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새로운 인간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우리가 전파하고 있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하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는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짓 증인이 되는 셈입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만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장 가련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죽었다가 부활한 첫 사람이 되셨습니다. 죽음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온 것처럼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모두 죽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2-22)


사랑하는 부활절 공동체 여러분,
오늘 이곳에 모인 여러분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교회로 오는 도중에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부활절이 지나면 이제 계절이 완전히 달라지겠지 하고 말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부활절 산책길에 나섰다가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은 겨울이라는 자연의 겨울잠에서 그들 자신이 깨어났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부활신앙을 그저 봄바람이 예수님에게 분 것쯤으로 생각하는 이런 오해가 올해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금년에 우리는 눈과 얼음 속에서, 여전히 고난과 불의와 전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주님의 부활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봄을 보증하며, 죄와 죽음을 극복한 새로운 생명을, 그래서 마땅히 우리 모두에게 계시되어야 할 새로운 생명을 보증합니다. 이것은 곧 새로운 인간성의 탄생입니다.
정말 인간다운 새로운 인간, 이것은 영국과 아메리카와 프랑스에서 일어난 대혁명 이래로 근대사의 모든 노력이 경주해온 목표였습니다. 또한 이것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소요에서도 들끓고 있는 갈망입니다. 자유주의적 휴매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시스트들도 이런 목표를 당성하기 위한 여러 방식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인간은 모든 억압적인 구조로부터, 정치와 경제의 억압으로부터, 또한 욕망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야합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 경제의 관리 형태들을 해체시킴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각각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달성할 수 있다고 희망하기도 합니다.
거의 모든 이런 노력들은 이 목표가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상황을 바꾸고 사회제도를 개혁하면 인간의 참된 본성이 자유롭게 확장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그런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삶에서 정작 중요한 게 무엇인지 그렇게도 종종 도처에서 잘못 판단되고 잘못 처리된다는 사실은 그저 상황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 자신의 문제입니다. 즉 우리 인간의 죄입니다. 죄를 뜻하는 "하마르티아"는 목표가 잘못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신학적으로 말해서 인간에 대한 바른 규정,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규정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상황의 탓으로만 돌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구조의 변화가 항상 필요하지만 그런 변화를 통해서 새로운 인간성이 성취되리라는 기적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이 변화는 삶의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는 아주 미미하게 일어날 뿐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자칫 오용될 소지가 있으며, 그런 전례도 많습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한다는 기독교의 요청은 곧 인간을 억압하는 통치가 필요하다는 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통치가 강조되면 인간의 공생적 관계에 속한 모든 것이 오도되어 과거 지향적인 방향으로 흘러가 버립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기독교인은 기독교의 확신이 이렇게 오용되는 일에 종종 한몫 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이 살아가는 상황의 변화가, 그리고 사회제도의 변화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진리입니다.

인간 자신이 변해야만 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옛 사람과 맞서있는 새로운 참 인간으로 제시했다는 것은 이 변화가 얼마나 심원하게 실행되어야하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모두는 옛 사람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이 옛 사람의 특징을 가리켜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오늘의 본문말씀과 관련된 다른 대목에서도 죄를 옛 사람의 특징으로 언급했으며, 죄와 죽음이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잘못 규정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은 이로 인해서 자기 생명의 근원으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며, 또한 이 생명의 원천에서 떨어져나가는 것만이 죽음의 사실을 확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새로운 참 인간이 되었습니다. 실제적인 인간의 실존에는 죽음의 능력이 끊임없이, 남김없이 지배합니다. 이 죽음의 능력은 과연 무엇일까요? 아직은 완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삶 위에서 군림하는 죽음의 능력은 죽음에 대한 생각조차 아무 의미가 없게 되어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획득하게되는 날이 오면 확실하게 밝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당장 죽음의 능력에 대해 모른 체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능력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우리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삶이 노동과 오락 사이를 번갈아 오가는 일로 마비되어갑니다. 비록 우리가 아직은 억압과 절망의 지하생활을 끝장내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마비시켜버리는 다른 수단으로 도피하지 않았다고 해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하생활은 그것을 추종하는 이들과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구원과 자기 성취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눈속임하는 이데올로기로 하여금 절망적인 폭력을 휘두를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제공해줍니다.
