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

요 8:12

우리는 낮의 길이가 짧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도 빛을, 그 빛의 생생한 작용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화초를 키우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면서 그런 빛의 작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빛과 우리의 관계는 다층적입니다. 인간은 낮을 밝히는 빛이 태양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 적이 없습니다만, 이 빛을 다른 차원에서 인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경우에도 역시 빛의 의미는 물리적 성질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 빛의 이면이 있습니다. 광명의 드러냄과 크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빛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며, 눈이 닿는 먼 곳까지 보게 만듭니다. 그뿐만 아니라 빛은 우리의 내면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침입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를 향해 길을 가다가 빛을 보았을 때 이런 체험을 했습니다. 이 빛은 바울을 넘어지게 했으며, 그 뒤에 다음과 같은 소리가 그에게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지오는 이 장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그 유명한 유화 작품이 로마의 마리아 델 포폴로 교회당에 있습니다. 말을 타고 가던 사울은 길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밝게 빛나는 말의 갈기 너머로 한줄기 빛이 사울을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울이 받은 계시의 수단이었습니다. 근대 초기에서 다른 화가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빛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컨대 렘브란트가 흑판에 그린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한 일련의 그림들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런 흑판화를 뮌헨의 고대 회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을 제자들이 끌어내릴 때 그의 몸을 감싼 천에 초(超)지상적인 빛이 감돌았습니다. 끌로드 로랭의 풍경화나 윌리암 터너의 해양화(海洋畵)에는 빛이 거룩한 성질을 갖습니다. 즉 감상자를 사로잡는 초지상적인 능력이 그것입니다. 빛에는 모든 형상을 거절하는 하나님이 현재 하십니다.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빛은 하나님의 집입니다(딤전 6:16).
창조를 노래하는 시편 104편은 하나님이 첫 번째로 창조한 빛의 시작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입으실 ‘옷’이 거론됩니다. 요한의 첫 번째 편지에는 하나님 자신이 곧 빛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빛입니다. 그에게는 결코 어둠이 없습니다”(요일 1:5).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도 역시 빛 속에서 삽니다(1:7). 그리고 모든 것이 완성되는 미래에는 그 어떤 다른 빛이 필요 없게 됩니다. 램프도 필요 없고 태양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하나님은 자기의 빛을 모든 것들 위에 비추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와 그의 뒤를 이은 요한계시록 기자는 그렇게 약속했습니다(계 22:5). 그러나 하나님의 이러한 미래는 이미 우리 앞에 당도했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야훼의 영광이 너를 비춘다.”(사 60:1).  
이 일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빛이 그를 통해서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빛이, 즉 생명의 빛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빛은 처음부터 세상을 비추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는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 1:9). 모든 피조물들의 현존을 가능하게 한 그 창조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 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생명의 빛,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그 어떤 다른 빛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빛입니다. 생명과 빛은 상호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식물과 모든 생물에게 생명 작용을 일으키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이상입니다. 생명 자체가 빛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죽음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즉 죽음을 극복한, 그리고 우리의 현재적 지상 생명의 뿌리가 되는 부활절 아침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 말씀 가운데 뿌리를 두고 널리 널리 전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이 이렇게 피력했습니다. “그에게 생명이 있었으며, 이 생명은 바로 인간에게 빛이었다.”(요 1:4). 이런 생명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제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교회는 매년 1월6일을 예수님의 현현절로 지킵니다. 현현(Epiphanie)이라는 말은 일종의 나타남, 계시됨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의 현현절이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계시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언제 발생합니까?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예수에게서 나타나는 사건의 토대는, 즉 계시 사건의 토대는 영원한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과 모든 사물을 창조하실 때 사용한 그 언어가 예수라는 인간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간되심을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시키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생기(生起)를 성탄절의 축제로 지킵니다. 물론 이 아기의 탄생이 갖는 비밀은 베들레헴의 외양간과 구유의 초라함에 은폐된 채로 세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들판의 목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알려졌습니다. 천사가 목자에게 나타났을 때 이 영광은 천사를 두루 비추었습니다. 목자들 이외에는 단지 별 빛을 보고 동방에서 온 세 명의 현자들만이 이 빛을 경험했습니다. 이 별은 이 현자들이 순례의 고행을 마다하지 않게 만든 그 사건의 장소를 지시해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예수의 탄생은 은폐의 사건으로 머물러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고서야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인간으로서 공적인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이 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불렀으며, 스스로 이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곧 이어서 그 분은 하나님이 가까이 임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참 빛을 가져다주기 시작했습니다. 계시 사건은, 즉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서 나타난 사건은 교회에 의해서 특별히 그의 세례와 연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이 보도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현현과 계시의 축일에 읽는 복음 말씀으로 전래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가 비록 예수님의 공적 활동 초기에 자리를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승인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인 빛은 그 분의 말씀과 활동에서 거의 인식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점점 더 심각한 저항을 받았습니다. 이 빛은 어둠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이를 깨닫지 못했습니다(요 1:5).
여기서 말하는 어둠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가 여전히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빛에 접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이 세상살이의 일상에서 이렇듯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납니다. 비록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 생명이 유지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런 사실을 오늘 이 세상에서 몹시 고통스럽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나이가 든 분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즉 대(大)재난의 쇼크 밑에서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을 향한 새로운 전환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기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살아남은 자들을 용서하셨으며, 우리 민족에게 또 다시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보도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역사에서도 역시 풍요의 시대가 종종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간격을 넓혀갑니다. 이로 인해서 야기되는 파멸을 생각하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멀어짐으로써 발생하는 어둠입니다. 이 어둠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인간이 그것을 어둠으로 느끼지 못하고 자기 운명의 발전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부담스러운 세계와의 연결로부터 해방되는 것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파악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빛을 수용하지 못하는 어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역시 공생애 중에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오히려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몰렸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한 세례는 그 분의 운명 앞에 놓여있는 죽음의 봉인(封印)이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둠의 승리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은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 그에게 계시되었습니다. 이런 생기에 의해서 이제 예수님은 자기가 걸어온 전체 길에서 세상의 빛이십니다. 바로 그 분을 통해서 하나님과 그 생명은 우리와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들이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 8:12). (1999.1.10, 뮌헨, 마태우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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