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이성
(막5:1-20)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 지방에 이르렀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셨을 때에 더러운 악령 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오다가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매어 둘 수가 없었다. 쇠사슬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번 쇠고랑을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 두었지만 그는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쇠고랑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밤이나 낮이나 항상 묘지와 산을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짓찧곤 하였다. 그는 멀찍이서 예수를 보자 곧 달려 가 그 앞에 엎드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왜 저를 간섭하십니까? 제발 저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것은 예수께서 악령을 보시기만 하면 "더러운 악령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너라" 하고 명령하시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는 "군대라고 합니다. 수효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방에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애걸하였다.
마침 그 곳 산기슭에는 놓아기르는 돼지 떼가 우글거리고 있었는데 악령들은 예수께 "저희를 저 돼지들에게 보내어 그 속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더러운 악령들은 그 사람에게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을 내리달려 물 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 치던 사람들은 읍내와 촌락으로 달려가서 이 일을 알렸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 나왔다가 예수께서 계신 곳에 이르러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바로 입고 멀쩡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이 일을 지켜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나았으며 돼지 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동네 사람들에게 들려주자 그들은 예수께 그 지방을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를 따라다니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지만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주께서 자비를 베풀어 너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주셨는지 집에 가서 가족에게 알려라" 하고 이르셨다. 그는 물러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두루 알렸다. 이 말을 듣는 사람마다 모두 놀랐다. (마가복음 5:1-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7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오늘 성서본문에 보도되어 있는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과 귀신 들린 사람 사이에서 오간 대화를, 그리고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는 돼지에 얽힌 이 사건을 모든 게 사실이라고 믿어야만 합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역사적으로 정확하다고 볼만한 보도가 별로 없습니다. 이미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 관한 전승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게네사렛 호수 근방의 가다라로, 다른 한편에서는 훨씬 내륙에 위치한 거라사로 거명됩니다. 저는 오늘 설교에서 일단 거라사로 부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신약성서의 다른 사건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그들이 보도한 그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만 해도 그렇습니다. 바울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복음서 기자들도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가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오늘 우리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건들은 어떤 다른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무언가 전형적인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의 경우에는 곧 귀신을 제압하는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의 본문 사건은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건과 닮았습니다. 이러한 치유 사건들도 대개는 교훈이 될만한 것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시각 장애인을 고치는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사람의 시각 장애를 어떻게 고치시는가 하는 점이 설명됩니다. 그러니까 시각 장애인의 치유는 오늘 우리의 영적인 시각 장애도 역시 치유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습니다. 마법사요, 엑소시스트로 일하셨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 본문과 같은 사건은 평소에 볼 수 있었던 그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연관된 이런 많은 치유 이야기 중에서 오늘의 이 이야기만큼은 어떤 분명한 사건을 정확하게 재현한 것으로 보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모든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즉 오늘도 그대로 재현될 수 있는 어떤 사건의 전형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건의 핵심은 예수님이 인간을 귀신의 지배에서 해방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 짧은 이야기에는 무언가 독자들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내용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다른 신약성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기분을 풀어주는 이러한 내용에는 간혹 통속적인 익살이 포함됩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나야만 했을 때 그 귀신은 비록 이 사람에게서 쫓겨 나오더라도 그냥 그 지역 어딘가에 머물러 있도록 간청했으며, 또한 새로운 처소를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아주 우스꽝스러운 묘사입니다. 이런 익살스러움은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간 후 그 돼지 떼가 바다에 빠져죽는 장면에서 정점에 도달합니다. 귀신이 돼지 떼에게 들어갔다는 이러한 묘사는 분명히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의 기분을 흐뭇하게 만들어주었을 겁니다. 즉 이 사람들은 아마 거라사 지방에 살고있는 이방인들의 먹거리인 돼지가 손실되었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귀신들이 부정하고 하찮은 짐승과 더불어서 죽은 자의 세계인 오르쿠스(Orkus)에 빠져 죽었다는 상상으로 매우 즐거웠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유쾌한 이야기는 부활절 후 3번째 주일(유빌라테)인 오늘의 설교 본문으로 썩 잘 어울립니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은 곧 축제를 열어야할 기쁨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 안에서 자유의 영이 증거됩니다. 기쁨이 없으면 그 어떤 참된 자유도 없습니다.
