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생명의 의미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한복음 1:1-5)
말씀이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이 자기 나라에 오셨지만 백성들은 그분을 맞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외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은 영광이었다. 그분에게는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 1:9-14)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서 넘치는 은총을 받고 또 받았다. (요한복음 1:16)

이제 시나브로 성탄절기가 끝나가고 있습니다. 성탄절 전야에 성탄등을 밝히는 일, 성탄절의 조용한 축제, 이런 저런 행사 준비에 애를 썼던 일들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모두 끝난 다음에는 무엇이 남아있습니까? 성탄의 분요함이 드디어 물러갔다는 사실에 대해서 금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요? 떠들썩한 송년 모임, 대목을 보느라 분주한 상점, 여러 종류의 센티멘탈리티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성탄절에 이러한 것들만 보는 사람들, 그리고 이런 것에만 마음을 두는 사람들의 영혼은 성탄절기의 끝 날이 되면 공허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성탄절을 그렇게 맞이하고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올바른 태도인지 아닌지는 주고받는 선물의 기쁨과 성탄절의 풍성함 가운데서도 그 안에 숨어있는 좀더 심원한 의미를 아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도 거의 똑같이 적용됩니다. 일상의 분망한 활동에서 겪게되는 답답함은 우리의 삶을 채워가고 그 내용을 제공하는 심원한 의미의 바깥 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트프리트 벤(Benn )이 현대적 삶의 배경이라고 본 이 심원한 의미는 이 바깥 면 뒤로 종종 숨어버립니다. 이것은 곧 공허감과 그런 특징으로 표현되는 자아입니다. 이런 것들은, 즉 생명의 의미만이 아니라 무의미와 고독은 축제의 절기로서는 한해의 정점이라 할 이 성탄절기에 가장 심층적인 차원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무의미와 고독에 대한 경험이 우리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모든 인간적인 삶에 영혼을 불어 넣어주는 이 심층의 의미를 신뢰할 수 없도록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성탄절이 끝나 가는 이 마당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게 무엇인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는 오늘 본문에서 요한이 노래하고 있는 그 말씀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고 노래합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셨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년 성탄절 때마다 축제를 여는 그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의미에, 그리고 우리 일상의 단조로운 반복에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우리의 삶에 내용을  채우는 의미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서의 첫 문장을 거의 습관적으로 이렇게 번역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 첫 문장에서 사용된 헬라어 단어 로고스(logos)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로고스는 단순히 언어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들을 통해서 말이 되기 위해 필요한 의미를 뜻합니다. 이 경우에 의미와 언어는 밀접한 상관 관계를 맺습니다. 우리가 그 어떤 현상에서 경험하는 이 의미는 항상 개체 사건을 뛰어넘으며, 또한 그렇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서 표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라든지 "즐거운 성탄절을!"이라고 인사를 했다고 합시다. 이때 이 사람은 단지 이 순간에만 이런 친절을 베풀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인사를 할 때는 이 순간을 뛰어넘어 무언인가를 표현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의미는 그 순간을, 그리고 그 의미가 우리와 마주치는 개체 사건을 뛰어넘어 버립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다는 성탄의 소리를 듣는다고 합시다. 우리는 말구유에 누워있는 이 아이를 모든 다른 아이들과 연관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자기 부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 태어난 아이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건의 의미는 그 구체적인 현상을 통해 우리의 삶에 개입하면서 그 현상을 뛰어넘습니다. 눈앞에 벌어진 일들만 보는 사람은 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성탄의 의미도, 생명의 의미도 파악하지 못합니다. 이 의미는 그 내용을 채우는 현실성의 심연입니다. 모든 현상의 의미가 눈앞의 사건을 뛰어넘기 때문에 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언어가 필요합니다.
"태초에 의미가 있었습니다"는 말은 곧 태초에 모든 생명의 내용과 의미가 채워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경우에 언급될 수 있는 현실성의 심연입니다.
