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하나님의 영광과 계시


우리는 이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일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자기 얼굴에서 광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는 같은 일은 하지 않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려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소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려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갈 때에 비로소 벗겨집니다. 주님은 곧 성령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 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고린도후서 3:12-18)

이번 주일로 현현절이 끝납니다. 이런 현현절에 기독교 교회는 고대로부터 "에피파니"(현현)를 가리키는 나타남에 대해서, 즉 예수님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생각해왔습니다.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예수님의 삶에 개입해있는 특별한 사건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 대한 마태복음의 보도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변용과 그것에 대한 찬양은 똑같이 바로 이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단지 이 사건에만 제한될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 현현을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에게 발생한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서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계시되어 있다는 바울의 언급은 바로 이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변용 사건도 역시 부활한 자의 영광이 나타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부활로부터 시작한 이 불빛은 예수님이 가셨던 모든 길을 비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은 완전히 포괄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언급할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외아들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요1:14).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님 안에 나타났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 예수님 안에 나타났다는 말과 다른 게 아닙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현현절은 성탄절 주제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오직 단 한번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과만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전체 역사를 휩싸고 있습니다. 수난절과 부활절은 이런 주제 아래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를 위해 나타났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이 문제를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밝혀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는 바울의 시대와 적지 않게 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은 바울과 달리 우리 자신의 상황이 이스라엘과 대립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어쨌든지 바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언급한 것에서도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질 만한 하나의 명백한 사실을 밝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분의 영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숨겨져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무상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그들의 고집입니다. 율법에 충성함으로써 그것을 무언가 무상하지 않은 것처럼 다루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자신들의 종파적 전통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합니다. 루터 교회와 개혁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 말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경건하게 수행해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가렸다는 사실을 구약성서의 오래된 암시로부터 추정해냅니다.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출애굽기 34장29절 이하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온 모세는 자기 얼굴을 수건으로 덮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가 하나님을 만난 뒤로 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견뎌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반사된 하나님의 영광의 불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율법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깨닫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율법을 무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을 것이며, 뿐만 아니라 그렇게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무상한 율법을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졌다는 바울의 비판은 그 본문을 주석한 현대 성서학의 도움을 통해서 훨씬 명백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가 자기 얼굴을 가린 "수건"을 종교의식 때 사용하는 일종의 가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종교의식 때 하나님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하나님 역할을 연출하기 위해 사용한 가면과 비슷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가면의 의미는 모세에 의해 선포된 율법이 신적(神的)인 공인을 얻는다는 것일지 모릅니다. 모세는 이 가면을 쓰고 흡사 자신의 말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선포했을 것입니다. 무상한 질서에 신적인 권위를 빌려주어야만 했던, 그래서 그 질서가 절대적인 것으로 유지될 수 있게 한 하나님의 가면! 여기서 무상한 질서를 종교적으로 절대화시키는 그 대상은 예수님의 부활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무상하지 않은 영광과 날카롭게 대립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을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데, 바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이 보편적으로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삶이 지향하고 있는 그 질서의 무상함을 숨겨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를 들자면, 그 마력적인 능력을 이미 상당히 잃어버리기는 했습니다만 국가라는 게 바로 그 경우일 것입니다. 한 때 독일인, 프랑스인, 영국인들이 국가가 영원하다고 믿었다는 것은,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국가에 속한 개인들이 수 없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는 아주 믿기 어려운 현상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게 사실이었습니다. 주로 우리 남성들이 그렇게 열심히 성취해보려고 애를 쓰는 일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우리 주변의 익숙한 작업 현장에는 이런 착각이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우리가 영원한 것을 건설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말입니다. 