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리스도의 몸


형제 여러분, 이제는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에 대하여 말씀드리겠는데 여러분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러분이 이교도였을 때에는 헛된 우상에게 매여서 우상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일러 둡니다마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아라"하고 욕할 수 없고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하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이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자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 주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에게서 지혜의 말씀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지식의 말씀을 받았으며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믿음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성령에게서 병 고치는 능력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하는 직책을, 어떤 사람은 어느 것이 성령의 활동인지를 가려내는 힘을, 어떤 사람은 여러 가지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을, 어떤 사람은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힘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나누어주십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 몸은 한 지체로 된 것이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발이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또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해서 귀가 몸의 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만일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도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여러 지체를 우리의 몸에 두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12-18)
여러분은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으며 한 사람 한 사람은 그 지체가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 사람 메네니우스 아그립파는 한편의 우화를 썼는데, 이것으로 민중 폭동을 잠재웠다고 합니다. 그의 우화는 우리의 현대 사회에서 또 하나의 다른 새로운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지가 오직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나누이고 대립한다는 이 우화는 바로 현대 사회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게 아닐까요? 현대 사회에서는 노동분화가 계속됩니다. 한 종류의 노동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모든 사람들이 입는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거의 균일화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인간은 여전히 개별적인 특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공동이라는 것은 계속적으로 익명이 되어갑니다. 개체에게는 숨겨져 있습니다. 개체들이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는 전체와 어느 정도로 관계되는지, 즉 개체들의 구성력이 어떤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물질적으로 대단히 풍요롭고 안정적인 조건인데도 불구하고 불안과 현존의 공허감이 우리에게 찾아듭니다.
바울이 그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인 오늘 성서 본문의 이야기는 아그립파의 우화에 비견될 수 있는데, 이 이야기는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우리의 문제에 훨씬 사실적으로 접근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에는 아그립파의 우화가 겨냥하고 있는 폭동이 핵심이 아니라 각기 개체들의 고립화가 핵심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이 개체들은 자기 혼자 스스로 전체가 되려고 합니다. 특히 우리의 세상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런 고립화는 경우에 따라서 피해볼 수도 있는,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작용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개체 인간을 뛰어넘어 모든 인간에게 다가오는 어떤 운명처럼 보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 입장에서 "유기적인" 일치를 갈망한다는 그런 상(像)때문입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 사이의 일치는 계속적으로 요구되지만 항상 그대로입니다. 이런 유기적인 일치를 향한 갈망은 무언가 낭만적이기도 하고 비애적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갈망은 근본적으로 산업사회와 모순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의 위험은 이것이 우리의 산업-기술 사회의 생명 현실성을 악마화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더구나 이 갈망 가운데서 사람들은 인간이 만족스럽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정치-사회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져야할 연대에 대해 언급하는 게 분명히 아닙니다. 바울은 몸과 그 지체에 대한 그림을 통해서 교회를 정치-사회적인 세상과는 다른 공동체로 생각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함께 관련을 맺고 있던 이들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흥미가 없던 종교 집단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종교적으로 열광적이었던 이런 집단들과의 평화와 일치가 중요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에 특별히 종교적으로 강화된 상황에 직면해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물론 당시의 고린도 교회와 우리의 상황 사이에는 명백한 괴리가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모임은 방언, 예언, 능력 행함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교회에는 특별한 종교적 은사를 배양하기 위한 일치가 더 이상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의 일상적 삶을 위한, 또한 세상에서의 활동을 위한 능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일상적 삶을 이끌어주시고 우리의 삶에 선물을 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기 위해 예배에 참석합니다. 교회의 기능이 이렇게 변화됨으로써 파생된 곤란한 문제는 실제적으로 교회를 중심으로 한 일치가 우리에게서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마 어떤 이들은 이 말을 틀렸다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무종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들 합니다. 