우리의 삶에 드리워 있는 죽음의 이 그림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극복되었습니다. 예수님에게 무상하지 않은 생명이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그는 새롭고 참된 인간입니다. 이 기독교의 사신은 멋진 피안만을 희망하게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이 사신은 세상을 도피하라는 호소가 아니라 생명을 향하라는 불빛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축출합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무의미하게되면서 일상을 기쁨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을 통해 죽음을 극복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는 토대가 놓이게됩니다. 결국 바울이 말한 것처럼 이 토대는 우리가 이미 지금 "새로운 삶으로 변화해가도록" 합니다. 부활절 사신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전혀 상관없다는 것을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서조차 무의미해지는 우리의 지상적 삶이 영원히 중요하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그리고 예수님에게서 이미 나타난 새로운 생명은 우리가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생명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생명은 영원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일어나야 할 우리 생명의 변화입니다. 우리의 생명에 주어진 것과 그 생명활동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불빛에서 완전한 무게와 영원한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거점이었으며 원천이었습니다. 부활절은 고대교회가 교회력으로 지킨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했습니다. 이와 비교해볼 때 오늘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체 틀에서 부활절 사신이 차지하는 근본 의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입니다. 수년 전 주간 시사지 "슈피겔"이 독일인의 종교의식을 조사하기 위해서 "독일에서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기독교 신앙의 중심 내용을 무엇으로 생각하는가 라는 설문을 돌렸을 때 예수님의 부활은 그렇게 중요한 항목으로 거론되지 않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현상은 우연한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많은 신학자들도 역시 지난 여러 세대에 걸쳐서 매우 의도적으로 이 부활절 사신을 예수님의 인간성에 나타난 지상적 현상, 즉 전(前)부활절적인 현상의 배경으로 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죽은 자로부터 부활했다는 기독교 사신에 연결되어있는 세계관적 난점들을 해결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더구나 현대적으로 교육받은 지성인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활절 사신의 근본적 의미가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오늘날 더 이상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지난번에 개최된 개신교 선교대회에서 많은 그룹들은 사회적으로 현안이 되는 주제에 열을 내어 그 논의에 참가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논의는 이미 유행이 훨씬 지난 일종의 땋은 머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사건은 단순히 골동품처럼 다루어도 괜찮은 교회의 교리문제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당신들의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것이오. 바울은 이렇게 계속합니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당신들의 죄 안에서 사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사죄나 세상의 용서도 부활 사신의 진리성에 달려있습니다. 부활절 사건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기 생명이 좌초된 것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모든 지상적 삶이 쓸 데 없다는 절망 속에서 끝나버린 해프닝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이 죽음의 그림자는 모든 사람들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도 역시 죽음이 모든 것의 종착역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활 사신의 빛에 이르러서야 성금요일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계 구원에 대한 담보가 되었으며, 모든 고난과 버림받음을 극복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빛에서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었으며, 우리가 그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를 극복했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향한 기독교인의 신앙은 이 부활 사신의 원천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기독교인의 하나님은 현재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에 상관하지 않는, 그래서 그를 통해서는 현재와 미래에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 그저 멀리 떨어져서 관망하는 세계의 근원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그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능력입니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인들이 믿어온 그 하나님의 능력과 현실성은 별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을 용서하는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한 개인적인 대파국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못했다면 다른 그 어떤 사람들보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더욱 가련한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생각한 듯 합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적인 사유에서 말하는 이 현실은 환상에 근거합니다. 기독교와 교회는 늘 그런 거대한 환상을 근거로 살아왔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환상을 좇음으로써 현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이 유일하게 붙들고 있는 그것을 빗나가게 하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이오." 이것은 오늘날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절망적이고 슬픈 삶의 지혜입니다. 사실 먹고 마시는 일은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행해야할 그 어떤 다른 일들보다 훨씬 의미심장한 일이 못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불가피한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이런 슬픈 삶의 지혜에 머물러 있기만 할 뿐이지 이런 죽음의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환상에 집중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아마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환상을 근거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무미건조한 삶에 빠져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자체 안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독교 사신을 의심스러워합니다. 바울 시대의 사람들과 똑같이 죽은 자는 결코 다시 살아나지 못하는 법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들은 이런 부활신앙이 자신들의 모든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모순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려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기적을 값싸게 믿어버리는 신앙으로 웃음거리의 대상이 됩니다. 신학자들도 죽은 예수님에게 기적이 일어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예수님의 일을 세상에서 지속시켜나가려는 신앙심이 발생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주장들은 현대 세계 안에서 기독교 사신이 부담하고 있는 난점들을 피해보기 위해 둘러대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바울은 만약 예수님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신앙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주 명명백백하게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한 가지 점에서만은 그 당시 사람들의 이론(異論)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것은 곧 기독교의 부활사신에 대한 현대의 비판에서도 제기되고 있는 점인데,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게 사실로 드러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게 끝장이라는 사실이 증명될 수만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에도 결코 예외 없이 적용될 것입니다. 