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 하나님 신앙
롬 11:32-36

오순절은 성령 강림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아버지의 계시가 아들을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오순절이 지난 다음 주일인 오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이 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라는 세 위격으로 계신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아들 없이, 그리고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게 하는 영 없이는 결코 아버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들과 하나 되게 하는 영의 영원성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교부 아다나시우는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아들 없이는 존재한 적이 없다.” 따라서 아들은 아버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아들은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신성은 아들의 신성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은 아버지와 아들과 불가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영을 통해서 하늘의 아버지와 하나 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하나 됨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결코 해체될 수 없는 방식으로 한 하나님이십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우선 아버지만 하나님이었다가 그 다음에 아들과 영이 그에 의해서 야기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아버지가 아들과 영을 창조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 없이 결코 아버지가 아닙니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 아버지라고 한다면 이미 아버지이자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미 양자는 영의 일치를 통해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세계가 창조될 때 이미 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말씀으로 창조 사건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영의 호흡으로 그 피조물들에게 생기(生氣)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이셨다(요 1:1). 이와 비슷하게 히브리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언급합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아들을 통해서 그 현존이 유지되게 하셨다(히 1:2 이하). 이는 곧 아들이 이미 아버지와 함께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행위에 참여하셨다고 말입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들과 영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영의 본질적인 일치는 신약성서의 증언에 포함되어 있으며 예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교리를 통해서 언급된 것처럼 명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약성서에는 아들이 아버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언급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아들과의 일치에서만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들이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하나라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아들이 아버지와 영과 더불어서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은 성서적 진술에서 볼 때 실체적 내용을 담보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영의 삼위일체는 무엇보다도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세례가 베풀어질 때 사용되고 있는 세례 예식문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세례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입니다. 이 삼위성은 마태복음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전승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라.”(마 28:19). 이 구절에 하나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아들, 성령에게 붙은 공동의 이름입니다. 이런 표현보다 더 정확하게 언급될 수는 없습니다. 셋을 연결하는 하나의 이름, 즉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전제되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수많은 논의를 거친 다음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형성할 수 있기까지 3세기가 흘렀습니다.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은 다함께 한 하나님입니다.
신약성서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는 단지 암시적으로만 언급될 뿐입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평화의 인사(계 1:4) 말고도 오늘 우리가 설교의 본문으로 선택한 바울의 편지도 역시 이런 자료에 속합니다. 사도가 이스라엘 민족과 여러 민족의 역사에서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다룬 로마서 9-11장 마지막 부분에 오늘 본문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혹 자기 백성을 무감각하게 만드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은 다른 민족들에게 유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사로잡힌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들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32절). 구원 역사의 은폐된 의미에 대한 이런 요약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방식을 크게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찬양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에게 드립니다. 아멘.”(36절).
이 말씀이 바로 우리의 설교 본문입니다. 이 본문은 유대교의 유일신론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양식(樣式)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경우에 이런 양식은 하나님의 구원사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서,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라는 삼중적 표현방식이 삼위일체론의 구도에서 해석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초기 기독교가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사도의 말씀은 아버지, 아들, 영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 바로 그분은 아버지이며 세계의 창조자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만물이 그분을 통해서 존재할 수 있는 바로 그분은 기독교적 복음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창조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또한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에게 순종하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을 위하여 있는 그분은 또 다시 아버지이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이 창조자를 지향하도록 이끌어내는 이 힘은 곧 성령입니다.
이것은 곧 이 세계와 인류의 역사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입니다. 이 활동은 사도가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그분을 통해서, 그분을 위해서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은 이슬람교도들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의 피안에서만이 아니라 창조물을 고유한 생명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활동하시고 이 세상 안에 현재 하십니다. 이분은 “개입하는 것” 뿐이라는 괴테의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괴테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단지 개입할 뿐인 하나님은, 즉 모든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순환하게 만드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이 하나님은 이 세상을 내면적으로 움직여나가고, 자연을 지키고, 자연 안에서 자리를 잡음으로써, 그분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는 것들이 자신들의 힘과 영을 결코 상실하지 않도록 하신다. 이런 일에 그에게 어울린다.” 괴테는 기독교 교리가 말하는 창조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라는 체제가 움직일 수 있도록 최초의 충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에 개입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다음에 이 우주 체제는 스스로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괴테가 살던 18세기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괴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이라고 경외한 하나님은 만물이 그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하는” 바로 그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도행전에 보도된 것처럼 바울이 아테네에 머물러 있을 때 설교한 내용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바울은 그 설교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살고 활동하며 존재합니다.”(행 17:28). 괴테의 자연 경외도 역시 스피노자처럼 하나님을 자연 안에서 발견하든지, 아니면 이 세계 밖에서 작동하는 첫 동인자로 간주하는 방식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삼위일체 하나님은 양자를 모두 포괄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뛰어넘는 만물의 근원이기도 하며, 또한 이 세상 안에서 현재 활동하는 분으로서 만물이 그를 통해서, 또한 그를 향해서 가는 분이기도 합니다. 범신론이 말하듯 하나님이 단지 자연일 뿐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현존 너머에 있는 것을 공연히 열망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반면에 영원한 하나님이 단지 피안적인 분이기만 하다면 그는 우리의 잠정적인 생명을 그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득 채워서 변화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에 피안적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당신에게 끌어들이기 위해서 우리 생명의 중심에서 현재 활동하십니다. 이런 사건은 우리를 일치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의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 일치는 예수님이 영원으로부터 아버지와 하나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야말로 고통과 죽음에서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아들이 될 수 있는 영을 받았는데, 이 영은 우리를 아버지에게로 불러주십니다. 사랑하는 아버지인, 그 아빠에게 말입니다(롬 8:15). 바울은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를 드리면 우리는 아들이 아버지와 영원히 하나가 되는 사건에 참여하게 됩니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면적인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따라서 그 어느 누구도 삼위일체론이 구체적인 기독교 신앙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추상적 개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수님의 기도(주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구체적인 성취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만 마음을 집중시키면 됩니다. 우리가 아들로서 충만한 믿음 안에서 아버지에게 마음을 돌리는 일은 영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적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내면적 생명으로 끌려들어 가는데, 이는 곧 아들이 아버지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인 그분을 통해서만 창조된 게 아니라 그를 통해서, 즉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하게 하시어 영원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통해서 아버지인 그분에게 오게 하시는 아들을 통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인 그분에게 영원한 영광이 있으시기를. 아멘.
(1998년 삼위일체주일, 뮌헨, 마태우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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