모든 다른 현상들의 내용과 의미(Bedeutung)를 채워주는 이 궁극적인 의미(Sinn)는 성탄 사건으로 인해서 세상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과 연대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사건은 거룩한 한 아이가 탄생했다는 사실에서 끝나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 아이의 탄생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징표이자 예표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난 강림절 기간 동안 내내 하나님의 오심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강림(Advent)라는 말을 두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오셨다는 사실과, 또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오심을 맞으러 나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오심은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무의미와 고독을 종식시키고, 모든 고난과 모든 불의를 끝장낼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의 강림은 세상의 마지막 미래입니다. 그리고 이 미래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한번 현재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를 맞으러 나갈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미래로부터 현재를 향해서 나아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말할 때 우리는 단지 말구유에 오신 아이만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분과 부활한 분을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절 아침의 불빛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구유에 오신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오신 것이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비로소 죽음과 고난과 고독이 자취를 감추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그 어떤 궁핍이나 불행을 당하더라도 빼앗기지 않는 영원한 의미를 획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탄 사건을 통해서 세상과 관계를 맺은 신(神)적인 이 의미는 실제로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은 신적인 의미가 생명을 담지하고 있다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이제 의미가 실현된 생명이 생명이라는 말을 의미로 충만하게 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한복음 기자가 어떻게 생명과의 연관에서 빛에 대해 언급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의미 충만한 생명은 인간에게 빛입니다. 우리가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 곳에서는 우리와 관련된 것들이 밝히 드러납니다. 또한 생명의 내용을 채우며 그 생명을 의미 충만하게 만드는 한 의미가 우리  현존의 전체 도정에 그 의미의 빛을 비출 수 있습니다.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 있습니다. 성탄 사건으로 세상과 관련된 신적인 의미는 도대체 어디서 발생합니까? 요한복음의 찬양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렇게 구체적이며 명시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본, 그리고 "충만한 은혜와 진리"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언급함으로써 해석하고 있을 뿐입니다. 요한의 설명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이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시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리는 곧 이 하나님의 사랑과 연관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든 약속이 성취될 때까지 그의 선택된 백성의 역사를 통해서 충만한 사랑으로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연관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오신 신적인 생명의 의미에 담긴 영광이 은혜와 진리를 제공하는데, 이 은혜와 진리가 어디서 생성되는가에 대해서 요한은 다른 구절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해주셨다고 말입니다(요3:16). 또한 요한일서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이 자기 독생자를 보내어 우리로 하여금 그를 통해 살게 하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요일4:9).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만물의 의미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 자신과 하나인 각각의 의미,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인 울타리를 허물어내시고, 멸망당할 사람들과 하나가 되심으로써 표명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사죄를 선포하시고, 과거의 짐으로부터 새로운 삶으로 해방시키시는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과 연결된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죽음이 의미하는 최종적인 유기와 고독을 감당하시고 폐기시켜 버렸다는 사실에서 빛을 발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심으로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예수님이 탄생하던 순간에는 여전히 미래의 싹으로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탄생과 함께 하나님의 현재가 사람들에게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어디에서나 이미 이러한 의미를 가리키는, 또한 영원과 구원과 용서의 위로를 가리키는 인간 생명의 의미 충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오늘 우리의 본문이 언급하고 있듯이 은혜와 진리가 가득한 예수님의 영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곳에서 유래하는 생명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 말씀, 즉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다는 말씀(요2:3)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의미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다른 사람에게 현존을, 즉 자신의 고유한 현존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 지은 자를 향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죽음을 이기는 부활절 신앙의 가장 심원한 의미입니다. 죽음을 이긴다는 의미는 각 개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그리고 무상하지 않은 의미를 소유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생명과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소명 받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는 세상에 마주 선 하나님의 크심에 참여해야합니다. 이 하나님의 크심은 만물의 근원입니다. 