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신 신앙
신 6:4,5

우리가 바로 위에서 읽은 본문 말씀은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두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입으로 암송하며 죽어갔습니다.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살해당할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때 이 말씀을 외웠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유대인들이 주변의 여러 제국들에 의해서 간단없이 정복당하는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그들을 단단하게 결속시켰습니다. 영토와 국가 체제 없이 살아야만 했던 그런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말입니다. 이 세월 동안 다른 수많은 민족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유대민족은 살아남았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민족 전체가 살아남았습니다. 추호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神)증명이 가능한가에 대한 프리드리히 대제의 질문에 대해서 볼테르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유대민족이라는 존엄! 이 민족은 분명히 고난이 연속되는 역사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들의 정체성은 날이 갈수록 명확해졌으며, 전체 인류 앞에서 한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증거로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한 하나님은 이 민족을 선택해서 자신의 신성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유대인이 아닌 우리와 연결시킬 어떤 자격이 있습니까? 그 말씀이 바로 우리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이 유대인의 신앙고백은 우리 기독교와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거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야만 할까요? 유대인들과 모슬렘교도들은 초기 기독교 이래로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가 반(半) 다신론주의자들, 또는 전적인 다신론주의자들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모슬렘교도들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신경을 씁니다. 그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한 하나님을 무언가 다르게 ‘설정’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한 인간인 예수님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차원에서 섬기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받는 우리 기독교인의 세례를 한 하나님에 대한 곡해라고 간주하며,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본문에 담긴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을 왜곡시킨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어떤 근거에서 우리와 연결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어떻게 그 말씀에 책임을 져야합니까?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언급함으로써만 이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인 이 본문을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이 말씀은 하나님의 첫 계명이며 지고의 계명입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웃 사랑을 두 번째의 계명으로 거론하셨는데, 이것은 중요한 랍비들의 가르침에 걸맞은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은 첫 계명보다 하위에 속합니다. 이웃 사랑은 첫 계명 다음으로 제시되는 두 번째 계명이기 때문에 결코 첫 계명의 자리에 들어설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이웃 사랑에서 예수님이 정작 말하고자 했던 것과는 다른 것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이웃 사랑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상응하는 운동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방향을 트는 것은, 즉 그 나라의 도래에 마음을 두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첫 자리를 차지해야 마땅합니다. 이 사실이 망각되는 곳에서는 인간 사이에 결정적인 요소가 훼손됩니다. 마음이 담긴 위로의 말없이, 또는 신앙의 말없이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데 머물러버리면 인간은 영적으로 궁핍해질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것을 하나님에게 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동료에게 어떻게 나누어줄 수 있겠습니까? 어거스틴의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속 사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주 간단히 더불어 사는 것으로 해소시켜버리고 맙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과 그의 태도는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한 하나님과 도래하는 그의 나라에 집중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태도는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에 상응합니다. 하나님의 유일성에 대한 신앙고백은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바로 이 한 하나님을 지향해야 하며, 또한 그 분만을 중심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마음을 다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온전한 이성을 통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마음은 사유의 자리였으니까 말입니다. 만약 인식과 학문이 없다면 결국 하나님에게 아첨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을 다해서 그 분을 사랑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열망을 그 분에게 놓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에서 ‘영혼’은 무언가를 강렬하게 필요로 하는 생명으로 이해되었으니까 말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모든 필요성은 하나님을 목표로 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을 때까지 불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멀리해야만 할까요? 우리의 영혼이 찾아야 할 첫 번째의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차원에서는 일단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둔다면 이 세상은 우리를 하나님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의 미래에 설정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서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의 백배를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그런 사람은 앞으로 도래할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마 10:30).
이상한 일이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신앙을 자신의 하나님과 관련을 맺는 일에 아주 열정적인 자세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그의 민족들로부터 상당한 반대와 적대감을 경험하셨습니다.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은 그 이외의 모든 요청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한 하나님(der eine Gott)은 모든 참된 율법의 원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한 분 하나님에게 방해거리가 되는 자기 민족의 여러 전통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의 나라에 집중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곧 불경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즉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전권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것처럼 비쳤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갈등 가운데서 자기 민족에게 버림받은 분으로, 그리고 로마 사람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분으로 고백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절의 빛에서 한 하나님에게 참된 명예를 바친 유일한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신앙고백이 첫 계명을 요청 받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현재 함께 하십니다. 유대인이 아닌 우리에게 말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신에서는 바로 그 한 하나님만이 언급될 뿐이지 유대 민족이나 다른 민족의 전통이나 습관이 언급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여러 민족들에게도 역시 그들의 하나님으로, 즉 참된 한 하나님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방식으로만 아버지를 인식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들과 영 안에서만 한 하나님을 갖고 있습니다. 이 영은 아들에게 충만하게 임했으며 우리로 하여금 아들을 통해서 아버지를 인식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의 의미입니다. 모든 사물을 넘어서서 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인 예수님에게서만 인식합니다.
삼위일체 교리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하나님과 절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아들에게서 모든 인간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는 참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즉 최초 기독교인의 이런 신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와 회당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인과 유대인 사이에 그 어떤 적대감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 적대감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최근 상황은 무엇보다도 우리 기독교인의 책임이 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도 바울과 더불어서 기다리는 바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서 아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유대의 신앙고백이 한 하나님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결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비교 불가능한 방식으로 실현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부르심이 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이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신 6:4,5).
우리가 이런 부르심을 들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요구가 아무리 급박하고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이런 한 하나님보다 뒷전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의 만물보다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의 생명에 대해서 감사 드려야 할 궁극적인 분이십니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결합은 세상의 모든 허무를 극복하게 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고 있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도 그렇고, 그 어떤 피조물도, 나아가 죽음도 우리를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첫 번째의 자리에, 지고의 자리에 놓인다면 우리의 삶은 세상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런 변화를 따라다니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등질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우리가 살아갈 삶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과 더불어서, 그리고 우리의 몸과 더불어서 지나갑니다. 하나님만이 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세상과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새롭게 됨으로써 다시 세상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매사에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말입니다. 이 사랑이야말로 창조자가 자신의 창조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허무 가운데서도,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리 삶의 조건과 다른 이와의 관계 가운데서도 단일성을 획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 평화로부터 오는 생명의 단일성이 자라납니다.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금세기 위대한 사상가였던 프란쯔 로젠쯔바이크(Franz Rosenzweig)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은 한 하나님을 고백하는 능력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단일성 모색한다고 말입니다. 유대 민족은 이런 신앙을 통해서 자신들의 단일성만을 확증하는 게 아닙니다. 로젠쯔바이크에 따르면 유대인의 신앙은 이런 민족의 단일성을 뛰어넘어 인류와 세계의 단일성을 현실화하려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바로 이런 점에서 화해를 언급해야 합니다. 단일성은 인간 사이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서 거듭해서 일어나는 틈과 대립을 제거합니다. 하나님의 단일성은 이 세상에서 피안적인 차원에서만 리얼리티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상에서 아들을 통해서, 그리고 역사 안에서 활동하는 화해의 영을 통해서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이 역사는 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워진 인류가 앞으로 나누게 될 친교를 목표로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일성과 화해의 영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만물보다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이성보다 높은 데 계신 하나님의 평화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1987.11.8,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 예배)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