자유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말하자면 귀신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약간만이라도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자유"라는 주제가 이 이야기의 초장부터 이미 확실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귀신 들린 사람의 치유가 처음부터 언급된 것은 아닙니다. 귀신 들린 사람에게 이 자유는 이미 오랜 세월 이전부터 간절한 소원이었습니다.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라사 시민 사회가 그 사람에게 채워놓은 쇠사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어쩌다가 운이 나빠서 이런 몹쓸 병에 걸렸다기보다는 이 사람에게서 어떤 보편적인 인간 속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자유와 해방이 긴급한 요청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귀신 들린 이 사람은 자신이 쌓아올린 교양 안에서 조금은 지루하게 살아가고 있는 거라사 시민들과는 달리 자유와 해방을 요구하는 인간 속성의 상징이 되는 건 아닐까요?
여기 귀신 들린 이 사람을 아주 단순하게 정신병에 걸린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질적인 상황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귀신 들린 사람을 단순히 환자로만 생각한다면 건강하고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 사건은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귀신 들린 사람의 모습에서 그것이 오늘 우리 현대인에게도 보편적으로 타당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우리가 이런 문제를 잘 파악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소위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의 경우에도 자아가 자신의 행동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게 결코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종종 자기가 대항하지 못하는 어떤 익명의 세력에 의해서 규정되곤 합니다. 인간의 공격적인 행동에 대해서, 즉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이 인간 관계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또는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인간에게 군림하는 돈의 힘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군림하는 자본의 힘을 얼마나 독특하게 악마적 색깔로 묘사해 놓았는지 보십시오. 돈의 익명적 힘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대적 삶을 어디서나 관통해나가고 있는, 우리가 포착해내기도 힘든 소외의 힘, 그리고 우리를 강압해 들어오는 광고와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필요로 하게끔 만드는 어떤 힘의 지배,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우리의 자아가 얼마나 제한적인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시대의 귀신 신앙으로 곧장 되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이 다루고 있는 문제도 귀신 신앙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과는 달리 오늘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세력들의 작용에 대해 최소한 부분적일지라도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세력들이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떤 근원을 갖고 움직이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세력들의 본성은 항상 초인간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한 행동방식이 그 개체의 행동에서 떨어져 나와 그 개체를 지배하고, 또한 경우에 따라서는 그 개체의 주변으로 전이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병적인 경우와 공격적인 힘이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본과 돈의 힘을 분석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분석할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그런 세력을 제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분석만으로는 그런 종류의 세력들이 끼치는 파급력을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민족주의적 망상이나 인종적 열광주의와 같은 매우 거대한 역사의 히스테리를 너무나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그때는 이미 그 광기가 큰 불행의 상처를 남긴 뒤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면 귀신 들린 사람과 거라사의 유복한 시민들 사이에서 현저한 것으로 보였던 차이가 이제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거라사 시민들도 역시 어느 정도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아닐까요? 돈의 힘에, 그들의 공격성과 거짓 필요성에, 그리고 누가, 무엇이 예의 바른가, 혹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하는가에 대한 그들의 생각에 귀신이 들린 것은 아닐까요?
거라사 사람들도 귀신에게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 오늘의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는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혹은 수천의 귀신 집단을 뜻하는 레기온은 한 개인에게나 혹은 전 지역에 자리잡고 활동했습니다. 아마 거라사 사람들은 귀신의 책동을 어떤 식으로든지 경험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책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든지 않든지 간에 말입니다. 그들과는 달리 귀신 들린 이 사람의 행동에서는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훨씬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자유를 향한 충동이 때로는 어떤 폭력성을 수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일단 자유를 향해 전진하고 있기는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호흡하기 위해서 외딴 언덕에 나가 살고 있던 이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그의 모습은 끔찍해 보였을 겁니다. 그는 분명히 정상적인 거라사 시민의 생활방식과 법칙으로부터 멀찍이 빗겨나 있었습니다.
조금 더 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그는 괴성을 지르고, 돌로 자기 몸을 내리쳤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세심하게 주목해야할 현상은 그가 자기 자신을 돌로 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일반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자기 만족감이 현저하게 부족했습니다. 그는 자기 삶의 방식에서 불행을 느꼈습니다. 어쩌면 거라사 지역의 전반적인 상황을 불행한 것으로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느낌은 당시 거라사의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느끼고 있던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을 겁니다.