사실상 자기 삶의 현존과 그 고유성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것의 본질은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통해서 증거됩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에게 나타난 신적인 생명의 의미가 모든 생명 일반의 빛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빛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이들을 비춥니다. 이 빛은 말 그대로 생명을, 즉 그것 없이는 어느 누구도 아주 어린아이일 때부터도 살아갈 수 없는 생명을 신뢰할 수 있게 합니다. 현대 심리학은 인간의 근원적 신뢰심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인격 형성보다 앞서 있으며, 인간의 전체 생명 역사의 토대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였을 때 이 근원 신뢰는 부모에게 집중됩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연결이 해체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근원 신뢰 자체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생명에 대한 이런 근원 신뢰에 근거해서 현존을 자신들에게 매우 호의적인 것으로 전제합니다. 삶이 위기에 빠지거나 가련한 처지에 빠지게 되면 인간의 이 근원 신뢰는 무언가 흔들리고 요동칩니다. 인간의 삶이 이러한 근원 신뢰를 최종적으로 완성시키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또한 삶이 인간에게 항상 호의적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 근원 신뢰는 파괴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역사에서 비로소 결정되었습니다. 그의 삶과 십자가와 부활에서 말입니다. 인간의 근원 신뢰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늘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 안에서 빛을 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 안에서 악과 고난과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인류에게 빛이라는 사실은 고대 기독교에서 그야말로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 지상 세계의 빛인 태양 빛이 예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대 기독교에서 부활의 날이 어쩌다가 우연하게 태양신의 날로 정해진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여전히 존탁(Sonntag)을 주일(主日)로 지킵니다. 예수님은 요한 공동체의 찬양에서 참된 빛으로 불려진 것처럼 고대 기독교인들에게 참된 태양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오늘도 많은 찬송가는 그렇게 노래합니다. 존탁(태양의 날)에 일어난 부활을 통해서 고대 기독교가 손에 잡을 듯이 확신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을 축복해주는 능력인, 그리고 날과 해(年)의 변화를 규정하는 능력인 실제의 태양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계시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유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창조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서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인은 예수님의 탄생을 동지 직후에, 즉 태양의 새로운 탄생 시기에 축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은 전 인류를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정말 우주적인 차원에서 영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매년마다 태양을 세상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절기 동안 우리 앞에 놓인 초와 그 광채가 무언가 이런 것들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누가 과연 인식하고 있을까요? 초와 그 광채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은 예수님 안에서 비추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이 빛에 의존해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영을 거절합니다. 다른 이에게 현존을 내어주며, 인간 사이의 철책을 허물어내고, 인간의 과오를 눈감아주는 사랑의 영을 거절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살아가고, 그 사랑이 우리 현존에 의미와 내용을 채워주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과의 관계에서 여전히 그 사랑을 밀쳐내 버림으로써, 즉 신적인 사랑의 우주적 운동에 깊이 침잠하지 못함으로써 세상의 어둠이 짙어갑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의 어둠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인해 그들의 주변으로부터 받은 편견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임하게된 박해와 죽음 같은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는 기독교의 첫 순교자인 스데반을 특별하게 추모합니다. 스데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약속된 메시야로 고백했기 때문에 유대인 동료들로부터 신성모독자로 몰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빛은 세상의 어둠이 살해한 사람의 눈을 밝혀줄 수 있습니다.
우리 현대 기독교인들도 대개는 이런 운명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의 시초와 끝자락에 버티고 있는 괴물을 우리 일상의 작은 궁핍이나 고통과 비교함으로써 그런 것과 비슷한 것쯤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날 빛을 거스르는 가장 극단적인 어둠의 적개심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도록 도와주시는 것에 대해 감사해야만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적인 빛이 우리의 삶에서 찬란하게 빛나는지, 아니면 오히려 어두워지는지 경계해야만 합니다. 믿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의 진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누구나 만물의 존립기반인 그 의미(Sinn)를 인식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현재 삶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보다는 말구유에 훨씬 가깝게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부활절 아침의 영광이 부족합니다. 또한 빛과 어둠의 대립을 명쾌하게 구별해내지도 못하고, 영들을 완전하게 분별해내지도 못합니다. 따라서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지도 못하며, 순교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현재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로 살아가는 실존의 틀은 초라한 예수님의 말구유이며, 초라한 일상과 습관적 삶입니다. 그러나 말구유의 초라함에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승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이 초라하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명과 이웃의 생명을 밝혀주고, 완전한 의미에서 비로소 인간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그 의미를 우리에게 허락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우리의 삶을 비추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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