비록 초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증하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 이외의 모든 곳에서는 거짓인 그 사실을 예수님의 경우에만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일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런 보편적 진리에서 고립된 기적이 결코 아닙니다. 부활에 관한 사신은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들에게 실질적인 것(Wirklichkeit)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손으로 생산해낼 수 있는 것들만 실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낯익은 것들만이 그럴까요? 이렇게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우리가 늘 의식하고 있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삶의 매 순간에 현재 임재 하는, 우리가 도저히 측량해낼 수 없는 심연이 일상적인 사건에 의해 조성된 낯익은 것들을 휩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대부분 저 높은 곳에서 주어지는 운명의 선물을 받을 때, 혹은 심각한 고난 앞에서, 또는 그 어떤 느낌을 통해서 이런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항상 반복되는 삶에서,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생산해내는 것들 가운데서 우리에게 실질적인 것들이 소진되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게 아니라면 이 삶의 현장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즉 우리에게서 멀어지거나 밀접해지는 그것의 비밀이 우리 삶의 어떤 순간에 갑자기 빛을 내다가 다시 신비의 세계로 사라져버리는 한 심연이 있는 겁니까? 또한 우리는 우리가 최후로 던져야할 궁극적인 질문을 통해서 비밀 가득한 이 현실성의 심연과 관계되는 건 아닐까요? "하나님"이란 단어는 죽음을 뛰어넘어 인간의 미래에 대한, 그리고 그것 없이는 우리의 현존이 무의미하게 될 미래에 대한 멈출 수 없는 질문과 마찬가지로 현실성의 비밀 가득한 심연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실질적입니까? 우리 눈에 낯익은 것들입니까? 비밀 가득한 심연입니까? 이것이 바로 부활절 이 아침에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의해서 확실해지는 사실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어떤 사람들의 솔직한 주장은 단지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주장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무맹랑한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습니다. 이런 주장은 우리의 일상적이고 일반적인 경험의 주변에서 사실상 이것과 똑같은 일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근거에서 제기됩니다. 이러한 일상적인 경험과 수천 번 반복된 익숙한 사건의 진행을 전체적인 현실성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은 자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명제를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상 경험과 사물의 낯익은 과정을 이렇게 일반화시키는 태도는 현실성의 신비로운 심연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정당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선입견이 학문적인 확실성의 대리자로 자임한다는 것은 허풍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역시 다시 살아나지 못했을 것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시사하는 바는 현실성 일반에 대한 생각이 부활 사신을 받아들이는가, 거절하는가의 문제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부활 사신이 현실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현실성에 대한 이해와 부활 사신의 이 양자 관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죽은 자가 결코 부활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 사신이 부분적으로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의심받았고 거부되었습니다. 이와 달리 이런 선입견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복된 소식을 어떤 경우에도 완전하게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이 제자들과 부활한 분과의 조우에 대해 보도한 모든 내용을 그 과정의 문자적인 기록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발생한 사건 중에서 핵심적인 것을 이야기 형태로 옷을 입혔습니다. 일종의 문학적인 서술이라 할 이 보도를 우리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들의 보도를 통해서 부활한 분의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표상되었는지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은 오해를 막아내야 합니다. 이런 보도를 자세하게 살펴볼수록 이런 표상에 대해서는 그 비밀을 헤아리기가 더욱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가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었다는 이 기본 사실만은 여전히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자로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만약 죽은 자가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이 생각을 아예 처음부터 언어도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부활 사신이 말하고 있는 근본과 대립되는, 그것을 파기시킬 수 있는 그 어떤 논증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자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부활절 새벽에 사실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한다는 것은 우리의 이해범주를 벗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불가사의한 사건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활절에 예수님에게 발생한 새로운 생명의 현실성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여전히 미래의 사건이지 지금 우리의 경험이 가능한 이 세계의 구성요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 사신이 보도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의 현재적 이해범주를 뛰어넘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지금 이미 이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관계됨으로써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반복해서 피력했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에 연결되어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서 발생했던 하나님의 영광과 그 생명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를 이 예배의 성만찬으로 부르시는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그의 약속에 의해서 예수님과의 일치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에게 나타난 새로운 생명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희망은 예수님과 일치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확신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과 분리되어버린 죽음의 공포와 생명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무의미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스러운 느낌을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것에 마취되어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인간과 우리 자신을 부활절 아침의 새로운 빛 가운데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여기서 사람들과 우리 자신과의 새로운 관계가 생깁니다. 우리는 결코 죽음을 최종적인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현안의 척도로만 사람이나 사물을 대하는 것은 곧 사랑 없이 대하는 게 됩니다. 사랑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의 관계에서 현안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부활절을 향해 열려진 하나님의 미래라는 빛에서 실질적인 것을 내다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에서는 현재 이 땅에서 계속 존재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최종적인 선언이 아니라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화해가 그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화해를 통해 변화됨으로써 우리에게는 지금 새로운 인간이 비추는 반사의 불빛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비추는 불빛이 빛납니다. 이것은 곧 자유입니다. 우리는 세계와 인간과 우리 자신을 하나님에게 속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걸 배움으로써 새롭고 참된 인간의 자유에 도달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무(無)에서 유(有)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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