본문 말씀을 조금 더 읽다보면 이 사람이 입은 옷도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게됩니다. 거라사에 살고 있던 교양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기절초풍했을 것이며, 그를 볼 장 다 본 사람이라고 취급했을 겁니다.
성서 본문이 끝으로 이 사람의 모습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고 말입니다. 만약 자기 통제가 어렵거나 말을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병든 것으로 간주하고 요양소에 가두어 놓거나,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나지만, 공식적으로 정신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해서 고립시켜버린다면 이것은 오늘 본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곧 쇠사슬로 묶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당함으로써 그 증세가 훨씬 나빠진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상하게도 정말 아무도 놀라워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우리의 눈에 기이하게 보이는 그런 사람들의 현상을 무조건 병든 증거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쇠사슬로 채워버리는 조치는 그 당시 사회에서도 이미 가장 손쉽고 깨끗한 처리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켜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또 다른 방식으로 귀신 들린 우리들은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 자유를 열망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과연 자유를 소유하고 있는지 아닌지 완전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전체 삶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귀신 들린 이 사람에게 오십니다. 이 이야기에 묘사되어 있는 예수님에 대한 설명은 다소간 그 당시의 역사적인 한계와 그 특징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할 내용이 못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완전히 대(大)엑소시스트로, 초능력적인 마법사로 등장합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가까이 오기도 전에 벌벌 떨면서 싸움을 포기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위대성을 어떻게 드러내 보이고자 했는지 그 당시의 고대 청중들에게는 매우 분명하고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회에서 활동하는 귀신들은 유감스럽게도 주문 같은 것에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대개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도 그렇게 간단하게 물러서지 않습니다. 이 귀신들은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도 정말 고집불통처럼 활개를 쳤으며 은밀하게 자기를 성취해 나갔습니다. 귀신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거나 너무 뒤늦게 무언가를 감지하게 될 때 가장 왕성하게 활동합니다. 이 귀신들은 우리 기독교 교회가 역사적으로 많은 악한 세력들과 타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일방적인 교리를 강요하고 선동적인 교회 정치를 강화함으로써 마녀사냥, 이단박해, 종교전쟁을 기독교 역사의 본질인 것처럼 몰아갔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오늘 우리에게 붙어있는 이 시대의 귀신은 성서본문에 등장하는 귀신과 달리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수 없는 막강한 힘을 자랑합니다. 바울은 이미 이 문제를 상당히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죄에 물든 우리의 육체는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회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엑소시즘(축귀)과 자유롭고 평등한 대화는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문제들을 순진하게 생각해버리면 언젠가는 마땅히 그에 상응한 책임을 지게 될 것이며, 우리 시대에 거듭해서 테러의 고통을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이따금 이곳 저곳에서 미약하나마 약간의 엑소시즘이 이루어져서 우리의 기분을 풀어줍니다. 그러나 그런 정도로는 완전한 엑소시즘은 이루지지 않습니다. 죄로 물든 육체는 곧장 죽음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죄가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도 바울의 이런 생각에는 당연히 죽음이 최후가 아니라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서 일어난 새로운 생명을 죽음에 맞서 희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생명에 의해서 그는 이미 이 세상살이에서도 각각 새로운 생명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죽음의 공포가 휘두르는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의 공포는 그 길이가 길면 길수록 우리를 더욱 확실하게 쇠사슬로 묶어놓으며, 또는 그런 절망에 빠지지 않는 경우라면 최소한 삶에 대한 욕망에 빠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그 어떤 엑소시즘도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해방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이 더욱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부활한 분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해방시키시며, 또한 우리가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생산해내는 현존의 과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그러나 부활한 분에 대한 이 믿음은 우리가 이미 모든 쇠사슬에서 면제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를 해방시키지는 않습니다. 이 믿음은 희망의 방식으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이 희망의 방식은 언젠가 오리라는 막연한 시간을 통해서 값싸게 베풀어주는 위로가 아닙니다. 순전한 희망은 오히려 현재를 밝혀줌으로써 현재를 변화시킵니다.

