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떨기

출 3:1-1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초기 역사에서 발생한 하나님 경험을 서술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신 유대인 나사렛 예수를 통해서 우리와 연루하게 된 역사입니다. 이 불타는 떨기의 빛은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시는 통로인데, 이 빛은 우리까지도 비춥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하나님의 빛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에서 계시된다는 점을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래서 현현절 마지막 주일을 맞아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를 설교 본문으로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망명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싸움질을 하다가 사람을 때려죽인 다음, 오늘날 요르단 지역인 아카바 만(灣)의 미디안으로 피신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이나 또는 (구약성서의 다른 보도에 따르면) 켄 사람들은 유목민이었습니다. 추측컨대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편입되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도 역시 팔레스틴에 정착하기 전에 유목민 내지는 반(半)유목민이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에게서 피난처를 찾은 것입니다. 모세가 이들에게 순순히 받아들여진 까닭은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자기 딸을 모세에게 주어 결국 그의 장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미디안의 제사장 이드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산(山)에서 (산의 신) 야훼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본문의 뒷부분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와 그의 백성들은 희생 제물로 함께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은 출애굽기 18장에 있습니다. 미디안 지역에 있는 이 하나님의 산은 (호렙산, 또는 시나이산이라고 불리는데) 성지였으며, 이 산에 거주하고 있던 신은 모세와 그의 백성들이 그를 알기 전에 이미 미디안 사람들에게 경배의 대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바로 이 신의 제사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드로가 어떻게 이 신에게 희생제물을 가져올 수 있었겠습니까? 모세는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이 하나님과 그의 활동에 대해서 경험했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의 장인이며 제사장인 이드로의 양들을 쳤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그는 원래의 목축지 경계를 넘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하나님의 산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디를 침범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이 산에 살고 있던 신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요점입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임재에 늘 휩싸입니다. 비록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하나님이 비가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놀라운 게 아니라 이것이 우리에게 인식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제 현실성(Wirklichkeit)에 대한 우리의 세속적 관점은 모세에 비해서 훨씬 메말라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개입되어 있는 이러한 가치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이 별로 예민하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보나마나 우리는 불타는 가시나무덤불을 아주 이상한 자연현상 정도로만 간주할 것입니다.
빛 현상이 양치기 모세에게 임했습니다. 방목지에서 자라는 떨기 중의 하나가 흡사 불에 타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불에 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 현상이 모세의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에 그는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게 완전히 일반적인 진행에 불과합니다. 우리도 역시 이런 현상을 만나게 되면 호기심을 발동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자연 현상은 흔하지 않긴 하지만 유일무이한 것은 아닙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현상에 대한 보도가 허다합니다. 요즘 우리는 이런 현상을 성(聖) 엘모의 불(St. Elmsfeuer)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뇌우 따위가 있을 때 배의 돛대나, 나무, 또는 말의 귀에 나타나는 빛 현상입니다.
이 신기한 빛 현상은 단지 모세가 여기서 만난 고유한 사건의 동기만 유발시켰을 뿐입니다. 즉 모세가 들어간 산의 하나님은 자신을 그에게 알리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분명히 모세는 경악했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 장인으로부터 이 산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멋도 모르고 들어간 바로 그 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이것은 하나님의 현실성이 우리 인간 경험의 세계에 개입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에 묘사된 모세의 이 경험이 우리에게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들과 다르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최소한 자기 인생에서 한번쯤은, 특히 내면적으로 변화가 심한 사춘기에 한번쯤은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춘기 무렵에 고도의 감수성을 갖고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의 젊은이들은 우리 기성세대들과는 다릅니다. 우리 기성세대는 종종 일상의 삶에 고착되어 있어서 현실성에 무감각하게 살아갑니다. 우리 삶을 감싸고 있는 이런 가치 있는 것이 놀라운 사건을 통해서 갑자기 우리의 내면 세계를 밀고 들어오는 경우에 우리는 이런 음성을 듣습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을 벗어라. 우리가 참되게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 인생의 여분을 이러한 순수 경험으로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전체 삶을 이런 일로 가득 채우는 일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모세에게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한 조건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언급하듯이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말씀 안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유일회적인 성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사실은 이 이야기가 왜 수 천년에 걸쳐서 거듭해서 사유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정적인 요인은 앞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문장에서 전례 없는 균일화가 이루어집니다. 미디안의 낯선 하나님인 산신(山神)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과 동일시됩니다. 모세는 이집트에 있을 때 자기 민족들에게서 그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유목민의 성지에 있는 신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과 똑같은 그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곧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뒤이어 그에게 엄청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미디안 사람들의 성지에서 조상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이집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요? 모세는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을 것입니다. 아마 자기 장인과도 이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자기 민족을 끌고 이집트를 떠나 상당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잘 알지 못하는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모세는 그곳에 들어가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그 땅을 직접 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 서술되어 있듯이 불붙는 떨기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곧 모세의 전체 인생을 요약한 것입니다. 모세는 정말 매 순간마다 이 말씀을 그렇게 명백하게 들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이 말씀들이 모세가 걸어온 인생의 길에서 단계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다가온 것일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한 결과로서 말입니다. 어쨌든지 모세의 경우에 이런 사건은 그가 전체 삶을 통해서 따라야만 했던 하나님의 명령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유대 민족이 이런 이야기를 모든 세대를 통해서 보증하고 유지시켜왔다는 사실은 그 어떤 증명도 필요도 없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우리 기독교인에게 무든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답 외에는 없습니다. 모세가 가시나무덤불에서 만났던 그 산의 신은 바로 예수가 그의 나라가 오신다고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예수가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시키라고 요청함으로써 이제 하나님과 그의 나라에 대한 열정은 산의 신과 상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첫 계명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너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아라. 다른 말로 예수는 신명기에 나오는 이 최고의 계명을 이렇게 피력하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29). 예수는 이 첫 계명을 완전히 문자적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우리와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활동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이미 현재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현재는, 즉 가시나무덤불의 빛은 변화산에 올라갔던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을 모세, 그리고 예언자 엘리아와 밀접하게 연결시켜 인식하도록 했습니다. 엘리아는 이 첫 계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투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실에 대한 명백한 인식도 없이 다른 많은 신들을 섬김으로써 이 세상의 선입견과 우리 자신의 흥밋거리에만 연루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세에게 일어났던 것 같이 가시나무덤불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모세와 그리스도 변형 사건에 있었던 이 빛은, 그리고 성탄절의 별빛과 부활절 아침의 빛은 시간을 넘어서 우리까지 비춥니다. 우리의 마음만 사로잡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까지 변형시킵니다. 이 변형된 생명은 부활한 예수가 죽음을 극복한 바로 그 생명인데,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예수가 다시 오실 미래에 우리가 얻을 수 있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십니다. 아멘. (1993.1.31, 그레펠핑에서)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