종교는 이 세상의 과업에서는 벗어나서, 스스로 순환하는 어떤 고립된 일이기 때문에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 별로 의미가 없다는 점에서는 옳은 말입니다. 사실 종교적 요구를 배양하기 위한 일치는 지나치게 많습니다. 만약 기독교 공동체가 이런 것이라면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격이 될 것입니다. 기독교 모임과 예배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되어 왔고, 그리고 오늘도 그런 생각들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근원적으로 이런 것과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스스로를 중심으로 순환하는 조직으로 자처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그리고 세상의 단일성에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세상 가운데서 인간의 일치와 평화와 친교에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친교를 이룹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은 교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도 역시 종교적으로 유별났던 고린도 교회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각성시키고 비판적인 말을 적지 않게 했습니다. 바울은 나중에 골로새서에서 교회에 둘러쳐진 장벽을 그리스도의 몸이 지닐  수밖에 없는 한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전체 코스모스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했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의 사명을 세상의 평화와 구원, 분리된 이들과의 일치, 모든 갈라진 것의 구원에 두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일에서는 벗어난 한정된 일치에만 둔다면 그 사명은 빗나가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이 사명을 바로 현재의 세상에서 이루어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현재적으로 나타난 모든 일시적인 것을 뛰어넘어 인간 세상의 운명이 어떻게 될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은 현재 번성하고 있는 이 재물과 부의 제한적인 의미를 말짱한 정신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은 결코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생명에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재물은 분명히 인간을 여러 가지 살아갈 염려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유는 새로운 염려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핵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특별한 직업을 통해서 이루어 가는 활동도 역시 자신의 생명에 완전한 의미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는 일에 부분적으로는 협동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에는 총총걸음으로 수레바퀴를 돌리다가 삶을 소진시켜 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은 현대사회가 스스로는 생산해내지 못하는 그 무엇을 세상에 선물로 줍니다. 이것은 곧 세상을 넘어서는, 그러나 세상과 화해하려는 우리 현존의 의미를 생각하는 일입니다. 파손되어 가는 오늘의 삶을 치료하기 위해 이런 생각으로부터 어떤 능력이 이 세상을 비추게됩니다. 이렇듯 기독교 공동체의 특수한 현존은 의미심장합니다. 즉 평화의 묘목으로서, 다양성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일치정신의 묘목으로서 말입니다.

이런 과업은 우선 대학에 몸을 담고 있는 우리에게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여러 상이한 전공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결국은 하나의 동일한 진리를 찾기 위해 진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학문적인 연구는 그것이 모든 특수한 개체들을 포괄하는 하나의 진리와 관계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헛수고입니다. 진리의 단일성이 없는 한 학문은 그저 기술적인 쓸모에서만 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이런 단일성에서만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적 열정이 생성됩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진리가 특별한 통찰과 방식들을 밖에서부터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오히려 특수하게 구별된 연구방향에서 하나의 진리를 향한 행진이 그 흔적을 남겨야만 합니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진리의 단일성을 향한 이 행진에 별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들이 가장 특수한 것에만 집중하면서 그것을 참된 학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 스스로 오늘날 진리의 단일성에 대한 의식을 지켜내는 과업에서 종종 용기를 잃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런 과업은 아마 특별한 방식으로 신학에게 위임된 것 같습니다. 다른 학문과 협동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만 신학은 정말 대학사회에 공헌할 수 있습니다.
이 사회 안에서 대학의 위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때도 결국은 상이성 가운데서 이루어야할 일치입니다. 오늘날 여기서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우리 사회 안에서 정신적 가치와 교육의 중요성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통스런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노동시간의 단축이 개개인들에게 예술적으로, 문화적으로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줄수록, 동시에 현존의 참된 실현에 대한 요청이 증가할수록 이런 중요성들이 더욱 더 늘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런 증가되는 요구들이 보상만족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어야만 할까요? 흡사 티비, 라디오, 영화, 신문, 잡지 등을 통해서 "즐거움"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루한 오락이나 즐기면서, 또한 심연의 의미에 대해 전혀 무감각한 채 말입니다. 교육과 정신적 가치는 모든 곳에서 큰 소리로 찬양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다른 어떤 곳보다 우리의 교육 여건이 훨씬 낙후되어 있습니다. 서로 다른 학년의 학생들이 뒤섞여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한 학급, 혹은 두 학급으로 이루어진 초등학교가 여전히 존재하고있다는 이 부끄러운 사실에서 이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마땅히 참된 초등교육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환상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즉 우리는 무엇을 위해 교육을 받아야하는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독교 전승은 어떻게 공헌하고 있습니까?