저의 개인적인 생활 영역에서 한 예를 든다면 아마 저술 활동이 이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런데 가정 주부들의 활동에서는 자녀들과의 관계만 제외하면 이런 착각이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상한 것들을 흡사 영원히 존속할 것처럼 여기는 사고방식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늘 그렇고 그렇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즉 일상적인 것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태도에서 드러납니다. 우리는 대개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 건강이 늘 지속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미래를 그냥 묻어두고 살아가는 것이 과연 우리의 자비로운 운명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인간의 고집입니다. 우리는 무상한 것 가운데서 그저 그것이 늘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이 무상한 것이 나름대로 자신의 품위와 자신의 영광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직업 세계나 가족이나 시민 세계에서도 유효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열정에 사로잡히게 한 율법의 세계에서 아주 확실했습니다. 그러나 무상한 것들은 절대적인 영광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영광은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처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율법을 부여받았는데, 이것은 하나님에게로 선회할 수 있는 큰 가능성입니다. 이 가능성은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늘 선명하게 놓여 있었습니다. 이 가능성은 또한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종파적 전통이라는 우상 숭배로부터 돌아설 때 확실하게 주어집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종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질서를 철저하게 수행해나감으로써 그것이 곧 무상하지 않은 하나님과 관계된다고 여겨질 때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에게 충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는 늘 은사를 그 은사의 제공자와 바꿔치기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교회 질서, 예배 형식, 경건과 교의, 그리고 성서 문자를 고수하면서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믿는 경우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무상합니다. 이런 것들이 나름대로 자신의 영광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반사해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무상한 것들이 더 이상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그리스도는 무상한 것을 노예처럼 섬기지 않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에게 계시됨으로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 생명은 오늘 우리에게도 역시 계시되어야만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거울의 반사라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영원한 생명의 부활을 모세가 여호와의 영광을 반사해낸 것처럼 반사시켜야 합니다. 이 영광이 없는 한 우리는 무상한 것들에 의해 뒤덮여버리고 말 테니까요. 부활한 분에게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빛이 흘러나옵니다. 이 빛은 우리가 각성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비쳐줍니다. 바울은 창조 첫날 선포된 "빛이 생겨라"는 말씀과 비교함으로써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고후4:6). 이 빛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의 영원한 영광에서 비추어 나옵니다. 모세가 마주 대한 구약성서의 주님,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주님은 이제 바울에게서 서로 맞물려 연결됩니다. 이 주님이신 하나님 자신은 영입니다. 부활한 분에게서 비추이는, 그리고 우리를 모든 무상한 것에서 성탄절과 부활절의 기쁨으로 해방시켜주는 빛입니다. 성령은 단순히 그 출처가 모호한(obskure),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부활한 분에게서 비추이는, 그리고 우리에게 반사되는 영원한 생명의 영입니다. 바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사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고후3:18). 이것은 원래 바울이 종종 언급했던 생각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49절에서도 이르기를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된 새로운 인간의 형상을 입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인간은 살리는 영입니다. 우리는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빌립보서는 우리가 변화되어야할 영광의 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빌3:21).
이러한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일종의 피안의 세계를 위한 위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의 계시는 지금 여기서 이미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상한 것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허락하는 자유를 얻음으로써 발생합니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점은 우리 자신의 무상한 현존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이런 자유를 획득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사되어 비추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와 우리 모든 이들에게 의미하는 바는 자기 현존의 중요성을 자기 자신의 염려에서만, 그리고 잘 먹고 잘 사는 데서만 찾으려는 이들이 떨어지기 쉬운 무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우리 모두가 견고한 사회적 기득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또한 이와 더불어 현재 가능한 인간의 새로운 영광을 자유롭게 현실화 시켜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새로운 영광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무상한 것을 섬기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는 모든 정신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기도 합니다. 국가와 그 통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의 자유, 권위적 전통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인간이 영원한 생명의 형상으로 변화하기 위한 자유입니다. 또한 그것은 무오적으로 선포되는 설교와 교육, 경직된 교의학과 성서문자주의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에 드러나며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기 위한 자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세상에 반사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고난과 십자가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이 고난과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임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받아들인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그 이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에 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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