이런 변화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게 될지 오늘의 본문 사건에서 다시 한번 배워봅시다. 비록 이 소외시키는 세력으로부터의 자유가 단순히 엑소시즘을 통해서도 선물로 주어진다는 점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무언가 더 심원한 것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의 생각을 존중해야합니다. 이 자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오늘 우리의 본문 사건이 가장 주목할만한 요소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서 자유를 갈구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참된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어떤 방식이었든지 간에 그는 자유를 발견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라사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일어난 일이 어찌된 것인지 호기심을 갖고 살펴봅시다. 거라사 사람들과 함께 그 현장으로 달려가 봅시다. 우리는 그곳에서 도대체 어떤 장면을 목도할 수 있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은 아연실색케 할 정도로 단순 명료한 답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평소에 잘 알고 있던 귀신 들린 사람이 이제 바른 정신으로 앉아 있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이 보도에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이제 모든 게 정상적으로 되었고 모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거라사에 살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똑같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도대체 거라사 사람들의 일반적인 삶이라는 것, 그들의 이성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요? 귀신 들렸다가 제 정신을 차린 이 사람을 다시 보았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은 분명히 그 어떤 해명이 없는 한 이성적이었다고 간주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서 올바른 이성을 찾아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지도 않았고, 그 일을 기뻐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거라사 시에 적합한 새로운 제도와 법을 제정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통상적으로 현자에게 이런 법을 간청해서 사회의 공적인 생활이 정말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규칙에 따라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거라사 시민들은 예수님에게 그 지역에 오래 머물러서 거라사 시가 이성적인 힘으로 운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에게 그것과는 정반대의 요구를 했습니다. 가능한대로 신속히 그 지역에서 떠나가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과연 광란하던 사람을 정신 차리게 해준 것에 대한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거라사 사람들은 분명히 무언가를 두려워했습니다. 한 인물이 미쳐서 광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그들은 아주 익숙해 있었고 서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창졸간에 정신을 완전히 되찾아버린 것입니다. 거라사 시민들은 이 사실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을 둘러싼 모든 세계의 질서가 혼란스럽게 뒤범벅이 되었습니다. 거라사 시민들의 태도는 분명히 그럴만한 것처럼 보입니다. 의례적인 자신들의 세계 구분에 매달려 보려는 사람들은, 특히 자기 집단에 속했는가 아닌가에 따라서 다른 사람을 구분하는 것에 집착하던 사람들은 늘 그렇게 반응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이 이 귀신 들렸던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된 상황만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한 때 광란에 빠져 날뛰던 사람이 이제 정신을 차리고 앉아있다는 상황이 그들에게는 역시 그렇게 아주 익숙하거나 당연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렸던 우리의 이 친구는 이제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 앉아 있습니다. 그는 이제 정상적으로 옷을 차려 입었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완전히 벌거벗은 채, 혹은 반쯤 벗은 채 이리저리 달음박질하거나, 전장에 나선 사람처럼 몸을 울긋불긋 치장하거나, 끊임없이 울부짖는 소리를 지르면서 자유를 달라고 시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이제 정말 자유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처럼 편안하게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저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앞서 거라사 사람들이 전혀 이성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반면에 우리의 친구는 이성적으로 그곳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성은 매우 희귀한 풀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든 일이 이성적으로 진행되고 인간의 행동도 당연히 이성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성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가장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처신하는가에 대해서는 반문해보아야 합니다. 이성은 이 이성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사랑과 마찬가지로 실제로 나타나는 경우는 아주 드뭅니다. 이성과 사랑, 이 두 가지는 모두 자라기 힘든 풀과 같아서 이성과 사랑으로 행동한 사람은 그 지방에서 추방당할 각오를 해야합니다. 이런 일은 거라사 땅에서만 일어난 게 아닙니다. 이런 일 자체가 어느 정도 역사의 일반적인 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서도 여전히 부당하게 취급당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참된 이성은 찾아보기가 몹시 힘들기 때문에 아주 위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따라서 이성은 그 지역에 익숙한 옷을 걸쳐 입는 게 안전합니다. 그렇게 하면 유별나 보이는 일이 적어질 테니까 말입니다.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대학에서도 항상 이성이 작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별로 요긴한 일도 아니면서 돈이나 삼켜대는, 혹은 오히려 손해를 끼치는 비이성적인 연구 프로젝트가 적지 않습니다.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비이성적인 조직들도 있습니다. 