오직 상호적인 관계에서만, 오직 계속적인 관계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이 사회 구성원들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이런 질문의 언저리를 뛰어넘어서야 합니다. 이런 문제는 이 시대의 거대한 정치적 질문까지를 포함합니다. 난관이 닥치기만 하면 항상 민족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돌아갈 준비가 된 소심증과 달리 유럽의 통일이라는 과업이 가시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계속적으로 무언가 지침을 받고 있는 사회 구성원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언급하려면 동구권과의 화해라는 과업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에게 몹시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결코 비굴한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새로운 공동체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는 변화를 향해 진일보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그리스도에게 토대를 둔 단일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관계가 없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세상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한 분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는 은폐의 방식으로 이미 세상의 주(主)가 아닙니까? 모든 갈라진 것들의 통일과 화해와 평화는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세상 안으로 돌진해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까? 교회의 현존은 오직 세상을 향한 그 사명에서만 의미가 충만해지고 그 내용이 풍부해집니다.
예수님에게서 발생하는 일치의 능력은 특별히 기독교인들에게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그 능력을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면 일치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어떻게 세상에 확산시켜나갈 수 있습니까? 지난 날 세상과 교회 사이에 놓인 이런 틈이 숙명적으로 불가항력적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오늘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틈이 남김 없이 폐기처분되어야 할 그 때가 와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담긴 단일성은 논쟁적이며 신학적인 형식보다 훨씬 거대한 것에서 증명되어야 합니다. 각기 다른 전승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 단일성에 대한 확고한 의식과 의지를 표명함으로서 서로 다른 관심과 확신 가운데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단일성이 가능한지 일종의 전형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마인쯔 대학교의 로마 가톨릭 교회사가인 요제프 로르쯔는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동의식의 위기를 지적했습니다. 즉 위대한 교황인 요한23세를 통해서,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를 통해서 기독교 안에서 일기 시작한 기독교의 공동의식이 마비될 위험에 처했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일치의식과 운동은 더 이상 마비되면 안됩니다. 우리는 상이성 가운데서 이미 획득한 단일성을 줄기차게 인식해나가야만 합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기구변화가 너무 지지부진하기 때문에 이런 일치운동이 과연 달성될 수 있는가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런 회의적 시각이 이 변화의 가속화를 방해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요한 23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갑자기 등장한 전체 기독교의 의식이 가톨릭의 자기 이해를 새롭게 하는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누가 가늠할 수 있을까요? 교황 바오로는 기독교의 분리가 로마 가톨릭에게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이 고백 앞에서 개신 교회는 대답을 회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대답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사죄를 고백했으니까 우리 개신 교회도 어쩔 수 없이 대답해야한다는 자기 정당성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이 분리의 책임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요? 우리는 아마 근원적인 차원에서 이런 책임 의식을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물론 루터 자신이 스스로 로마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게 아니라 로마 교회가 루터와 그의 복음선포를 쫓아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책임이 없는 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 수 백년 동안 계속해서 이런 분리의 길을 걸어왔다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모든 분리되는 상황이 잘 되고 있는 일처럼, 이것이 기독교 교회의 본질을 파손시키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한 육체가 잘게 나누이면 그 생명을 유지시켜나갈 수 없듯이 교회의 분리는 교회의 생명과 일치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교회가 여전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기적입니다. 종말에 가서야 분리된 교회들이 재결합될 수 있으리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내던지는 무책임한 말에 불과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오늘 바로 이 순간에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분리는 우리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지켜내지 못하게 합니다.

교회의 단일성은 물론 교회 조직과 직제를 통일시키는 과업에 달려있는 게 아닙니다. 단일성의 원천은 우리 모두를 꿰뚫고 들어오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 모든 각자를 자기 자신과 연결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한 성령 안에서 모두 한 몸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모두 한 영으로 물에 잠겼습니다."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기독교적인 것들과 그런 일들 위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숙고함으로써 기독교의 일치는 자라나야 하며, 또한 기독교인을 통해서 세상으로 반사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일치와 단일성은 원래 믿는 자들 사이에 숨겨진 연대로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교회나 전체교회 안에서, 그리고 대학교의 모든 일에서, 기독교인들에 의해 공동으로 조성되는 사회의 각 영역에서, 그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에서도 역시 표명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서 우리와 연합하신 그 한 주님이 역시 세상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주님의 미래를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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