든 인간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높은 곳에서 존귀한 분이 우리를 방문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절의 참된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이 성탄절을 맞아 선물을 주고받는 아름다운 전통도 역시 이런 이유입니다. 이런 선물은 성탄절에 아들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반향이며 그 징표입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이 기쁨은 기독교인의 삶을 관통합니다. 이 기쁨은 매번 성탄 축제 때마다 갱신됩니다. 이런 기쁨은 세계의 슬픔에 의해서 결코 소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심으로써 인간에게 개시된 구원은 은폐의 방식으로 발생했습니다. 이런 사태는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기독교 신앙의 모순을 지적하곤 합니다. 교회는 이 세계를 패러다이스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처럼 선포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계의 고통을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생명을 뛰어넘는 희망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생명에게 빛과 신뢰를 주십니다. 인간은 이 좋은 시대에 외적인 복지를 향상시키고 시민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함으로써 흡사 하나님이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심이 우리 인간들에게는 종종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를 아주 간단히 그의 약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성탄절 축제의 빛은 하나님이 매정한 세계의 겨울과 어둠 가운데서도 구원의 토대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왜 은폐되어 있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계를 멸망시키지 않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어둠은 미래에도 여전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년 마다 다시 성탄절 축제를 기다리며, 가장 아름다운 성탄절 찬송을 부릅니다. “황혼이 찾아옵니다. 가장 아름다운 자랑거리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여, 나에게 머물러 주십시오. 이제 곧 저녁이 됩니다. 당신의 빛을 여기 땅에 사는 우리에게서 거두지 말아 주십시오.”  (1992년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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