또한 이곳 저곳에 비이성적인 연구원이나 선생들이 있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대개가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사실이지만 비이성적인 대학생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오늘날 대학이 완전히 이성적으로 운영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대학이 늘 이성의 활동 영역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되려면 그 주장과 요구들이 미사여구로 끝나지 말아야 합니다. 대학이 이성의 보루이어야 한다는 말에는 의심의 여지가 추호도 없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살아가는 그 자리에서 이런 일에 기여해야합니다. 이곳 대학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이 바로 대학에 주어진 최고의 명예이며, 또한 대학에 맡겨진 요청입니다. 어느 정도나 이런 요청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가시적인 성과가 있습니까? 대학에 속해있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이성의 징표가 보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 말씀은 최소한 한 가지만이라도 이러한 징표를 찾아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이성이 괴이쩍어 보이지 않게 되었으며, 사실적으로 나타났다는 말씀입니다. 이성이 단정한 옷차림으로 등장합니다. 이렇듯 어울리는 옷을 준비하는 일이 항상 최신 유행을 따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한 이것이 곧 이성을 차렸다는 충분한 표식이라고 결코 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성이 옷을 단정하게 입은 것만 갖고는 세련된 거라사 시민들과 외면적으로 전혀 구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질문해봅시다. 앞서 광란에 빠졌던 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정신을 차리고 그렇게 앉아있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오늘 성서 말씀에는 약간의 보충설명이 있긴 합니다. 치유된 이 사람, 이성을 찾은 이 사람은 예수님 편을 들게 되었으며, 쫓겨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렇게도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제자가 되기를 원했는데도 예수님이 이를 허락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 모든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 짚어봅시다. 거라사 시에서 이성은 자명하지 못했습니다. 자유가 이성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것과 똑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자유와 이성을 찾은 우리의 친구는 거라사 사람들에게 선교사, 즉 설교자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과연 오늘날 어떤 설교자가 이럴 수 있을는지요?) 인간이 자유와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 설교했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이 과연 거라사 시민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었을까요, 아닐까요? 그 말을 들은 거라사 사람들이 도대체 알다가도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을 그냥 묻어두어야만 할까요? 그들이 이성적이고 자유로운 시민이라는 사실은 그들 스스로에게 그야말로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에 자유와 이성에 대한 이 사람의 말이 기이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종교적 장광설화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것은 특별한 종교적 요구 전반에서 본다면 아주 미미할 뿐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 배후에 어떤 정치적 의도가 숨어있거나 경제적인 이해타산이 감추어져 있는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런데 종교적으로 흥미를 가졌던 거라사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그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종교적인 대화에서 기대되는 것이 정말 마음 중심에서 울려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좀더 신앙적이고 경건한 모습으로 나타나야만 했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 이성을 차리고 그곳에 앉아있듯이 말짱한 정신으로 대화하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 심연으로 침잠하고, 무언가를 고양시키는 것들이 언급되었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거라사 사람들이 한때 광란에 빠졌다가 자유와 이성을 찾은 사람의 말을 듣고도 그저 기이하게 생각해버리고 말았지만, 결국 거라사 시를 포함한 게네사렛 호수 부근의 헬라도시들은 뒷날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성과 자유의 승리입니까? 아마 이런 승리는 기독교 자체가 이미 시대적인 사조가 되었을 때, 그러니까 콘스탄틴 대제 이후 시대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거라사 사람들은 결국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최소한 부분적으로라도 자유와 이성을 위한 그 무엇인가를 발견했을까요? 혹은 그들은 자유와 이성에 관한 것들이 믿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을까요? 침울한 사실주의가 바라보듯이 세계 진행의 개연성은 확실히 이런 기대와 상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사건이지만, 이 세상에서 자유가 이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곳에서는 무언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개연성에 맞섬으로써 모든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것이며,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실행하는 방식으로는 이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이성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인간 세상에서 당연히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니며, 이해될 만한 일도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라사 사람들이 기독교화 되었을 때 그들은 기독교적인 시대사조만 따른 게 아니라 기독교의 복음 자신에서 자유와 이성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성과 자유가 이 세상 안에서 특별한 사건이 되었다는 이 사실은 무언가 불가해한 일입니다. 그러나 실질적인 것이 인간의 이해 능력보다 훨씬 거대하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은 이성적인 일입니다.
모든 인간의 이해 능력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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